더 케이지 : 짐승의 집
보니 키스틀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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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로서 극과 극의 인생을 살아오다 결국 최악의 밑바닥에 이르고 만 30살의 셰이 램버트는 가까스로 패션 대기업 사내변호사로 취직합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만에 셰이는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늦은 주말 밤, 인사부장 루시와 함께 탄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춰선 뒤 정전이 되더니 그녀가 느닷없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회사와 경찰은 루시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살인사건으로 몰아가기 시작했고, 이제 셰이는 죄가 없음을 스스로 밝혀야만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모든 정황은 그녀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뿐입니다.

 

멈춰선 채 정전된 엘리베이터, 두 사람이 탔지만 한 사람이 죽어버린 상황, 진상을 보여줄 객관적인 단서는 전무한 상태. 셰이 램버트가 처한 상황은 살인자로 오인받기 딱 좋은 암담함 그 자체입니다. 그녀 자신이 변호사이긴 하지만 정황만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유일하게 기댈 것이라곤 인사부장 루시의 자살동기가 밝혀지는 것뿐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셰이에게 불리한 진술과 증거들이 튀어나오면서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맙니다.

 

이야기는 “루시는 자살했다.”를 입증하려 분투하는 현재 시점의 셰이, 영광과 추락을 거듭했던 과거 시점의 셰이, 그리고 “루시는 셰이에게 살해당했다.”며 셰이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려는 회사 고위층 배럿 등 세 명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갑자기 멈춰선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죽음’은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우연 그 자체지만, 세 가지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 혹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구나,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됩니다. 인생 막장을 헤매던 셰이가 하필 이 회사에 들어온 일도, 하필 주말 늦은 밤에 루시와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 탄 일도, 그리고 하필 배럿이란 인물과 대립하게 된 일도 어찌 보면 예정돼있던 일처럼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그 많은 변수 가운데 하나만 방향을 조금 바꿨어도 셰이에겐 이런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아이러니들 덕분에 이야기는 더욱 쫄깃하게 읽힙니다.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이야기는 ‘셰이의 무죄입증 분투기’에 법정 스릴러까지 가미되면서 더욱 속도감을 높입니다. 그 자신이 변호사인 셰이는 무죄입증과 함께 복수를 계획하며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을 자신의 뜻대로 구워삶기도 하는데, 전직 변호사인 작가의 이력이 십분 발휘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나름 재미있게 읽었지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가장 큰 이유는 ‘허술한 악당 설정’ 때문입니다. 셰이를 살인범으로 만들려는 악당들의 동기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그들이 은폐하려는 악행 자체가 다소 현실감이 떨어졌고, 셰이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그들이 동원한 수단들 역시 어설프고 빈틈투성이였습니다. 특히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2014년에 어울리지 않는 조악한 수준의 ‘누명 씌우기’ 대목에선 웃음만 나올 뿐이었는데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바람에 주인공인 셰이에게 몰입하는 것마저 어려워지곤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셰이의 매력이 뒤로 갈수록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갑자기 비현실적인 슈퍼 히로인이 되는 것도, 그녀를 돕는 ‘조연’의 힘이 너무 막강해서 그 도움이 없었다면 셰이 혼자 뭘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모두 셰이의 매력을 반감시킨 요인들입니다.

 

초반 설정도 흥미로워 보였고, 법정 스릴러를 좋아해서 선택했지만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많이 남은 작품입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테니 이 작품이 궁금한 독자라면 다른 서평들도 꼭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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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부르는 그림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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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기담과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조합한 ‘미야베 월드 2막’ 가운데 ‘기타기타 시리즈’는 이제 막 두 편의 작품만이 세상에 나온 따끈따끈한(?) 막내입니다. 하지만 미미 여사는 ‘미야베 월드 2막’의 간판인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와 함께 작가로서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부를 만큼 ‘기타기타 시리즈’에 대한 애정 어린 계획을 품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기타이치는 명탐정도 아니고 뛰어난 자질을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책을 담는 상자’인 문고를 만들어 파는 행상에 불과한데다 비주얼도 완력도 결코 대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미 여사는 “이 젊은 문고상이 시중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트러블을 ‘입장이 약한 사람들’과 더불어 해결하며 어엿한 한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에도 시대의 풍경과 함께 잔잔하고 따뜻하게 그려냅니다. 히어로는 없지만 어벤저스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에도 시대 미스터리라고 할까요? 물론 기타이치가 마주하는 사건들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지만 다뤄지는 사건은 크게 두 개입니다. 하나는 표제작 ‘아기를 부르는 그림’에 등장하는 기괴한 사건으로, 당초 아기의 탄생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 제멋대로 저주를 부려 아기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미스터리 괴담의 전형적인 공식에 충실한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기타이치가 단골로 드나들던 도시락가게 일가족이 참혹하게 독살당한 사건으로, 이 역시 기담과 괴담의 분위기가 진하긴 하지만 비교적 현실적인 미스터리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한편으론 점포를 지닌 성공한 문고상을 꿈꾸기도 하지만 기타이치는 두 개의 사건과 마주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오캇피키(하급관리의 지명을 받아 치안업무를 맡던 민간인)가 되면 어떨까, 라는 기대감에 사로잡힙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자신을 키워준 오캇피키 센키치 대장의 뒤를 잇는 것은 기타이치에겐 더없이 각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문고상으로도, 오캇피키로도 한뼘 훌쩍 성장하는 기타이치의 눈부신 시간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기타이치가 맹활약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엄청난 반전이나 짜릿한 결말을 맛볼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이 시리즈의 진짜 매력은 기타이치 주변의 인물들, 즉 기타이치를 후원하거나 도와주거나 쓰디쓴 조언을 마다하지 않는 조연들에 있습니다. 남편 센키치 대장과 사별한 뒤로 기타이치의 뒷배를 봐주고 있는 마쓰바 마님, 기타이치의 버디 캐릭터이자 모든 것이 비밀투성이인 목욕탕 직원 기타지, 무가의 자식이지만 기타이치의 문고에 그림을 제공하는 신비로운 인물 에이카, 그리고 가난하지만 정감 어린 기타이치의 셋집 이웃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조연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맛깔나게 소화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기타이치를 도우면서 스스로도 성장하고 변화하는지를 체크하면서 읽는다면 이 작품의 맛을 좀더 진하게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야베 월드 2막’을 초기작부터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 곳곳에서 반가운 이름들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맏물 이야기’와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캇피키 모시치 대장, (잠깐 지나가듯 두어 줄 정도만 언급되지만) ‘얼간이’, ‘하루살이’, ‘진상’ 등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의 주인공인 미소년 유미노스케, 그 유미노스케를 도와 뛰어난 기억력을 발휘했던 짱구(산타로) 등이 그들입니다. 특히 이제 중년에 이르러 관리가 된 짱구의 경우 앞으로도 기타이치를 계속 도울 예정이라니 더 반갑게 느껴집니다. 미미 여사는 그동안 다른 시리즈에 등장시켰다가 끝내 마무리 짓지 못한 인물들을 ‘기타기타 시리즈’를 통해 모두 회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기타이치의 삶에 끼어들지 벌써부터 기대감이 만발합니다.

 

본편 뒤에 4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편집자 후기’가 수록돼있는데, 삼송 김사장 님께서 미미 여사에게 품고 있는 진한 애정과 함께 ‘미야베 월드 2막’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친절한 해설을 만날 수 있으니 혹시 이 작품으로 ‘미야베 월드 2막’을 처음 만난 독자라면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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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막이 내릴 때 (저자 사인 인쇄본) ㅣ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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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한 아파트에서 중년여성 오시타니 미치코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사망 직전 고향 친구인 유명 연극연출가 아사이 히로미를 만난 것이 확인됐지만 그 외에는 단서도 동기도 알아낼 수 없어 수사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경시청 수사1과의 마쓰미야는 인근에서 일어난 노숙자 사망사건과의 연관성을 밝혀내지만 두 사망자 사이의 연결고리는 오리무중일 따름입니다. 사촌형이자 니혼바시 경찰서 형사인 가가에게 자문을 구하던 마쓰미야는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기이한 달력 - 니혼바시 일대 12개의 이름이 적혀 있는 - 이야기를 꺼냈다가 가가의 표정이 굳는 걸 보곤 놀랍니다. 20여 년 전 집을 나간 뒤 고독사한 어머니 유리코의 유품 속에 똑같은 메모가 있던 걸 기억해낸 가가는 경시청 상부의 허락을 받고 수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기도의 막이 내릴 때’라는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이 작품은 ‘가가 형사 시리즈’의 10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입니다. 또한 시리즈 중간중간 언급됐던 가가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어서 그를 지켜봐온 팬이라면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어머니 유리코는 가가가 12살 때 집을 나간 뒤 소식을 끊었습니다. 경시청 수사1과에 근무하던 20대 후반 무렵, 그러니까 어머니가 집을 나간 지 16년 만에 낯선 사람으로부터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홀로 유골을 수습했던 가가는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들인 자신을 조금이라도 기억은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두 살인사건의 범인 혹은 피해자가 어머니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가가는 경시청의 수사를 돕는 형태로 어머니의 흔적을 쫓기 시작합니다. 평소보다 더 집요하고 꼼꼼하게, 하지만 평소와 달리 폭주하기도, 흥분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수사의 1차 목표는 아무런 연관성도 찾아볼 수 없는 두 살인사건 피해자의 접점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인 유명 연극연출가 아사이 히로미와 피해자들 사이의 접점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무려 30년 전의 일까지 조사해야 하는 탓에 마쓰미야를 비롯한 경시청 수사팀의 탐문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다름없습니다. 탐문 상대 대부분이 희미한 기억 외엔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가가는 그들의 진술 속에서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위화감을 포착하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앞선 시리즈들에서 늘 그랬듯 가가는 사소한 단서와 평범한 진술 속에서 진실과 진상을 알아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피살된 자의 달력과 어머니의 유품 속 메모에 같은 필체로 적혀있던 ‘니혼바시 12개 다리 이름의 미스터리’를 파악함으로써 단번에 수사에 큰 전환점을 마련합니다.

 

불과 2년 반 만에 다시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감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형사로서의 가가의 능력이 최대치로 발산되는 가운데 사건의 중심에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놓여있다 보니 그 어떤 작품보다 몰입감도 높고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중 한 작품을 연상시키는 살인사건의 진상 역시 비극의 강도가 대단해서 개인적으론 그의 미스터리 가운데 베스트로 꼽아도 손색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런 느낌은 시리즈를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만 제대로 맛볼 수 있지만 말입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라 더 깊은 인상과 여운이 남았겠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아쉬움 - 더는 가가 형사의 활약을 지켜볼 수 없다는 사실 – 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시리즈 전체를 순서대로 다시 읽으면서 일곱 번째 작품인 ‘붉은 손가락’에서 “이제야말로 가가의 전성시대가 시작됐구나!”라고 감탄했고, 실제로 그 뒤로 나온 세 작품은 하나 같이 가가의 매력이 만발했던 작품들이라 아쉬움은 더욱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지만, 가가의 퇴장은 너무 빨랐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된 게 9년 전이니,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다면 지금쯤 가가는 40대 중반이 돼있을 것입니다. 성격상 관리직이 되진 않았을 테니 여전히 현장을 뛰고 있는 가가를 그린 열한 번째 작품이 지금 나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니면 외전으로라도 좋으니 언젠가 꼭 한 번은 가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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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날개 ㅣ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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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년 남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니혼바시 다리 한가운데 있는 기린의 날개 동상 앞에서 발견됩니다. 피해자의 소지품을 갖고 있던 유력한 용의자가 도주 중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자 경찰은 일찌감치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심증 외에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서 안달이 납니다. 하지만 니혼바시 경찰서의 가가 형사는 사건의 이면에 또 다른 진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파트너이자 사촌동생인 경시청 수사1과 형사 마쓰미야와 함께 니혼바시 인근을 집요하게 탐문하던 가가는 아무도 예상 못한 곳에서 단서와 목격자를 찾아내곤 충격적인 진실을 밝혀냅니다.

 

‘기린의 날개’는 니혼바시 경찰서로 소속을 옮긴 가가 형사의 두 번째 활약을 그린 작품이자 ‘가가 형사 시리즈’의 아홉 번째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는 다음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끝으로 마무리되는데, 그야말로 가가의 매력이 한참 물이 오른 상태에서 시리즈가 종료된 탓에 지금까지도 아쉬움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졸업’에서 대학생 탐정으로 등장했던 가가는 ‘기린의 날개’에선 인간적으로 성숙한 것은 물론 경찰로서의 능력도 최고치를 찍습니다. ‘조용한 반골’이라고 부를 만한 그만의 물러서지 않는 고집은 사건을 얼른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상부 관료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누구든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게 분명한 사소한 단서와 진술을 통해 끝내 진실을 파헤쳐냅니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참혹한 사건들의 연결고리는 가가가 아니라면 끝내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겉모습은 위압적이지만 조금만 얘기를 나눠보면 따뜻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는 남자, 조직에 얽매이기 싫어 관할서를 전전하는 자유인,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단서와 말 한마디에서 실마리를 찾아내는 집중력과 추리력, 집요함과 끈기로 똘똘 뭉친, ‘진짜 이 세상에 있었으면 하는 경찰’의 표본.”

 

시리즈를 읽으면서 메모해놓은 저만의 ‘가가 인물평’입니다. 픽션의 주인공이라 가능한, 그야말로 판타지 같은 캐릭터이긴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리얼리티를 통해 그에게 ‘이웃의 친근한 형사’ 같은 사실감 넘치는 매력을 부여했습니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마다 가가를 돕는 천우신조들 - 기막힌 타이밍에 그에게 전달되는 정보들,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목격자들의 신비한(?) 기억력과 진술 등 - 이 간혹 그 사실감에 작은 흠집을 내곤 하지만, 그 천우신조들 가운데 상당부분은 가가의 노력의 성과이기도 해서 특별히 거부감이 들지는 않습니다.

 

시리즈 명품 중 하나인 ‘붉은 손가락’과 마찬가지로 ‘기린의 날개’ 역시 미스터리 못잖게 사건 이면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다 읽은 뒤 복기해보면 오히려 미스터리 자체보다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크고 작은 비극들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걸 깨닫게 되는데, 이는 비단 ‘가가 형사 시리즈’뿐 아니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미덕이기도 합니다. 살해당한 중년남자의 기이한 행동들, 유족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분노, 용의자로 몰린 채 의식을 잃은 남자의 연인의 슬픔 등 사건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사연은 냉정하지만 따뜻한 형사 가가의 매력과 잘 어우러져 이야기의 힘을 몇 배는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제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픽으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고르는 건 바로 이런 매력에 반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알라딘 MD 최원호의 소개글은 120% 이상 동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유의 인간미를 품은 형사 가가 교이치로가 등장하는 작품들은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범죄 트릭은 주역이라기보다는 보조적인 역할에 가깝다. 살인 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슬픈 이야기와 함께 부조리한 압력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성’의 힘 같은 드라마적 요소들이 전면에 나선다.”

 

시리즈 마지막 편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오래 전 집을 나간 뒤 홀로 삶을 마감한 가가의 어머니의 사연이 미스터리와 연결돼서 무척 큰 여운과 인상을 남긴 걸로 기억합니다. 가가의 매력과 시리즈 특유의 서사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라고 할까요? ‘기린의 날개’의 뒷맛을 좀더 오래 만끽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조만간 가가의 마지막 이야기를 허겁지겁 읽게 될 것 같습니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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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노웨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1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
제프리 디버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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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트(Phate)라는 닉네임을 쓰는 천재 크래커(cracker) 존 패트릭 핼러웨이는 자신이 사냥감으로 삼은 사람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그(녀)의 일상을 장악한 뒤 무참하게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입니다. 그에게 살인은 일종의 게임에 불과하며 피해자는 게임 속 캐릭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좀더 난이도가 높은 미션을 추구하며 끝없는 살인행각을 저지릅니다. 한편 CCU(캘리포니아주 경찰 컴퓨터범죄반)는 새로운 종류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범행에 사용됐다고 판단하곤 해킹죄로 수감 중인 해커 와이어트 질레트를 가석방시켜 수사에 참여시킵니다. 전통적인 강력계 형사인 프랭크 비숍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질레트를 신뢰하며 수사를 이어나가지만 페이트의 신원을 파악해내고도 예기치 못한 사태가 거듭 벌어지자 큰 위기에 빠집니다.

 

인터넷 대중화의 초기를 통상 1990년대 중반으로 본다면, 이 작품이 출간된 2001년은 뉴스와 쇼핑과 SNS 등 인터넷이 여러 가지 형태로 일상 속에 안착한 시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 이용자에게 가장 큰 위협은 트로이목마 같은 바이러스 정도였고, 그 누구도 피부에 와 닿는 공포를 느낄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파이웨어, 악성코드, 랜섬웨어 등 한 사람 혹은 기업이나 국가마저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을 누구나 체감하고 있고, 실제로 그런 뉴스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블루 노웨어’는 천재적인 크래커이자 연쇄살인범인 페이트와 역시 뛰어난 화이트 해커인 와이어트 질레트를 등장시켜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악몽을 리얼하게 그린 테크노스릴러입니다.

 

페이트의 주 무기는 단순한 바이러스를 넘어 다른 사람의 컴퓨터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물론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트랩도어’라는 소프트웨어로, 오늘날의 스파이웨어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신무기라고 할까요?

그가 사냥감을 선정하고 그(녀)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일상을 장악한 뒤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게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성호신술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여자, 외부침입에 만반을 대비했다고 자랑하는 학교관계자, 크래커의 침입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다고 떠벌이는 기업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정치인 등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면서 쾌감을 얻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그의 범행이 사이버테러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흉기를 이용한 아날로그 방식의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과거 그가 즐겼던 게임에서 살인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제한, 즉 “살인자는 칼로 심장을 찌를 수 있을 만큼 상대에게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는 룰을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야말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믹스된 희대의 연쇄살인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이트와 맞붙는 화이트 해커 와이어트 질레트는 페이트 못잖은 천재지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탓에 교도소에 수감 중입니다. CCU의 요구로 페이트 수사에 가담한 그는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지만 절대 드러내지 못할 비밀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탓에 한때 페이트의 공범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그런 상태에서 탈주극을 벌여 위기에 빠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목숨이 달아날 치명적인 상황에 마주치기도 합니다.

이런 그를 페이트 수사에 가담시킨 CCU는 ‘컴퓨터범죄반’이라는 그럴듯한 명칭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인원도, 예산도 부족한 초라한 조직입니다. 더구나 페이트의 수사는 CCU의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라 마초 스타일의 강력계 형사 프랭크 비숍이 지휘하게 되는데, 질레트와 비숍의 조합은 처음엔 물과 기름 이상으로 뒤섞이기 어려워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묘하게도 매력적인 콤비 플레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는 물론 여러 편의 스탠드얼론에서도 막판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제프리 디버의 서사는 ‘블루 노웨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초반에 공개된 범인 페이트의 잔인한 범행은 매번 예측불허로 전개되고, 누군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페이트의 공범의 정체는 사건이 일단락됐다고 여길 때쯤 새로운 반전과 함께 폭로되며, 질레트를 비롯한 CCU 내 수사관들의 어딘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캐릭터도 수시로 소소한 반전의 맛을 더해줍니다.

 

2022년의 독자에겐 페이트와 질레트의 대결이 고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2001년의 독자에겐 치명적인 소프트웨어를 통한 페이트의 가공할 사이버 테러가 (한 등장인물의 표현대로) ‘도시괴담’처럼 읽혔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프리 디버가 내다본 온라인 세계, 즉 블루 노웨어의 공포는 오늘날 명백한 현실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본작가 시가 아키라의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가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된 스마트폰이 한순간에 악마를 자신의 일상으로 불러들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면, ‘블루 노웨어’는 컴퓨터와 온라인 세상을 무대로 그 이상의 교훈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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