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스토커 ㅣ 스토리콜렉터 69
로버트 브린자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에리카 포스터 경감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작인 ‘얼음에 갇힌 여자’에서 비극적인 사고로 인한 공백기를 마감하고 컴백했던 에리카는

경찰 내에서 위아래 할 것 없이 ‘굴러온 돌 vs 박힌 돌’의 트러블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권력층 가문이 연루된 사건을 다루느라 갖가지 압력과 좌충우돌하곤 했습니다.

꽤 어려운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지만 에리카의 반골기질과 돌직구 성정은 여전하고,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부 고위간부의 삐딱함도 여전한 상태에서

이번에는 사회적으로 꽤 성공한 남자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 사건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 역시 에리카는 초반부터 윗선들과 부딪힙니다.

기이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발견된 사체들과 현장에서 발견된 동성애 관련 단서들로 인해

윗선들은 ‘우발적인 게이 치정사건’으로 방향을 잡으려 하지만,

에리카는 누군가 희생자들을 오랫동안 관찰했고 치밀한 계획 끝에 저지른 범행이라 여깁니다.

문제는 연이어 사체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에리카의 수사가 좀처럼 진전되지 못한 점입니다.

결국 수사에서 배제되는 위기에 처하지만 에리카는 끝내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합니다.

 

전작인 ‘얼음에 갇힌 여자’의 서평 말미에 “만족감은 8, 아쉬움은 2.”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나이트 스토커’는 전작의 아쉬움이 대부분 해소된 작품입니다.

그녀의 캐릭터 중 가장 두드러진 점은 작전 도중 남편과 동료를 잃은 심각한 트라우마입니다.

하지만 전작에서는 이 트라우마가 팩트 나열식으로만 그려져서 다소 공감이 안 됐는데,

두 번째 작품이라 그런지, 혹은 좀더 섬세하게 그 트라우마가 그려진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에리카에 대해 어느 정도는 편하게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소 기계적으로 보였던 루이셤 경찰서 사람들과의 갈등 역시 좀더 자연스럽게 묘사돼서

그녀의 분노나 위기가 훨씬 더 사실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적, 중재자, 아군으로 확실하게 구분된 루이셤 경찰서 사람들과의 갈등 또는 협력은

사건에 못잖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유는 달라도 이번 역시 “만족감은 8, 아쉬움은 2.”라는 결론은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의 아쉬움은 에리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사건 자체에 기인한 것입니다.

우선, 큰 그림만 놓고 보면 사건 자체가 너무 단선적이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범행 수법도 특이하고, 희생자들의 신원도 호기심을 자극하도록 설정돼있지만

탐문이나 목격자 찾기 외에 에리카가 딱히 뭔가 수사할 만한 여지가 별로 없었고,

에리카의 ‘계획범죄’ 주장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너무 쉽고 우연히 발견됩니다.

그런 탓에 부족한 서사를 메우기 위해 혼선을 주는 사건을 설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메인 스토리와 잘 섞이지 못하고 따로국밥처럼 보이기만 했던 건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다 읽은 뒤에 ‘에리카의 수사’보다 경찰 윗선들과의 갈등이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아마도 이런 사건 자체의 단순함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범인의 캐릭터도 아쉬운 대목이었는데,

출판사 소개글대로 “공공연한 가정 폭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피폐한 삶과 상처,

쉽게 회복되기 힘든 트라우마, 그리고 그것이 양산하는 또 다른 폭력”이란 주제는 이해됐지만

그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범인을 너무 과대포장한 나머지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한 점,

또, 범인의 범행 수법이 너무 정교하고 완벽한 점은 수시로 위화감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프로 킬러도 아닌데 마치 훈련된 테러리스트처럼 능숙하게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에선

범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은 사라지고 “어떻게?”라는 의아함만 남기도 했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전작에 비해 거칠고 기계적인 부분들이 많이 매끄러워졌고,

부당한 처우에 대해 에리카가 직격탄을 날리며 경찰서를 떠나는 엔딩 덕분에

다음 작품 자체가 기대되는 것은 물론 그녀의 입지가 어떻게 그려질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흠뻑 빠져들 만큼 매력적인 시리즈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매번 “만족감은 8, 아쉬움은 2.” 정도의 재미는 보장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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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케이트
알렉스 레이크 지음, 장선하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케이트는 자신이 사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연쇄살인사건 때문에 패닉에 빠진다.

그건 살해된 20대 여성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꼭 닮았기 때문.

혹시 마지막 목표가 자신이 아닐까, 라는 공포를 느낀 케이트는

부모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건 물론 외모까지 확 바꿔보지만 별 소용이 없음을 깨닫는다.

한편, 케이트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던 필은 현실을 수긍하지 못하고 케이트에게 집착한다.

케이트는 필이 자신을 몰래 따라다닌 사실까지 알고 분노하지만,

경찰을 통해 그가 유력한 연쇄살인 용의자라는 말을 듣곤 큰 충격에 빠진다.

 

● ● ●

 

잔혹하게 살해된 여성들이 자신과 꼭 닮았다는 사실에 패닉에 빠진 케이트 주변에는

여러 남자들이 다양한 거리를 두고 배회합니다.

케이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뒤 거의 폐인처럼 살아가며 그녀 주변을 맴도는 전 남친 필,

여행지에서 만나 충동적인 하룻밤을 보낸 뒤 고향에서 우연처럼 재회한 멋진 연상남 마이크,

같은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며 수시로 추파를 보내는 네이트,

옆집에 살며 케이트가 곤란할 때마다 도움을 주곤 하는 칼 등이 그들인데,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캐릭터들이긴 하지만 실은 작가는 진범을 쉽게 노출시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누가 범인?’보다는 ‘왜?’에 더 방점을 찍은 작품이며,

2/3쯤엔 작가가 범인을 공개적으로 밝히기 때문에 ‘이른 진범 식별’은 큰 의미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두 번에 걸친 ‘막간 : 5년 전’이라는 챕터가 더 궁금증을 일으키는데,

그 안에는 케이트를 포함한 절친 4명이 5년 전에 겪은 비극이 서술돼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자매처럼 자란 4명 가운데 베스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머지 친구들은 그것이 베스가 만나던 남자 때문이란 걸 짐작만 할 뿐입니다.

이 ‘막간’이 메인 스토리와 어떻게 연결될지가 꽤 궁금해지는데,

작가는 케이트를 겁에 질리게 만든 연쇄살인범 스토리와 이 ‘막간’을 절묘하게 연결시켜

중반부의 반전으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엔딩까지 장식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꼭 닮은 연쇄살인 피해자’라는 설정만 보면 심리적 공포 묘사가 많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사건 위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이 점에 대해선 독자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가 있겠지만,

제 경우에는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다소 밋밋한 독후감을 느끼게 만든 요인이었습니다.

 

자신과 닮은 여자들이 살해되는데, 아무리 (남친과 결별한 상태에서) 절친이 권한다 해도

데이트 사이트에 사진을 비롯한 자기 정보를 올리며 새 남자를 찾는 케이트의 행동은

독자에게 심리적 공포를 이입시켜야 할 주인공 치곤 참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작가가 심리보다는 사건 위주의 오락물을 의도했음을 반증하는 설정입니다.

사소하지만, 큰 도시도 아닌 듯 한데 케이트를 닮은 여자가 그렇게 많다는 점도 부자연스럽고

절친들 외에는 누구도 딱히 케이트를 걱정하지 않는 점도 계속 덜컥거리는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범인이 공개된 2/3쯤부터는 사건 중심의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처럼 읽혔는데,

개인적으로는 긴장감은 배가되지만 오히려 현실감은 떨어졌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범인의 동기나 소시오패스로서의 캐릭터도 어딘가 억지스러웠는데,

잔혹한 악당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나쁜 성정’은 다 갖다 붙인 느낌이랄까요?

그의 집착이나 욕망이 좀더 자연스럽고 그럴 듯 했다면 케이트의 공포가 더 생생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분히 작위적인 캐릭터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서

위기가 최고조에 다른 클라이맥스에서 조차 좀처럼 긴장감을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앞서 말한대로) ‘재미있지만 긴장감은 별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주인공이나 범인의 부자연스러운 설정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서사 역시 500페이지에 육박할 만큼 크지 않아서 때로 지루하게 읽힌 대목도 있었고,

없어도 무방한 에피소드(케이트와 부모의 갈등)도 눈에 띄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필력만 놓고 보면 이 작가의 작품을 한 편쯤은 더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 작품보다 먼저 출간된 ‘애프터 안나’가 눈에 띄어서 일단 목록에 올려놓기로 했습니다.

 

사족으로...

출판사의 결정인지, 번역자의 개성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대화를 큰따옴표가 아니라 작은따옴표로 표기한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어떤 대화든 매번 상대에게 하는 대사인지, 마음의 소리인지 헷갈리곤 했는데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읽기를 꽤나 방해한 것은 물론 짜증까지 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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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내 것이었던
앨리스 피니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의 원제는 ‘Sometimes I Lie’, 즉 ‘나는 가끔 거짓말을 한다.’입니다.

다 읽고 나면 이렇게 제목을 지은 이유는 물론 제목에 담긴 의미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작품 내용과 주인공의 심리를 잘 반영했다는 생각입니다.

제목대로 “원래 내 것이었지만 누군가에게 빼앗겼던 것을 되찾는 이야기”에 가까운데,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단선적이고 상투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복잡한 형식과 내밀한 심리묘사, 그리고 서술트릭의 맛까지 더한 놀라운 반전을 통해

심리스릴러 이상의 풍성한 이야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세 명의 관점에서 전개됩니다.

교통사고로 몸은 코마상태에 빠져있지만 놀랍게도 의식만은 멀쩡한 ‘현재의 앰버’,

사고 발생 전 며칠 동안 끔찍한 사건들을 연이어 겪어야만 했던 ‘과거의 앰버’,

그리고 꽤 오래 전, 자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독한 일기를 남긴 ‘10살 소녀’가 그들입니다.

 

‘현재의 앰버’는 자신이 사고를 당한 기억조차 휘발된 채 코마상태에 빠져있지만

놀랍게도 병실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대화, 체취, 분위기 등을 모두 감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말 한마디, 몸짓 하나로라도 자신의 의식이 깨어있음을 전달하고 싶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앰버는 계속 무기력한 코마상태를 유지할 뿐입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누구인지 끊임없이 추정하는데,

앰버가 볼 때는 남편 폴과 여동생 클레어가 가장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낯선 남자의 방문을 받은 뒤로 앰버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라디오방송 스태프로 일하던 ‘과거의 앰버’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유명 라디오 진행자 매들린 때문에 실직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앰버는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란 기치 아래 매들린을 파멸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 와중에 오래 전 헤어진 남자친구 에드워드가 나타나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남편 폴과 여동생 클레어는 사사건건 앰버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이코패스로 성장할 게 분명한 10살 소녀의 일기장이 끼어듭니다.

부모에 대한 증오심과 유일한 친구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으로 똘똘 뭉친 이 소녀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거짓말은 물론 그 어떤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과연 이 소녀의 일기장이 앰버의 이야기와 어떻게 맞닿게 될지 내내 궁금했는데,

작가는 단 한 줄의 반전을 통해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칩니다.

 

이 작품은 줄거리 정리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이 본 이야기와 다소 동떨어진 팩트 나열에 그친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이는데,

결국 “원래 내 것이었지만 누군가에게 빼앗겼던 것을 되찾는 이야기”가

가장 함축적인 한 줄 카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의 핵심적인 의문만 정리해보면...

 

앰버를 코마상태에 빠뜨린 것은 누구인가?

앰버가 남편 폴과 여동생 클레어를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고 직전 앰버를 곤란에 빠뜨린 라디오진행자 매들린과 전 남친 에드워드는 왜 등장했는가?

앰버는 코마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난다면 ‘원래 내 것이었던’ 것들을 되찾기 위해 앰버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이 의문들과 함께 독자는 읽는 내내 곳곳에서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기에 계속 불편함을 지닌 채 책장을 넘기게 되는데,

결국엔 이 크고 작은 위화감들이 차곡차곡 쌓여 막판 반전의 밑거름이 됩니다.

그리고 작가의 설계도가 얼마나 촘촘하고 정교하게 그려졌는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고백하자면, 400여 페이지를 읽는 동안 딱 세 번 중도포기할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반전은 놀랍고 결말은 신선하지만, 거기까지의 지루함은 너무 길다.”라는 한 독자의 서평은

제가 중도포기하려 했을 때의 심리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데,

다소 지루하고 장황한 심리묘사, 세 갈래의 시점 덕분에 불분명해진 이야기의 정체성,

위화감만 가득할 뿐 방향성을 잃은 듯한 미스터리 등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은 독자라면 어쩌면 반전을 보고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뭘 읽은 거지?’라는 혼란과 함께

‘반전을 위한 반전’, ‘부자연스러운 억지 전개’라는 회의가 들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제 경우 반전 이후 엔딩까지의 깔끔한 정리 덕분에 불만은 어느 정도 사그라졌지만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이 작품의 큰 그림이 다소 혼란스럽게 여겨지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원래 내 것이었던’은 개인적으로는 두 번은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반전을 알고 읽으면 첫 책읽기에서 안 보였던 진짜 매력이 보일 것 같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심리묘사로 꽉 찬 400여 페이지를 다시 읽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두 번째 책읽기에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인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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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가 ㅣ 불야성 시리즈 2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일본에서 1997년에 출간된 ‘진혼가’는 한해 앞서 출간된 ‘불야성’의 후속작입니다.

(이 뒤에 나온 ‘장한가’까지 3부작으로 완결되는 시리즈입니다.)

신주쿠 가부키초를 장악한 중국계 마피아들의 냉정하고 잔혹한 폭력의 세계를 그린 시리즈로,

그야말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온통 피범벅인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육이 난무하는 마피아 액션만 그려진 것은 아닙니다.

반반(半半), 즉 대만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류젠이는

중국계 마피아와 일본 야쿠자가 지배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가부키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또 어떻게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당초 살인이나 조직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던 류젠이는

가부키초 내 중국계 마피아의 핵심권력자이자 양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양웨이민으로 인해

인생이 갈래갈래 찢긴 것은 물론 자신의 연인까지 파멸로 몰아가는 운명에 처합니다.

 

전작인 ‘불야성’에서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했던 류젠이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가부키초로 돌아간다. 언젠가, 양웨이민을 죽이기 위해.”였습니다.

그리고 ‘진혼가’ 프롤로그에서 류젠이가 선전포고처럼 터뜨린 첫 한마디는

“그렇게 몸 안에 냉기가 차곡차곡 쌓이기를 기다린다.

양웨이민을 죽이기 위해. (연인이었던) 샤오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입니다.

‘진혼가’가 어떤 이야기를 다룰지 확실히 알려주는 예고임에 분명한데,

작가는 의외로 류젠이와 양웨이민을 잠시 한발 뒤로 물러서있게 만들어 놓곤

‘진혼가’만을 위한 특별한 두 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양웨이민 휘하의 뛰어난 킬러 궈추성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퇴직형사 타키자와가 그들입니다.

 

궈추성은 양웨이민의 미션을 수행하던 도중 마피아 보스의 정부인 러지아리에게 빠져듭니다.

그녀는 궈추성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어린 시절 의붓누나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궈추성은 어떻게든 그녀를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게 됩니다.

부패형사 출신의 일본인 타키자와는 수하의 죽음의 진실을 캐내라는 마피아의 청부를 받지만

정작 그의 목표는 큰돈을 장만하여 어딘가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경찰에게도, 야쿠자에게도, 마피아에게도 쫓기는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부여받은 미션보다 자신만의 목표에 한눈을 팔던 두 사람은 결국 운명적으로 조우하지만

그들은 이내 자신들이 류젠이와 양웨이민, 그리고 마피아의 꼭두각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가부키초를 패닉 상태에 빠뜨리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사랑’과 ‘돈’이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벼랑 끝까지 치닫기 시작합니다.

 

전작인 ‘불야성’이 마피아간의 세력 다툼이라는 큰 그림을 정교하게 그렸다면

‘진혼가’는 보다 개인적인 차원 – 궈추성과 타키자와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물론 폭력성과 선정성은 두 작품 모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하지만

스케일 면에서는 ‘불야성’이, 감정적 이입 면에서는 ‘진혼가’가 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다만, 인물간의 관계라든가 사건의 디테일에 있어 ‘진혼가’는 다소 작위적인 면이 많은 편인데

일단 설정 자체가 너무 복잡해서 좀처럼 사건의 얼개가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았고,

인물들의 관계나 감정적 교류 역시 다소 혼란스럽거나 억지스러운 점이 자주 보였습니다.

 

사실, 이 모호함과 억지스러움은 ‘누가 주인공인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입니다.

‘형식적 주인공’인 궈추성과 타키자와가 이야기의 대부분을 이끌어가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실질적인 주인공’은 류젠이와 양웨이민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을 위해 ‘실질적인 주인공’의 비중을 조연에 가까울 정도로 낮춘 탓에

좀처럼 중심을 잡고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야성’ 역시 적잖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중심인물이 명확해서 집중도가 높았던 반면,

‘진혼가’는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가?’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불야성’이나 ‘진혼가’ 모두 워낙 폭력적인데다 성(性)과 관련된 노골적인 묘사도 많아서

비위가 약한 독자나 성적 도구로 묘사된 여성성에 반감을 가진 독자라면

꽤나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될 것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피아 액션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적잖은 분량임에도 금세 완독할 수 있고,

재미 면에서는 같은 장르의 여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불야성’을 먼저 읽은 뒤에 ‘진혼가’를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텐데,

국내 출간된지 6년밖에 안됐음에도 시리즈 전체가 대부분 품절 상태라

호기심이 이는 독자라면 중고서점을 통해서 구해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최근 발표된 ‘201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결과를 보니

하세 세이슈의 신작 ‘蒼き山嶺’ (직역하면 ‘푸른 산봉우리’)가 18위에 올라있네요.

2013년 ‘장한가’ 이후 국내 출간작이 없어서 이 작품 역시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의 신작 소식만으로도 무척 반갑네요.

‘201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정보가 궁금하신 분은

네이버 카페 ‘일본미스터리 즐기기’의 자명종 님께서 올리신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cafe.naver.com/mysteryjapan/3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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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ㅣ 탐정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런던의 사설탐정 버니와 동업 중이던 22살의 코델리아 그레이는

버니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탐정사무소 대표를 맡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 사설탐정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한 마디씩 거든다.

그러나 코델리아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고 드디어 첫 번째 의뢰가 들어온다.

한 유명한 과학자로부터 아들의 갑작스런 자살 원인과 배경을 밝혀 달라고 의뢰받은 것.

코델리아는 버니에게 물려받은 유무형의 자산을 장착하고 첫 의뢰자에게 달려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소개글에 따르면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추리작가”라는데,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작품으로 만난 것은 처음입니다.

검색해보니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몇 편 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대부분은 90년대에 출판됐다가 지금은 절판 상태입니다.

그녀의 대표 캐릭터는 런던 최고의 형사 아담 달글리시인데,

이 작품은 ‘달글리시 시리즈’가 아니라 스핀오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업자 버니가 달글리시의 부하였고, 또 막판에 달글리시가 카메오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시리즈 자체는 읽어보지 못했어도 그가 꽤 매력적인 캐릭터란 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모두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며 코델리아의 탐정으로서의 진로를 만류하지만

그녀는 모두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예리한 추리와 강철 같은 담력으로 첫 사건을 해결합니다.

과학자의 아들이 자살한 오두막에 머물며 그의 지인들을 탐문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등

‘탐정의 정석’대로 조사를 진행하던 코델리아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단서에서 아들의 비밀스런 과거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지인들의 사소한 언행에서 아들의 사망 직전의 정황을 포착해냅니다.

결정적 단서를 찾아낼 즈음에는 괴한의 습격을 받지만

22살의 초보 탐정이라고는 볼 수 없는 강한 멘탈을 기반으로 위기를 벗어났고,

드디어 추악하기 짝이 없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칩니다.

 

1972년 작품이라 부지불식간에 (아날로그&올드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게 사실이고,

작품 전반적으로 보면 이 선입견이 그리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재미와 속도감을 겸비한 멋진 고전이라는 생각입니다.

지독한 영국식 유머나 풍자 없이도, 또 슈퍼히어로 같은 주인공 없이도

P.D. 제임스는 페이지를 술술 넘어가게 하는 매력적인 필력을 자랑했고,

22살의 코델리아는 당황과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초짜처럼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동업자로부터 물려받은 탐정으로서의 재능과 돌직구 같은 과감성을 통해

장래 명탐정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선보입니다.

특히 일반적인 예상을 벗어난 엔딩은 자신만의 정의에 충실한 코델리아의 매력은 물론

탐정으로서의 그녀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도 꽤 큰 기대감을 갖게 만든 대목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소 단선적이고 상투적인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실망감보다는 재능 있는 신인작가의 작품을 만난 듯한 반가움이 앞섰습니다.

 

딱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풍경이나 사람에 대한 지나치게 세밀하고 장황한 묘사가 잦아서

책읽기의 흐름을 뚝뚝 끊게 만드는 경우가 적잖았다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스케일이나 무게감 면에서 제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별 1개를 뺀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책읽기였습니다.

후속작 소식이 궁금해서 소개글을 더 살펴보니 코델리아 시리즈는 두 편밖에 나오지 않았고,

그나마도 이 작품 이후 10년이 경과된 시점에서 출간됐다고 합니다.

코델리아의 탐정으로서의 성장기가 궁금했던 입장에서 무척 아쉬운 소식이지만

나머지 한 편이라도 한국에 꼭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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