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학교 폭력 일기 ㅣ 쿤룬 삼부곡 2
쿤룬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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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이하 ‘학교폭력 일기’)은 역시 독특한 제목을 가진 ‘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이하 ‘청소지침서’)에 이은 ‘쿤룬 3부곡’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못한 세 번째 작품 역시 ‘업자에게 잊혀진 시체 보관기록’이라는 엽기적이면서도 특이한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청소지침서’가 희대의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를 숭배하는 전 세계적인 살인집단 ‘JACK’의 조직원만 골라 죽이며 복수를 펼치는 결벽증 미소년 스녠의 활약을 그렸다면, ‘학교폭력 일기’는 살인범에게 아버지를 잃은 뒤 지독한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살던 15살 여중생 장페이야가 무시무시한 살인마로 변신하여 복수를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쿤룬 3부곡’이라는 시리즈 명에 걸맞게 두 작품에는 몇 가지 접점이 있습니다. 장페이야는 ‘청소지침서’에서 아버지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어린 남매로 등장한 바 있습니다. 또한 부와 명예와 미모를 겸비한 심리치료사 닥터 야오, 그녀를 숭배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이하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정보판매상 다비도프, 그리고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의 주인공이 될 ‘시체수거업자’ 등 눈길을 끄는 조연들이 모두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계속 바뀌지만 크게 보면 한 편의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즉 시리즈의 묘미를 한껏 살린 작품들이란 뜻입니다.

 

아버지를 잃고 동생과도 헤어져 고모 집에 머물게 된 장페이야는 고모 부부의 거칠고 탐욕스런 학대는 물론 전학 간 학교에서마저 지독한 폭력에 시달립니다. 그런 장페이야에게 유일한 위안은 편의점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 류촨한뿐입니다. 어리숙해 보이지만 다정다감한 촨한 덕분에 장페이야는 찰나에 불과하지만 편안함과 안식을 얻습니다. 하지만 우연한 불청객 때문에 촨한의 어두운 과거가 밝혀지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장페이야와 촨한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때 고모집과 학교에서 더는 인내할 수 없는 사태들이 벌어진 상태에서 누군가 장페이야에게 손을 내밉니다. 복수하라고, 도와주겠다고.

 

‘가해자에 대한 복수’는 오래된 소재이기도 하고 근래 들어 지나치게 자주 소모된 탓에 다소 식상한 면이 있지만, 그래선지 장르를 불문하고 이야기를 창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설정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보입니다. 쿤룬 역시 그중 하나인데, 중화권 미스터리의 일반적인 특징 – 시끄럽고 잔혹하지만 블랙유머가 난무하고 대체로 쉽게쉽게 넘어가는 구성 등 – 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나름 흥미로운 캐릭터와 스토리를 자아냈습니다.

혹독한 성장기와 비극적인 사건 때문에 희대의 살인마가 된 ‘청소지침서’의 스녠이나 여린 모범생이었지만 끝이 안 보이는 지독한 폭력으로 인해 임계점을 넘은 끝에 피의 복수자가 된 ‘학교폭력 일기’의 장페이야는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임에 분명하지만, 작가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 속에 연민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 – 가족, 연인, 미래에 대한 희망 등 - 을 배치하여 나름 적절한 방식으로 중화 효과를 이끌어냅니다. 또한 주인공들에게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잔혹한 폭력을 거듭 가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저절로 그들을 응원하게 만들고 “부디 복수해!”라며 등을 떠밀고 싶게 만들기도 합니다. 과도할 정도의 감정 이입을 조장함으로써 캐릭터의 비현실성을 망각하게 한다고 할까요?

 

잔혹한 스릴러 서사를 좋아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별 4개에 그친 가장 큰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것이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해 이야기하자면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쉽게 오해하고, 너무 쉽게 살인마가 된다, 정도인데, 적잖은 중화권 미스터리에서 비슷한 아쉬움을 여러 번 느낀 걸 보면 아무래도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대목들이 많아서 인상 비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어도 중독성이 강한 이야기라 한 편이라도 읽으면 나머지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될 게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저 역시 시리즈 마지막 작품까지 달릴 생각인데, 이 작품에서 장페이야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류촨한이 막판에 세 번째 작품을 위한 큰 떡밥을 남겨서 더욱 기대감을 갖게 됐습니다. 과연 세 번째 작품에서 장페이야가 류촨한과 재회할지, 또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될지, 그럼으로써 첫 번째 작품의 주인공 스녠과 연결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1~2편의 모든 인물이 집합하여 화려한 대결을 펼친다.”고 하니 1~2편보다 더 세고 독하고 잔혹한 이야기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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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크 팔로우 리벤지 ㅣ 스토리콜렉터 105
엘러리 로이드 지음, 송은혜 옮김 / 북로드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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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수입 10억에 100만 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인스타맘 에미의 삶은 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허구입니다. 하지만 에이전트까지 두고 치밀한 계획 하에 인플루언서가 된 에미는 그 허구 속에서 행복할 뿐입니다. 그녀의 주제는 육아이며 콘셉트는 ‘완벽하게 불완전한 엄마’, ‘실수하고 고뇌하는 초보엄마’입니다. 영국의 맘들은 퍼펙트 맘보다는 실수투성이지만 어떻게든 육아의 미션을 이뤄내는 에미의 모습에 더 열광합니다. 한편 8년째 새 소설을 못 내놓고 있는 에미의 남편 댄은 아내의 모든 말을 ‘개소리’로 여기면서도 그녀의 인스타그램 활동을 돕습니다. 에미 없이는 지금의 생활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4살 딸 코코가 잠시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고 집에 도둑이 든 뒤로 에미와 댄의 삶은 뒤흔들리기 시작합니다.

 

SNS를 소재로 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여러 편 읽었지만 ‘라이크 팔로우 리벤지’는 “인스타그램보다 매혹적이고 중독성 있는 ‘인스타그램 누아르’”라는 홍보카피에 잘 어울리게 교과서적이면서도 정공법을 구사한 작품이라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인플루언서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어떤 식으로 팔로어를 관리하는지, 협찬과 광고를 어떻게 끌어들여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지 등을 상세히 묘사하는 것은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생활을 노출한 대가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부와 인기를 한 손에 쥐었던 인플루언서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 있는지 등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에미에게 깊은 원한을 품은 채 그 주위를 맴돌며 복수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익명의 범인을 등장시켜 스릴로서의 재미도 가미합니다. 에미 때문에 가족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범인은 인스타그램 사진을 통해 에미의 집을 알아내고 그녀의 가족들을 미행하는 것은 물론 범행을 저지를 때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씩 준비하는 치밀함을 드러내지만 사악함보다는 어딘가 연민을 자아내기도 해서 막판에 어떤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낼지 무척 궁금하게 만듭니다.

 

도메스틱 심리스릴러로 분류돼도 좋을 만큼 이야기는 에미와 댄의 화려하지만 균열 투성이인 일상과 늘 불안에 휩싸여있는 심리에 치중합니다. 어린 남매를 키우며 겪는 육아의 고통, 그 고통을 역으로 이용하여 인플루언서로 맹활약하는 에미의 폭주, 무능한데다 매사에 에미의 확고하고 논리적인 태도에 끌려가기만 하는 댄의 무력함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런 서사는 사실감과 긴장감을 높이는 장점이지만 동시에 일상에 관한 동어반복이자 지나치게 친절하고 상세한 묘사이기도 해서 다소 느슨하고 지루하게 읽히게 만드는 단점이기도 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별 1개를 뺀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인플루언서로서의 에미의 삶은 다소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자신의 사생활을 익명의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시키며 ‘좋아요’를 이끌어내고 댓글 개수에 집착하게 되는 SNS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로는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저처럼 책 사진 외에는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계정이라면 모르겠지만, 가족사진이나 집 주소 등 개인정보를 추정할 수 있는 콘텐츠를 올린 계정을 갖고 있다면 에미의 사례를 남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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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ㅣ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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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이치를 포함한 대학시절 등산동아리 멤버 6명과 슈이치의 사촌형 쇼타로 등 7명은 나가사키의 산속에 위치한 기이한 지하 건축물 - 거대한 화물선을 닮은 지하 3층 규모의 ‘방주’ - 을 발견하곤 크게 놀랍니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지은데다 수십 년 넘게 사용한 흔적이 없어 으스스한 기분을 자아내지만 멤버들은 폐허 탐험의 기회라며 하룻밤을 묵기로 합니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지진과 함께 ‘방주’의 출입구는 거대한 바위로 막혀버립니다. 거기다가 지하수의 흐름마저 바뀌어 며칠 후면 전원이 수몰될 위기에 처합니다. 문제는 바로 그 시점에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과연 누가, 왜, 하필 이 시점에 살인을 저지른 건지 아연한 가운데 연이어 살인이 벌어지자 멤버들은 패닉에 빠지고 맙니다.

 

일본의 각종 미스터리 차트를 석권한 것은 물론 “본격 미스터리가 살아남기 위한 ‘단 한 가지 멋진 방법’이 여기 있다.”(노리즈키 린타로), “얼얼한 맛의 에필로그에 백퍼센트 경악 보증.”(아키요시 리카코) 등 거장들의 찬사를 받은 ‘방주’는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면서도 지금껏 본 적 없는 특이한 설정과 예측 불허의 반전이 빛나는 작품입니다.

 

외부와 차단된 지하건축물 ‘방주’에서 살아나갈 길은 오직 하나, 지하 2층에 있는 닻감개를 통해 출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인데, 문제는 그 닻감개를 조작하는 사람은 밖으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지하수의 상승으로 전원 수몰되기까지는 단 1주일밖에 안 남은 상태이고, 결국 누군가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필 이런 때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인해 멤버들의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전날 밤늦게 산에서 길을 잃고 ‘방주’에 합류한 일가족 3명까지 모두 10명으로 시작된 폐허 탐험은 첫 피살자가 나온 순간부터 이른바 데스 게임, 즉 누군가 한 사람이 죽어야만 종료되는 참혹한 상황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밀실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무리 중에 범인이 있다.”라는 고전적인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외양을 갖고 있지만 ‘방주’는 거기에다 데스 게임의 원칙을 부여하여 이야기를 한층 복잡하고 긴장감 넘치게 만듭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닻감개로 바위를 치우고 홀로 갇히는 식으로) 희생돼야만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멤버들은 살인범에게 그 ‘희생’을 맡겨야 한다고 의견을 모읍니다. 하지만 살인범을 밝혀낸다고 해도 그가 ‘희생’을 받아들일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 살겠다고 피비린내 나는 폭력이 난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그가 아무리 살인범이라 해도 그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건 살인행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멤버들 모두 심한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상태에서 연이어 잔혹한 살인사건이 벌어지지만 누구도 단서 하나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 ‘방주’를 수몰시킬 지하수의 수위는 계속 높아질 뿐입니다.

 

과연 살인범이 기꺼이 희생양이 돼줄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굳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동기는 무엇일까? 왜 하필 지진 직후 살인이 시작된 것일까? 왜 살인범은 수고스럽게도(?)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얼핏 쉬워 보이는 밀실살인사건으로 시작됐지만 풀리는 수수께끼라곤 거의 없고 연이어 희생자가 등장하는데다 범인을 밝히는 것만으로 이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 때문에 독자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누가?’도 궁금하지만 ‘왜?’를 전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작가가 마지막에 어떤 엔딩을 내놓을지 예측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또한 막판에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지만 사실 진짜 클라이맥스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다 읽고 나면 “얼얼한 맛의 에필로그에 백퍼센트 경악 보증.”이라는 아키요시 리카코의 극찬에 100% 동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실 중반부에 동어반복과 함께 살짝 느슨해지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이 때문에 별 0.5개를 뺐습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듭 반복되는 반전을 제대로 맛보려면 그 지점들을 꼼꼼하게 읽어야만 합니다.

 

유키 하루오는 1993년생의 젊은 작가입니다. 거장들의 극찬을 받은 ‘방주’가 본인에겐 더없는 영광이자 자랑이겠지만 동시에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허들인 것도 사실입니다. 유키 하루오가 머잖아 ‘방주’를 뛰어넘는 본격 미스터리를 선보여줄 것을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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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ㅣ 에를렌뒤르 형사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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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직전의 호텔 지하실에서 도어맨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피해자의 신상을 알 수 없어 수사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힌다. 호텔에서 20년 가까이 일했지만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확실한 건 ‘구드라우구르’라는 이름뿐, 원한관계나 범행 동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 형사반장 에를렌두르는 호텔에 숙박하며 수사를 진행한다. 얼마 후 호텔 직원들 사이의 갈등과 수상쩍은 거래가 드러나고, 구드라우구르를 찾아온 영국 관광객을 통해 피해자의 기구한 어린 시절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그는 왜 가족과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끊었을까? 왜 아버지와 누나는 그에게 그토록 적개심을 보이는 걸까? 호텔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직원들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서울 영등포구와 인구는 거의 비슷하지만(37만), 땅덩어리는 무려 4,000배에 달하는 아이슬란드는 말하자면 총기난사나 살인사건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조용하고 한적하고 광활한 이미지를 가진 나라입니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은 그런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를 주 무대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 ‘형사 에를렌두르 시리즈’를 (2010년까지) 모두 11편 출간한 인기 있는 대중작가입니다. 아무리 조용하고 한적한 나라라고 해도 역시 사람 사는 곳에서는 사건과 사고를 피할 수는 없는 일이고, 미스터리와 스릴러 역시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은 모두 네 편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7편이 검색되는데 그중 ‘목소리’를 비롯하여 ‘무덤의 침묵’과 ‘저주받은 피’는 각각 개정판이 출간된 탓에 중복 검색됩니다.) 재미있는 건 그의 이름 Arnaldur Indriðason이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또는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으로 제각각 표기된 점인데, 안 그래도 쉽지 않은 이름이라 더 헷갈릴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 Erlendur도 엘릭시르가 펴낸 작품은 에를렌뒤르, 영림카디널이 펴낸 작품은 에를렌두르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중 유일하게 읽은 작품은 ‘저체온증’인데, 읽은 지 6년이 지났어도 음울하고 냉기가 몰아치던 분위기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써놓은 서평을 찾아보니 “스릴러라기보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의 비극’에 더 가깝다.”, “어디 한군데 밝은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냉기만 내뿜는”, “에를렌뒤르라는 인물이 평생을 겪어 온 저체온증에 전염된 듯한 느낌” 등 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문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선지 살인사건이 벌어진 호텔에서 태연히 식탐을 부리며 뷔페 음식을 ‘공짜로’ 만끽하는 에를렌두르의 첫 등장 모습은 꽤 의외였습니다. 마치 가볍고 코믹한 경찰소설의 도입부처럼 읽혔는데, 이런 분위기는 얼마 못가 급변합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의 비극적인 과거와 가족사가 밝혀지면서부터 에를렌두르의 평생의 트라우마가 다시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에를렌두르는 어린 시절 8살 동생과 함께 산에 올랐다가 화이트아웃에 휘말린 뒤 자신만 구조되고 동생은 시신조차 발견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만 충격적인 사고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붕괴됐고, 결혼생활 역시 순탄치 못하게 마무리된 것은 물론 자식들과도 거의 연을 끊은 채 피폐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재회한 자식들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성장한 딸 에바는 마약 중독에 매춘을 일삼다 유산을 겪었고, 아들 신드리는 알코올중독 상태였습니다. 시체조차 발견 못한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그의 일생을 저체온 상태로 밀어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 역시 에를렌두르 못잖은 참혹한 10대를 보냈습니다. 한때 촉망받는 소년성가대원이었던 그는 일찌감치 찾아온 사춘기와 변성기로 인해 목소리를 잃은 직후 자신은 물론 가족마저 철저하게 붕괴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후 집을 떠나 가족들과 연을 끊은 채 호텔에서의 밑바닥 삶을 살아왔고 누군가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 것입니다. 에를렌두르는 형사반장으로서 냉정하게 수사를 지휘하면서도 구드라우구르의 삶을 자신의 그것과 자꾸만 비교해가며 끝없는 우울감에 빠집니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온 딸 에바는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이며 안 그래도 힘든 에를렌두르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저체온증’에 썼던 서평과 마찬가지로 “에를렌뒤르라는 인물이 평생을 겪어 온 저체온증에 전염된 듯한 느낌”을 이번에도 피할 수 없었는데,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은 바로 이 에를렌두르의 트라우마입니다. 아직 안 읽은 작품들은 물론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대략 비슷한 서사가 아닐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 외에도 이 작품에는 에를렌두르와 비슷한 고통을 겪은, 그러니까 가족의 붕괴나 반목 혹은 상실을 겪은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가족에게 어린 시절을 빼앗기고 만 인물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때론 ‘누가 범인?’보다도 그 인물들의 행로가 더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저체온증’에 비하면 책 읽기 자체는 비교적 덜 고통스럽고 덜 힘들었지만 역시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인물은 상실을 맞닥뜨린 사람들, 시간 속에 얼어붙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본인의 변대로 ‘목소리’는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가족으로 인한 거대한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그린 비극 서사입니다. 편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는 없지만 아이슬랜드의 혹독한 추위를 체감하면서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형사 에를렌두르 시리즈’

01 Synir duftsins (Sons of The Dust, 1997)

02 Dauðarósir (Silent Kill, 1998)

03 Mýrin (Jar City, 2000, 한국 출간 ‘저주받은 피’)

04 Grafarþögn (Silence of the Grave, 2001, 한국 출간 ‘무덤의 침묵)

05 Röddin (Voices, 2003, 한국 출간 ‘목소리’)

06 Kleifarvatn (The Draining Lake, 2004)

07 Vetrarborgin (Arctic Chill, 2005)

08 Harðskafi (Hypothermia, 2007, 한국 출간 ‘저체온증’)

09 Myrká (Outrage, 2008)

10 Svörtuloft (Black Skies, 2009)

11 Furðustrandir (Strange Shore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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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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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인챈티드 존스는 실력 있는 가수 지망생이자 수영 선수다. 맏언니로서 책임감 있게 동생들을 돌보며, 흑인이란 이유로 억측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백인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모범적으로 생활한다. 전설적인 R&B 가수 코리 필즈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인챈티드를 유망주로 점찍고, 그녀는 코리와 투어를 떠나면서 가수로서 성공할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코리는 꿈과 사랑을 미끼삼아 그녀를 정신적으로 지배해 성적인 착취와 폭력을 일삼는다. 코리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인챈티드는 유력한 살인 용의자가 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어른들의 세상이 나를 널빤지 아래로 떠밀어 악어들의 먹잇감으로 만들었다.”는 (본문 속 한 줄이자) 홍보 카피와 흑인소녀가 그려진 표지 때문입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관한 묵직한 서사일 거라고 예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일러두기’에 “경고 : 성적 학대와 강간, 폭행, 아동학대, 납치, 마약중독이 언급됩니다.”라는 문구를 보곤 그 이상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노래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 세계적인 가수가 되고 싶은 순수하고 뜨거운 열망, 17살에 어울리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적당한 반항심,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믿을 수 없는 행운과 사랑에의 흥분 등 인챈티드 존스의 17살은 눈부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줄 신과도 같은 존재이자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던 R&B 가수 코리 필즈로 인해 인챈티드의 17살은 참혹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신뢰를 얻은 뒤 행해지며 피해자를 길들이고 가스라이팅을 일삼아 피해자의 정신상태를 지배하는 범죄”인 그루밍 성폭력이 인챈티드를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경찰이 문을 두드리는 가운데 인챈티드와 코리가 온통 피범벅이 된 공간에 쓰러져있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과거로 되돌아가 인챈티드의 에너지 넘치던 시절과 오디션장에서 코리를 만나게 된 사연을 소개합니다. 분명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작가가 그려낸 인챈티드의 빛나던 시절은 부디 이 이야기가 아무런 굴곡도 없는 행복한 성장소설로 마무리되기를 바라게 만듭니다. 속도감 넘치는 짧은 챕터와 짧은 문장들은 바닷가에서 성장하며 물과 노래를 사랑하게 됐던 인챈티드의 밝고 통통 튀는 캐릭터를 더욱 싱그럽게 만들었고, 10대다운 반항심과 미국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계층이라는 흑인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갖고 있지만 언니로서, 딸로서, 학생으로서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당당하게 마주하며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인챈티드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챈티드가 ‘악어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그루밍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과정은 눈부시게 그려진 그녀의 빛나던 시절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게 읽힙니다. 스스로 피해자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꿈과 사랑을 믿으며 폭력의 고리 안에 머물고 마는 인챈티드는 가스라이팅을 통한 그루밍 성폭력이 얼마나 잔인하게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흑인여성이 입은 피해를 보듬기는커녕 거꾸로 외면하고 의심하는 대중과 언론과 경찰의 행태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그루밍 성폭력과 결합됐을 때 얼마나 더 끔찍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인챈티드가 코리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심문기록은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조종당한 소녀들을 향한 노골적인 비판에 관한, 죄를 저지른 장본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관한, 피해자들이 용기를 낸 순간에 그들을 보호하고 도와야 함에도 절대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쓰는 소녀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그 입장이 돼본 적 없는 사람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피해자라면 딛고 일어설 용기를, 그동안 방관자였다면 한걸음 다가갈 용기를 17살 인챈티드의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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