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
하세가와 유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친구 대신 아르바이트로 미스터리 투어에 참가하게 된 ‘나’.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산중의 저택에 십여 명의 참가자가 모인다.
그리고 연이어 발생하는 잔혹한 살인사건. ‘나’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데...
폐유원지의 소녀유령 괴담을 좋아하는 괄괄한 성격의 레이와 半동거 중인 또 한 사람의 ‘나’.
최근 ‘나’의 주변에선 장례식이 줄을 잇는다. 사촌형제에 이어 이번엔 할머니의 장례식...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나’의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연결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인물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중편 한 편과 두 개의 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위에 소개한 줄거리는 표제작이자 중편인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를 정리한 것인데
그 외에 수록된 단편들(‘A씨’, ‘봄의 유서’)은 각각 호러와 감동을 그린 판타지 스토리입니다.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는 무척 독특한 작품입니다.
사건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형식의 힘이 색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가문을 몰살시키려는 살인자와 그 살인극에 우연히 말려든 한 남자가
한 챕터씩 번갈아 독백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살해될 뻔한 남자가 미스터리의 긴장감을 표현하는 내레이터 역할을 맡았다면,
살인자는 살인극의 전말과 자신의 내면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꽤 잔혹하고 폭력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따뜻함과 친밀함이 깃든 나지막한 대화처럼 느껴지는 살인자의 경어체 독백 때문에
꽤 혼란스러운 책읽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더구나 半동거 중인 여자에게 속수무책으로 갑질(?)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소심남의 극치 캐릭터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과연 이 남자의 ‘무엇’이 엄청난 살육을 저지르게 만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끔찍했던 과거와 마지막 살인을 앞둔 고뇌를 설명한 대목에서는
당연히 비장함이나 참혹함이 강조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앞서 사용된 경어체의 독백과 세상 둘도 없는 공처가처럼 그려진 캐릭터 덕분에
거꾸로 전혀 예상치 못한 애틋함과 안쓰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담담해서 더 오싹하게 아름다운...”이란 표현이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인데,
아마도 똑같은 소재와 인물을 일반적인 미스터리 형식과 문장으로 그렸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특별한 감정이라는 생각입니다.
문득 살인자의 관점에서 쓰인 가장 잔혹한 미스터리를 떠올려보곤
만일 그 작품이 따뜻한 경어체로 서술됐다면, 또 살인자가 마음씨 여린 공처가였다면,
과연 그 작품이 어떤 식으로 읽혔을까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생각 자체만으로도 소름이 돋았지만, 왠지 특별한 기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인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가 ‘살육에 이르는 병’을 각색한다면
원작 때 느꼈던 충격 이상의 이상야릇한(?) 독후감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