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소녀 ㅣ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2
오카모토 기도 외 지음, 신주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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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일본 미스터리의 초창기 작품들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1889년에서 1930년대 후반 사이에 발표된 작품들이니

출판사 소개대로 일본에 서양 추리소설이 유입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내용이나 형식 모두 꽤 파격적인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 앞서 출간된 ‘세 가닥의 머리카락’이 시리즈 첫 작품이고,

이후 일본의 패전 직후까지의 추리소설을 담은 작품이 한 편 더 나올 거라고 하는데,

각 작품마다 나름의 테마를 갖고 편집됐다고 하니 기호에 따라 골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명의 작가가 발표한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직접 읽어보진 못했어도 들어본 적은 많은 ‘한시치 체포록’의 작가 오카모토 기도는

표제작인 ‘단발머리 소녀’를 비롯해 세 편의 작품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주인공 한시치와 아들 젠파치가 기기묘묘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인데,

얼마 전 읽은 교고쿠 나츠히코의 ‘후 항설백물어(上)’를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들은

미스터리와 괴담이 적절히 뒤섞여서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다섯 편의 작품이 실린 사토 하루오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지만

에도가와 란포가 칭송한 미스터리 작가라고 해서 꽤 놀랐습니다.

미스터리보다는 그로테스크+판타지 스타일이 대부분이었고 대체로 흥미로운 내용이긴 한데

아무래도 ‘딱 떨어지는 엔딩’이 아니라 모호하고 기괴한 결말들이 대부분이라

말 그대로 고전으로서의 맛은 느낄 수 있었지만 딱히 호감 가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한 편밖에 수록되지 않아서 그 스타일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고다 로한은

무성영화의 변사 말투 같은 독특한 문장이 시선을 끌었는데,

미스터리이긴 해도 고전적인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에 좀더 방점을 찍은 느낌이라

그야말로 전형적인 19세기 작가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접하기 힘든 초창기 일본 추리소설을 편집한 기획 자체는 무척 흥미로웠는데,

개인적으로는 좀더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을 선정했더라면, 하는 바람이 남았습니다.

특히 다섯 편이 수록된 사토 하루오의 경우 꽤 파격적인 서사를 다루는 작가인 건 맞지만

초창기 일본 추리소설을 음미하려던 독자에겐 호불호가 크게 갈릴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오카모토 기도의 작품들이 ‘신기한 골동품’처럼 재미있게 읽힌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이 시리즈의 첫 편인 ‘세 가닥의 머리카락’이 번역, 번안 추리소설 위주였고,

이후 출간될 작품이 ‘순문학 작가에 의한 예술적 경향의 탐정소설’ 위주라고 하는데,

희귀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이니 만큼 관심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이 특별한 기획이 좀더 확장돼서

그 시대의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들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요즘 표현에 맞게 가독성을 중시하며 재번역을 시도했다.”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전혀 올드한 티가 나지 않는 깔끔한 번역 덕분에 큰 불편이나 거북함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건

특별한 기획만큼이나 칭찬해주고 싶은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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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항설백물어 - 상 -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8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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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항설백물어’와 ‘속 항설백물어’가 아직도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신간인 ‘후 항설백물어’부터 읽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판타지 또는 호러풍의 에도 시대 미스터리를 좋아해서

미야베 미유키의 ‘미야베 월드 2막 시리즈’에 푹 빠지기도 했지만

교고쿠 나츠히코의 괴담은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꽤 기대를 하고 읽었습니다.

 

하룻밤 사이 물밑으로 가라앉은 섬 이야기(붉은 가오리),

얼굴 모양을 한 채 사방에서 출몰하는 괴이한 불덩이 이야기(하늘불),

영생과 지벌의 화신인 뱀에 대한 이야기(상처 입은 뱀) 등 세 편이 실려 있는데,

각각의 소재와 배경인 섬, 불, 뱀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괴담과 전설의 단골메뉴이긴 하지만

일본 특유의 문화적 유산과 정서 덕분에 그 기이함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야기 자체도 매력적이고 밑바탕에 깔린 오랜 전설이나 괴담 자체도 흥미롭지만

개성 강한 화자들, 은근슬쩍 끼어든 미스터리,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독특한 방식 덕분에

각각 중편 정도의 분량임에도 단편처럼 금세 마지막 장에 이르곤 했습니다.

 

이야기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구성됩니다.

괴담이나 전설에 대해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네 남자가 특정 소재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이웃에 사는 80살을 훨씬 넘긴 한 노인에게 자문을 구하러 갑니다.

그럼 그 노인은 자신의 경험과 견문과 지식을 통해 네 남자의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간 후 노인은 먼 친척뻘인 젊은 여자에게 ‘진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도쿄 경시청 일등순사지만 괴담과 고전을 좋아하는 겐노신이 논쟁거리 괴담을 들고 오면

전직 막부 가신 요지로, 검술도장을 운영하는 쇼베, 서양 문물을 경험한 쇼마가 가세하여

때론 갑론을박을, 때론 민망할 정도의 면박을 주고받으며 끝없는 논쟁을 벌이는데,

항상 이들의 결론은 “야겐보리 부근에 사는 신비한 노인 잇파쿠 옹에게 가자!”입니다.

잇파쿠 옹은 젊은 시절 괴담과 전설이 있는 곳이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곤 했는데,

그렇게 쌓인 견문과 경험이 워낙 방대해서 늘 네 남자의 자문역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괴담집이다 보니 어느 이야기에서든 ‘정답’이란 없습니다.

때론 상식이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결론이 나올 때도 있고,

“그건 그냥 전설 또는 항설입니다.”라고 오픈된 결말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사실 ‘정답 없는 모호함’이 기담의 매력이긴 하지만,

‘하늘불’과 ‘상처 입은 뱀’의 경우 현실 속 사건과 연결되기도 해서

미스터리로서의 맛을 듬뿍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옛날 어딘가에 이런 괴담이나 전설이 전해져온다.”라는 나열식 소개가 아니라

잇파쿠 옹이 오래 전 직간접적으로 겪은 실제 사건이 언급되기도 하고,

때론 도쿄 경시청 일등순사 겐노신이 현재 담당하고 있는 사건이 끼어들기도 해서

일본 괴담과 전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집입니다.

다만, 아무래도 비현실적인 상황을 소재로 한 탓에

간혹 맥락이나 문장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긴 한데,

제 경우 세세하게 다 이해하려고 들지 않고 과감하게 넘어가곤 했지만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두 편의 전작 역시 네 명의 남자와 잇파쿠 옹이 등장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비슷한 형식과 인물들이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안 그래도 올해 ‘미야베 월드 2막 완독’을 소소한 목표로 잡아놓은 상태인데,

거기에 곁들여 책장 속에 갇혀 있는 ‘항설백물어 시리즈’도 구출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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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마더
폴라 데일리 지음, 최필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의 원제는 ‘Just What Kind of Mother are You?’입니다.

번역 제목 역시 ‘Mother’를 강조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는 ‘한 사람의 여성이자 가족의 일원인 어머니’입니다.

 

주인공 리사는 3남매의 어머니이자 유기동물보호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남편인 조가 택시기사로 일하지만 리사의 가족은 여유롭지 못한 형편입니다.

더구나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스스로 늘 부족함과 아쉬움을 느낍니다.

특히 절친인 케이트가 여러 채의 별장을 운영하며 풍요로운 일상을 누리는 것은 물론

아이들의 교육이나 일상에 관해 ‘완벽한 엄마’로서 맹활약하는 것을 지켜보며

리사는 수시로 부러움과 열등감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에 휩싸이곤 합니다.

작품 속 사건을 수사하는 조앤은 30대 후반의 독신으로

딱히 연애나 결혼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혼주의자도 아닌 인물로,

과도하게 큰 유방과 제어할 수 없는 음주벽에 대한 자책감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지금은 몹쓸 남편과 헤어진 이모 재키와 함께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리사의 절친이자 ‘완벽한 엄마’ 케이트의 딸 루신다가 실종됩니다.

안 그래도 소아성애자의 짓으로 보이는 미성년자 납치-강간 사건이 벌어진 직후라

리사가 사는 소도시는 발칵 뒤집혔고, 루신다의 엄마 케이트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문제는, 리사가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루신다가 실종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점인데,

그 때문에 케이트의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리사를 비난하기에 이릅니다.

더구나 루신다의 행적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납치 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은 극도로 당황하고 리사와 케이트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13세 전후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납치-실종 사건을 다루고 있고,

범인의 독백으로 보이는 챕터들이 간간이 섞여 있기도 해서

외양만 보면 꽤 음울하고 잔혹한 이야기가 지배하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읽다 보면 범죄소설인지, 여성소설인지, 가족소설인지, 치정소설인지 헷갈릴 정도로

리사-케이트-조앤 등 세 여성의 일상과 소소한 비밀들에 적잖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리사는 루신다의 실종이 자기 책임이란 죄책감에 나름 단서를 찾아보려 애쓰지만

작품 속에서 그런 ‘탐정’으로서의 역할은 극히 미미하고,

오히려 여유롭지 못한 살림, 엄마로서 부족하다는 자책감,

그리고 내면에서 들끓는 케이트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감이 더 부각되는 인물입니다.

상대적으로 딸을 잃은 케이트는 분량 면에서도 그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있고,

대부분 실종자의 엄마 또는 리사의 부러움과 열등감의 대상으로만 그려질 뿐입니다.

형사 조앤 역시 탐문 이상의 역할은 눈에 띄지 않고 실적에 집착하는 캐릭터도 아닙니다.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술통 같은 몸매를 유발하는 거대 유방의 축소수술’이고,

자신에게 얹혀사는 와인중독자 이모 재키와의 무채색 같은 일상이 더 비중 있게 그려집니다.

 

물론 범인과 형사가 화자를 맡은 챕터들은 긴장감을 끊임없이 유발하고 있고,

막판 반전을 통해 드러난 놀라운 진실 덕분에 범죄소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여성소설 또는 가족소설이란 인상이 꽤 강한 편이라서

‘연쇄 납치사건을 다룬 스릴러’를 기대한 독자에겐 제법 심심하게 읽힐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가족-어머니-여성’는 따뜻하고 안정적이어야 한다고 은연중에 믿고 바라지만,

실상 그런 믿음과 바람은 현실에서는 오히려 정 반대의 결과를 낳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딸의 실종’이라는 가장 잔인하고 참혹한 사건과 맞닥뜨린

‘완벽한 엄마’와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은 엄마’와 ‘엄마가 아닌 여자’의 민낯은

원제대로 ‘Just What Kind of Mother are You?’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주인공 리사에게 꽤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고,

막판 반전 역시 100%까진 아니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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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키
D. M. 풀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1978년 겨울, 부유층의 귀중품이 보관된 ‘대여금고’를 운영하던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가

갑작스럽고도 석연찮은 이유로 파산하면서 1,300여 개의 대여금고는 먼지와 함께 잠든다.

어린 나이에 비서로 입사했던 베아트리스는 파산 직전 대여금고의 비밀을 알게 되지만

그 때문에 목숨이 경각에 매달리는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고 만다.

20년 후, 매각이 결정된 은행건물의 정밀조사를 위해 건축공학기술자 아이리스가 투입된다.

건물 곳곳을 꼼꼼히 조사하던 그녀는 한 비서의 서랍에서 오래된 대여금고 열쇠를 발견한다.

이어 은행 곳곳에서 찾아낸 각종 서류와 메모들과 정체불명의 열쇠들을 통해

20년 전 은행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비밀에 점차 다가간다.

하지만 20년 전의 베아트리스처럼 아이리스 역시 비밀을 알아낸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 ● ●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꽤 두툼한 분량의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두 명의 화자에 의해 번갈아 진행되는데,

한 명은 1978년 은행 비서로 입사한 16살의 소녀 베아트리스이고,

또 한 명은 1998년 매각될 은행 건물의 조사를 위해 투입된 건축기술공학자 아이리스입니다.

20년의 시차가 있지만, 이들은 은행을 둘러싼 거대한 부정부패와 비리는 물론

은폐된 살인사건의 비밀까지 쥐고 있는 ‘대여금고의 데드키’에 대해 알게 되면서

스스로를 치명적인 위협에 빠뜨리는 닮은꼴의 운명에 처하고 맙니다.

 

“왜 그것들을 ‘데드키’라고 부르죠?”

“금고가 여러 해 동안 이용되지 않으면, 우린 그걸 ‘죽었다’고 해요.

우린 데드키를 이용해 죽어버린 금고를 열고 자물쇠를 바꾸곤 했어요.”

“대여금고가 자주 죽나요?”

“깜짝 놀랄 정도로 자주요.”

 

말하자면, 20년 전, 누군가 ‘죽은 대여금고’를 이용하여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그에 연루된 여러 인물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거나, 스스로 잠적하는 등 큰 상처를 입었지만,

일부는 20년 동안 ‘대여금고의 비밀이 해제될 그날’을 기다리며 절치부심한 끝에

자신들의 탐욕을 완성하려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베아트리스와 아이리스가 그들의 탐욕에 가장 큰 방해꾼인 건 당연한 일입니다.

 

설정 자체는 무척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20년의 간극을 두고 부유층의 대여금고에 얽힌 은행의 비밀을 캐는 두 여성의 이야기는

창구에선 손으로 전표를 기입하고 상사는 당연한 듯 비서를 희롱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은행과

모든 것이 컴퓨터로 제어되는 디지털 시대의 은행을 동시에 지켜보는 듯한 낯선 느낌과 함께

다가가지 말아야 할 비밀에 대한 호기심, 부정하고 부당한 자들을 향한 정의감,

그리고 그 대가로 치러야 했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어서

두 사람을 한 시대, 한 공간에서 콤비로 활약하는 자매나 동지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 도리스(베아트리스의 이모), 맥스(베아트리스의 동료), 맥도웰 형사(맥스의 오빠),

카마이클(맥스의 단골 바텐더), 레이먼(은행 경비원) 등 적잖은 조연들이 등장하는데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대여금고 사건과 크고 작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이라

읽는 내내 주인공 못잖은 흡입력과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1978년과 1998년 두 무대에 모두 등장하기도 해서 더욱 관심을 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아쉬운 점은 ‘악당들의 정체와 범행 전반에 관한 모호한 묘사’입니다.

베아트리스와 아이리스가 대여금고에 얽힌 은행의 비밀을 캐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반면,

정작 ‘죽은 대여금고’를 통해 부정을 저지른 악당들은 그 실체도, 목적도, 방법도 모호합니다.

그들은 협력자이면서 동시에 내분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누가 주범이고 누가 종범인지, 누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누가 누구와 연대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탐욕을 채우겠다는 건지,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주인공이 열심히 비밀을 캐는 와중에도 도대체 누가 타격을 입게 되는 건지,

누가 두 주인공의 비밀 캐기를 전력을 다해 막는 것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물론 1978년 베아트리스를 궁지에 몰아넣은 자와 1998년 아이리스를 위협하는 자가 누군지,

또 20년이나 묵혔뒀던 대여금고를 왜 이제 와서 탐내는 건지 대부분 후반에 설명되긴 하지만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은행-투자자-행정관청 간의 복잡한 관계 위주로 설명된 탓에

결국 앞서 제기한 여러 모호함들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말끔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베아트리스와 아이리스는 목숨을 걸고 대여금고의 비밀을 밝히려 애쓰는데 비해,

그녀들을 위협하는 악당들은 끝내 애매하고 불분명한 상태에서 퇴장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디테일한 묘사와 촘촘한 이야기 설계, 20년을 넘나드는 매력적인 구성 등 미덕이 많았음에도

좀 박해 보이는 평점을 준 이유는 결국엔 ‘부실한 악당들’ 탓입니다.

 

데뷔작임에도 꽤 호평을 받았고, 유력한 상도 수상했다는데,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돋보인 만큼 혹시 신작이 나온다면 한 편쯤은 더 읽어볼 예정입니다.

이왕이면 구조공학자였던 작가의 전공이 다시 한 번 발산될 수 있다면 좋겠고,

특히 오래된 건물의 비밀을 소재로 삼는다면 기대감을 좀더 키워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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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
하세가와 유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친구 대신 아르바이트로 미스터리 투어에 참가하게 된 ‘나’.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산중의 저택에 십여 명의 참가자가 모인다.

그리고 연이어 발생하는 잔혹한 살인사건. ‘나’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데...

폐유원지의 소녀유령 괴담을 좋아하는 괄괄한 성격의 레이와 半동거 중인 또 한 사람의 ‘나’.

최근 ‘나’의 주변에선 장례식이 줄을 잇는다. 사촌형제에 이어 이번엔 할머니의 장례식...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나’의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연결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인물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중편 한 편과 두 개의 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위에 소개한 줄거리는 표제작이자 중편인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를 정리한 것인데

그 외에 수록된 단편들(‘A씨’, ‘봄의 유서’)은 각각 호러와 감동을 그린 판타지 스토리입니다.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는 무척 독특한 작품입니다.

사건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형식의 힘이 색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가문을 몰살시키려는 살인자와 그 살인극에 우연히 말려든 한 남자가

한 챕터씩 번갈아 독백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살해될 뻔한 남자가 미스터리의 긴장감을 표현하는 내레이터 역할을 맡았다면,

살인자는 살인극의 전말과 자신의 내면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꽤 잔혹하고 폭력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따뜻함과 친밀함이 깃든 나지막한 대화처럼 느껴지는 살인자의 경어체 독백 때문에

꽤 혼란스러운 책읽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더구나 半동거 중인 여자에게 속수무책으로 갑질(?)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소심남의 극치 캐릭터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과연 이 남자의 ‘무엇’이 엄청난 살육을 저지르게 만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끔찍했던 과거와 마지막 살인을 앞둔 고뇌를 설명한 대목에서는

당연히 비장함이나 참혹함이 강조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앞서 사용된 경어체의 독백과 세상 둘도 없는 공처가처럼 그려진 캐릭터 덕분에

거꾸로 전혀 예상치 못한 애틋함과 안쓰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담담해서 더 오싹하게 아름다운...”이란 표현이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인데,

아마도 똑같은 소재와 인물을 일반적인 미스터리 형식과 문장으로 그렸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특별한 감정이라는 생각입니다.

 

문득 살인자의 관점에서 쓰인 가장 잔혹한 미스터리를 떠올려보곤

만일 그 작품이 따뜻한 경어체로 서술됐다면, 또 살인자가 마음씨 여린 공처가였다면,

과연 그 작품이 어떤 식으로 읽혔을까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생각 자체만으로도 소름이 돋았지만, 왠지 특별한 기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인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가 ‘살육에 이르는 병’을 각색한다면

원작 때 느꼈던 충격 이상의 이상야릇한(?) 독후감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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