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살 인챈티드 존스는 실력 있는 가수 지망생이자 수영 선수다. 맏언니로서 책임감 있게 동생들을 돌보며, 흑인이란 이유로 억측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백인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모범적으로 생활한다. 전설적인 R&B 가수 코리 필즈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인챈티드를 유망주로 점찍고, 그녀는 코리와 투어를 떠나면서 가수로서 성공할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코리는 꿈과 사랑을 미끼삼아 그녀를 정신적으로 지배해 성적인 착취와 폭력을 일삼는다. 코리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인챈티드는 유력한 살인 용의자가 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어른들의 세상이 나를 널빤지 아래로 떠밀어 악어들의 먹잇감으로 만들었다.”(본문 속 한 줄이자) 홍보 카피와 흑인소녀가 그려진 표지 때문입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관한 묵직한 서사일 거라고 예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일러두기경고 : 성적 학대와 강간, 폭행, 아동학대, 납치, 마약중독이 언급됩니다.”라는 문구를 보곤 그 이상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노래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 세계적인 가수가 되고 싶은 순수하고 뜨거운 열망, 17살에 어울리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적당한 반항심,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믿을 수 없는 행운과 사랑에의 흥분 등 인챈티드 존스의 17살은 눈부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줄 신과도 같은 존재이자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던 R&B 가수 코리 필즈로 인해 인챈티드의 17살은 참혹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신뢰를 얻은 뒤 행해지며 피해자를 길들이고 가스라이팅을 일삼아 피해자의 정신상태를 지배하는 범죄인 그루밍 성폭력이 인챈티드를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경찰이 문을 두드리는 가운데 인챈티드와 코리가 온통 피범벅이 된 공간에 쓰러져있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과거로 되돌아가 인챈티드의 에너지 넘치던 시절과 오디션장에서 코리를 만나게 된 사연을 소개합니다. 분명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작가가 그려낸 인챈티드의 빛나던 시절은 부디 이 이야기가 아무런 굴곡도 없는 행복한 성장소설로 마무리되기를 바라게 만듭니다. 속도감 넘치는 짧은 챕터와 짧은 문장들은 바닷가에서 성장하며 물과 노래를 사랑하게 됐던 인챈티드의 밝고 통통 튀는 캐릭터를 더욱 싱그럽게 만들었고, 10대다운 반항심과 미국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계층이라는 흑인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갖고 있지만 언니로서, 딸로서, 학생으로서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당당하게 마주하며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인챈티드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챈티드가 악어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그루밍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과정은 눈부시게 그려진 그녀의 빛나던 시절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게 읽힙니다. 스스로 피해자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꿈과 사랑을 믿으며 폭력의 고리 안에 머물고 마는 인챈티드는 가스라이팅을 통한 그루밍 성폭력이 얼마나 잔인하게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흑인여성이 입은 피해를 보듬기는커녕 거꾸로 외면하고 의심하는 대중과 언론과 경찰의 행태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그루밍 성폭력과 결합됐을 때 얼마나 더 끔찍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인챈티드가 코리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심문기록은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조종당한 소녀들을 향한 노골적인 비판에 관한, 죄를 저지른 장본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관한, 피해자들이 용기를 낸 순간에 그들을 보호하고 도와야 함에도 절대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쓰는 소녀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그 입장이 돼본 적 없는 사람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피해자라면 딛고 일어설 용기를, 그동안 방관자였다면 한걸음 다가갈 용기를 17살 인챈티드의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