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4년 7월
평점 :
품절


호화 별장지의 바베큐 파티가 끝난 직후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인근 호텔에서 최고급 만찬을 즐긴 뒤 자수한 범인은 사형을 당하고 싶어서, 또 가족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무차별 살상을 저질렀다는 불가해한 동기를 밝힌다. 하지만 범행 과정에 대한 진술은 일절 거부한다. 유족들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자 ‘검증회’를 열고, 그 자리에 경시청 수사1과 가가 교이치로 형사가 참석한다. 유족들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되는 비극 속에서 가가 형사는 사람들이 저마다 감추고 있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결국 예상 밖의 진실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는 열 번째 작품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일본 2013년, 한국 2019년 출간)로 공식 종료됐습니다. 워낙 좋아하는 시리즈라 언젠가 다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왔는데, 가가 형사가 조연으로 등장한 ‘희망의 끈’(일본 2019년, 한국 2022년)이 출간되면서 어쩌면 그 바람이 이뤄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막이 내릴 때’ 이후 꼭 10년 만에 ‘가가 형사 시리즈’는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를 통해 부활했습니다.

‘희망의 끈’을 시리즈에 포함시키느냐 여부에 따라 이 작품을 시리즈 11편 혹은 12편으로 부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론 11편으로 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희망의 끈’은 스핀오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향후 ‘가가 형사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지 지켜봐야 확실해질 것 같습니다.

 

호화 별장지에서 하룻밤 사이에 여섯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즉시 범인이 자수했지만 유족들은 범인이 누구인지보다는 피해자들이 왜,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알 수 없어 분노 이상의 답답함에 치를 떱니다. 만일 범인이 끝까지 범행 과정에 대한 진술을 거부한 채 사형을 당한다면 가족의 죽음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날의 상황을 재구성하기 위해 ‘검증회’라는 자리를 만들기로 했고, 유족 중 한 사람인 와시오 하루나는 선배 간호사 가나모리 도키코의 소개로 가가 형사를 만나 ‘검증회’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장기 휴가 중이던 가가는 말하자면 옵서버(observer) 자격으로 ‘검증회’에 참석하여 유족들의 진술을 통해 그날의 진상을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어차피 이런 생물이다. 겉으로 하는 행동과 속으로 생각하는 건 전혀 다르다. 겉과 속이 다른 게 보통이다.” (p39)

 

호화 별장지라는 설정에 걸맞게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길 만큼 넉넉한 부와 지위를 축적했고 그에 어울리는 점잖고 교양 있는 교류를 나눠왔지만, 실은 그들 사이의 관계는 이기심과 허영과 위선으로 이뤄진 것뿐입니다. 그 때문에 범행과정을 밝히기 위한 ‘검증회’는 시간이 갈수록 별장지 사람들의 추악한 관계를 폭로하는 자리로 변질되는데, 거기에 기름을 부은 건 누군가가 유족들 모두에게 보낸 의문의 한 줄 편지 -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 입니다. 이 편지로 인해 유족들은 자신들 가운데 누군가가 범인과 공모했다는 의심을 품게 되고, 결국 자신과 오래전부터 악연을 이어온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아세우는 이전투구가 벌어집니다. 누구나 겉과 속이 다른 일면을 갖고 있긴 하지만,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지위를 갈망하는 호화 별장지 사람들의 허영과 위선은 살의 이상의 위험한 욕망으로 들끓고 있던 것입니다. 가가는 이들의 추악한 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동시에 사소한 단서와 진술을 통해 그날 밤 벌어진 참극의 진상을 조금씩 파헤쳐나갑니다.

 

범행 과정을 밝히는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도 눈길을 끌지만, 그동안 ‘가가 형사 시리즈’가 추구했던 휴먼 미스터리의 미덕도 잘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일그러진 가족 관계, 만족을 모르는 탐욕, 위선으로 가득 찬 거짓 선의, 말초적인 욕망에의 탐닉 등 ‘어차피 겉과 속이 다른 생물인 인간들’의 추악함을 고발하며 그를 통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구도가 안정적이고 탄탄하게 그려졌다는 뜻입니다.

‘검증회’라는 설정 때문에 가가의 행동반경이 한정돼있으며, 실제 수사보다는 토론과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별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입니다), 마지막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놀라운 진상을 드러내는 가가의 매력은 그동안 시리즈의 부활을 고대했던 제겐 충분히 만족스럽게 읽혔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가 팬 서비스 차원에서 나온 1회성 작품인지, 시리즈의 부활을 알리는, 말하자면 ‘가가 형사 시즌 2’의 첫 작품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저 바람이라면 다만 몇 편이라도 가가 형사의 활약을 더 지켜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만일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내년쯤이 아닐까 싶은데, 희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기다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희망의 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0대의 카페 여주인 하나즈카 야요이가 피살체로 발견된다. 경찰은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탐문수사에 들어가지만,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야요이가 원한을 살 사람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그런 가운데 전 남편 와타누키와 카페 단골손님인 시오미가 용의선상에 떠오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한 데다 뚜렷한 살해 동기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경시청 수사1과 형사 마쓰미야는 두 사람 다 야요이와 관련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수사가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마쓰미야는 곤혹스러워 하지만 그가 소속된 팀의 리더인 가가 교이치로는 마쓰미야의 ‘감’을 믿으라며 격려해준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인물이 자수하면서 경찰은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지만, 마쓰미야는 범인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의 10편이자 마지막 편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가 출간된 건 2013년(일본 출간)입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9년에 가가 형사가 등장하는 ‘희망의 끈’이 출간됐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가가 형사가 아니라 그의 사촌동생이자 경시청 수사1과 형사인 마쓰미야 슈헤이입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을 ‘가가 형사 시리즈’의 11번째 작품으로 볼 것인지 스핀오프로 볼 것인지, 아니면 ‘마쓰미야 슈헤이 시리즈’의 첫 편으로 볼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최근 한국에 출간된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일본 출간 2023년)의 출판사 소개글에는 “‘가가 형사 시리즈’의 12번째 작품”이라는 카피가 들어있는데, 그건 ‘희망의 끈’을 11번째 작품으로 봤다는 뜻입니다. 독자마다 느낌이 다르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론 ‘가가 형사 시리즈’의 스핀오프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희망의 끈’은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 자주 다뤘던 비극적인 가족사를 소재로 삼은 휴먼 미스터리입니다. 카페 여주인이 살해당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두 가족 간에 얽히고설킨 불행한 과거사, 상상을 초월하는 악연, 돌이킬 수 없는 복잡한 운명이 드러나는 구조입니다. 거기에다 수사를 담당한 마쓰미야 본인의 기가 막힌 가족사와 비밀 이야기까지 병행되면서 단순히 ‘범인 찾기’ 미스터리 이상의 묵직한 감동과 연민을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기도의 막이 내릴 때’ 마지막 장면에서 가가는 경시청 수사1과로 복귀했습니다. ‘희망의 끈’은 그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이 배경인데, 가가는 주임이란 직책의 관리자가 됐지만 여전히 마쓰미야와 함께 현장을 누비기도 합니다. 또한 이제는 형사로서 제법 관록이 붙은 마쓰미야에게 여전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를 해주는 멘토로서의 역할도 성실히 수행합니다. 마쓰미야는 그런 충고에 툴툴거리면서도 이따금 자신의 성장을 확인할 때마다 가가에게 고마움을 느끼곤 합니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마다 수사에 큰 변곡점을 이끌어내는 가가를 보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절감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마쓰미야가 비극적인 가족사를 수사하는 입장이자 동시에 뒤늦게 자신의 가족사의 비밀을 알게 되는 당사자라는 점입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의 팬이라면 가가 역시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래선지 마치 기시감 같은 것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작품을 ‘마쓰미야 슈헤이 시리즈’의 첫 편으로 여기는 독자도 꽤 많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등장인물도 꽤 많고 사소한 설명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은 작품이라 내용에 대해선 별로 언급하지 못했는데, 그만큼 허투루 읽어 넘길 페이지가 없을 정도로 재미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설정만 보면 ‘막장 가족극’으로 폄하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정교한 미스터리가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어서 별 거부감 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작품입니다.

 

원래 이렇게 급하게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가가 형사가 주인공을 맡은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가 출간되는 바람에, 그 직전 작품인 ‘희망의 끈’을 부랴부랴 읽게 됐습니다. 가가 형사와 다시 만난 것도 반가웠고, 마쓰미야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흐뭇했습니다. 물론 수시로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휴먼 미스터리는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여러 편 읽게 됐는데, 새삼 그의 천재적인 이야기꾼 재능에 매번 탄복하곤 했습니다. 아직 못 읽은 그의 작품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마저도 다 읽고 나면 오래 전에 읽은 명품들을 다시 한 번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일몰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인 각본가 가이 치히로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영화감독 하세베 가오리에게서 신작 각본에 대해 의논하고 싶다는 메일을 받고 깜짝 놀랍니다. 더구나 그 소재가 15년 전 고향 사사즈카초에서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이란 사실에 궁금증이 더해졌지만, 실은 가오리 역시 그곳에서 3년 정도 살았으며, 그래서 그 사건을 영화로 조명하고 싶다는 설명을 듣곤 그녀의 신작에 전력을 다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자료조사를 하면 할수록 치히로는 혼란에 빠집니다. 새롭게 밝혀낼 진상이 없는 그 사건에 가오리가 집착하는 이유도, 영화로 만들려는 이유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오리는 그저 “알고 싶어서.”라는 모호한 말만 할뿐입니다. 한편 치히로는 일가족 살해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사고로 죽은 언니 치호를 떠올리며 착잡한 심경에 빠집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에 별 3.5개라는, 보기 드문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그건 ‘일몰’이 함량이 부족한 작품이라거나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서사나 스토리가 제 취향과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일본소설’로만 분류돼서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을 강타한 전대미문의 살인 사건. 15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을 좇는 두 여성이 맞닥뜨린 진실은?”이라는 소개글 때문에 미나토 가나에 특유의 미스터리 서사를 조금은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읽은 건데, 분명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맞지만, ‘일몰’은 두 여성 가오리와 치히로가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에 겪은 깊은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정통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됐지만 하세베 가오리는 대중성 높은 상업영화와는 거리가 먼 감독입니다. 오히려 논픽션에 가까운 무거운 주제 - ‘자살한 자들의 마지막 한 시간’ - 를 그려내서 화제가 됐는데, 그녀는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알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다소 선문답 같은 대답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잠시 살았던 사사즈카초에서 15년 전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을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 지금도 역시 같은 목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업계에 발을 들인 지 10년이 됐는데도 대작가의 조수 역할에 머물고 있는 신인 각본가 가이 치히로는 가오리와의 작업을 통해 제대로 된 각본가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오리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합니다. 범인이 뒤바뀔 일도, 이미 알려진 것 외에 새롭게 드러날 일가족의 사연도 없는데 굳이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가오리는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알고 싶어서.”라는 가오리의 말 속엔 무슨 함의가 숨어있는 건지 치히로는 내내 답답할 뿐입니다.

 

“감독님은 그렇게까지 해서 뭘 알고 싶은데요? 그리고 알면, 그 다음에 뭐가 있는데요?”

“잘은 모르지만, 알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 (p325)

 

인구 1만 5천 명 안팎의 작은 소도시 사사즈카초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일몰’에는 가오리와 치히로를 둘러싼 여러 건의 죽음이 등장합니다. 가족, 친구, 좋아하는 사람을 비극적으로 떠나보냈던 가오리와 치히로는 보통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성장했고, 그것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영화 자료조사 차 여러 사람을 만나며 접하게 되는 정보들은 뜻밖의 진실을 알게 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처와 트라우마를 더 고통스럽게 헤집기도 합니다. 그 지난한 과정들이 자신들을 따뜻한 구원으로 이어줄지, 더 가혹한 지옥에 밀어 넣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가오리와 치히로는 15년 전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가 ‘서사나 스토리가 제 취향과 거리가 꽤 멀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앞서 밝혔는데, 저와는 반대로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 없이 ‘절망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의 구원과 재생에 관한 이야기’라는 홍보 카피에 눈길이 끌리는 독자라면 별 5개도 모자랄 만큼 푹 빠져서 읽을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만일 똑같은 이야기를 정통 미스터리 서사로 풀었다면 재미있게 읽긴 했겠지만 ‘일몰’ 특유의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만끽하기 어려웠을 거란 점은 저 역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제 서평 때문에 조금이라도 선입관을 갖게 된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아빠는 유튜버
하마구치 린타로 지음, 김현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다운 바다와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미야코 섬에 오래된 게스트하우스 유이마루가 있습니다. 10여 년 전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도쿄에서 분투하다가 결국 꿈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유고가 11살 딸 우미카를 홀로 키우며 운영하는 곳입니다. 술과 낙담으로 살아가던 유고는 어느 날 유튜브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뒤 신세계를 만난 듯 흥분합니다. 그리고 유명 유튜버가 되겠다고 선언하곤 갖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조금씩 구독자와 조회수를 모으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한심한 눈길로만 바라보던 우미카는 아빠가 유튜브를 통해 돈을 벌고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그 의욕이 지나쳐 점점 위험한 영상에 몰두하며 사고까지 일으키자 우미카는 큰 의문에 휩싸입니다. “아빠는 왜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어 할까?”

 

유튜브라는 매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다, 유일하게 찾아 봤던 영상이라곤 그림으론 이해하기 어려웠던 낚시 매듭법 영상뿐이라 이 작품의 제목만 봤을 때는 조금도 끌리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소개글을 읽다가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오키나와의 미야코 섬이 이 작품의 배경이란 걸 알게 됐고, 오로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재미있는 건 제목에도 ‘유튜버’가 들어있고, 분명 ‘유튜브’가 중요한 소재이긴 하지만 정작 이 작품은 유튜버나 유튜브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혹시 저처럼 유튜브에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데, 마지막엔 여러 번 울컥하는 느낌까지 만끽할 수 있어서 온기와 위로를 찾는 독자에겐 더없이 알맞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게스트하우스에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변, 그리고 다분히 시골스러운 정경이 묘사되고 있지만 미야코 섬은 세계적인 호텔 체인이 들어설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다만 유고와 우미카가 살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유이마루는 분주한 관광지 어딘가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외떨어지고 고즈넉한 이미지를 풍깁니다.

풍경에 비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꽤나 요란합니다. 특히 간절했던 코미디언의 꿈을 접고 부모가 물려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유고는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철없는 괴짜처럼 보입니다. 반면 그림을 좋아하고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11살 딸 우미카는 애어른 같은 캐릭터라 유고와는 다른 의미에서 개성 있는 캐릭터입니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유고가 유튜브라는 신세계를 알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무작정 유명해지고 싶다며 채널을 열고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유고는 초반에는 꽤나 고전하지만 코미디언 지망생 특유의 기질을 살려 점차 구독자를 끌어들입니다. 문제는 돈도 충분히 벌게 됐고 나름 유명세도 타게 됐지만 유고의 폭주는 그칠 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비싼 장비를 사들이는가 하면 위험천만한 행동을 영상에 담아 조회수를 올리는데 골몰합니다. 그러면서 전국 방송에 나가는 유명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거듭 밝힙니다.

우미카를 비롯한 게스트하우스 주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유고의 폭주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단 한 사람, 10여 년 전 도쿄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고타로만이 유고를 남몰래 응원합니다. 유고는 고타로와 단 둘이 있을 때면 10여 년 전 도쿄에서 꿈을 좇아 분투했던 일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 회상 장면이 현재의 이야기와 번갈아 등장하는데, 바로 그 회상 속에 ‘현재 유고가 과격하게 폭주하는 이유’가 숨어있고, 그 이유는 막판에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함께 독자의 심금을 울리게 됩니다.

 

‘아빠는 유튜버’는 꿈에 관한 이야기이자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0여 년 전 유고가 절친들과 함께 꿈을 이루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던 이야기, 현재 최고의 유튜버가 되어 전국 방송에 나가기 위해 다시 한 번 유고가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유이마루 사람들이 단단하고 따뜻한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의외의 반전이 선사하는 눈물 폭탄까지 만끽할 수 있어서 늘 독한 장르물만 탐독하던 저에겐 무척 신선한 책읽기를 경험하게 해줬습니다.

원제를 그대로 살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독자의 눈길을 끌기 어려워 보이는 ‘제목’과 조금은 공을 들였으면 좋았을 ‘표지’가 아쉬웠는데(미야코 섬의 정경을 배경으로 유이마루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면?), 독자들의 입소문을 통해서라도 이 작품의 진가와 미덕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기도의 카르테
치넨 미키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판타지 소설이 아닌가 싶을 만큼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련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상냥하고 다정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환자의 마음에 입은 상처를 달래주고 치료하려고 애쓰는 병아리 의사 선생님이. 술술 넘어가는 책장, 줄줄 새어나오는 미소, 어쩌면 이렇게 착한 소설이 있을까.” (p269, ‘옮긴이의 말’ 중)

 

‘기도의 카르테’는 주인공 스와노 료타가 준세이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보낸 2년 동안의 수련의 생활을 연작단편 형식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스와노는 지도교수의 가르침 아래 정신과, 외과, 피부과, 소아청소년과, 순환기 내과를 돌며 환자들을 열심히 치료하는 수련의지만, 동시에 그 환자들이 품고 있는 내밀한 사연들을 포착하여 마음에 입은 상처까지 치료해주는 특별한 의사이기도 합니다.

 

툭하면 대량의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구급차를 불러 실려 오는 여자, 완치가 확실한 간단한 수술법을 거부한 채 위험도 높은 개복수술을 요구하는 노인, 어떻게 봐도 수상할 뿐인 기묘한 화상을 입은 중년여자, 1년 전부터 천식 발작이 갑자기 심해진 소녀, 한때 아이돌 출신 배우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치명적인 심장병 때문에 이식수술만 기다리고 있는 여자 등 스와노는 자신이 마주한 환자들에게서 다른 의사들은 알아채지 못한 특별한 사연과 비밀을 포착합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대학병원에서 의사가 한 사람의 환자에게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스와노는 쪽잠과 휴식을 포기하면서까지 환자들이 감추려 하는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합니다.

 

스와노를 지도하는 각 과의 의사들은 그의 진심 어린 노력과 의사로서의 재능을 칭찬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과에는 맞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칩니다. 이유는 모두 똑같습니다. 환자 한 사람에게 전력을 다하는 스와노의 성격이 많은 환자들을 한꺼번에 돌봐야 하는 시급한 상황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스와노를 놓고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련의”라고 표현한 건 바로 이런 캐릭터 때문입니다.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겠지만 “5시간을 기다렸지만 의사와 만난 건 달랑 5분뿐”이라는 대형병원 환자들의 불만을 떠올리면 분명 스와노는 “이런 의사가 현실에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이라는 바람을 갖게 만드는 판타지 소설 속 의사로 보입니다. 의료체계가 무너져버린 이즈음의 세상을 떠올려보면 스와노 같은 의사에 대한 간절함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인데, 그래선지 현직 의사인 치넨 미키토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바가 더욱 진정성 있게 느껴졌습니다.

 

뒤늦게 그 진가를 알아본 탓에 미처 못 읽었던 치넨 미키토의 작품들을 몰아서 읽는 중인데, 판타지와 라노벨 계열의 작품을 제외하곤 이제 거의 다 읽은 것 같습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작품이 꽤 많은데, 2024년 안에 한두 편쯤은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