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 없는 검사 ㅣ 표정 없는 검사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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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지만 단기간에 너무 많은 작품을 읽은 탓에 조금은 피로감이 느껴진 나머지 한동안은 멀리 해야겠다고 여긴 게 나카야마 시치리였습니다. 5월 초쯤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4편 ‘악덕의 윤무곡’을 읽은 뒤의 결심이었는데, 그 결심은 채 두 달도 안 돼 ‘비웃는 숙녀 시리즈’ 덕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표정 없는 검사’는 애초 그에 대한 피로감 같은 게 왜 들었던 건지 의심될 정도로 나카야마 시치리에게 중독될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인 ‘能面檢事’의 ‘能面’(노멘)은 일본 전통극 ‘能’(노)에 쓰이는 가면을 뜻하지만 동시에 ‘표정 없는 얼굴’을 가리키는 비유어이기도 합니다. 일본 여행 때 박물관이나 지역 문화관에서 본 ‘能面’은 차가울 정도로 무표정해 보였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인 검사 후와 슌타로는 바로 이런 얼굴로 24시간을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오사카 지검의 에이스이자 30대 후반의 1급 검사인 후와 슌타로는 그 상대가 피의자든 피해자든 동료 검사나 경찰이든 심지어 까마득한 상관이든 관계없이 늘 얼음장 같은 표정 없는 얼굴과 그에 딱 어울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합니다.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로는 결코 검사의 직무를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게 이유인데, 문제는 얼굴뿐 아니라 태도 자체도 피도 눈물도 없는 싸늘한 기계에 가까운 탓에 에이스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경찰 곳곳에 무수한 적들을 만들어놓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타고난 반골 기질이란 뜻은 아닙니다. 애초 그의 표정 없는 얼굴은 누군가를 향한 저항의 의지가 담긴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독립된 사법기관인 검사로서의 그의 업무수행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후와 슌타로에게 얼굴 자체가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신참 여성사무관이 배속됩니다. 장래 검사를 꿈꾸는 소료 미하루는 후와와는 180도 다른 인물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좀전에 뭘 했는지, 어떤 상대를 만났는지 등 그야말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주 인간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탓에 후와에게 첫날부터 그만두라는 소리까지 들은 미하루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지만 실제로 후와와 함께 행동하면서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큰 충격에 빠지곤 합니다. 표정 하나 없이 조금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화법을 태연히 구사하는가 하면, 웃지도 화내지도 동요하지도 않는 일관된 리액션엔 그저 기가 찰 따름입니다.

 

“완전무결체 사법기계가 오사카 경찰청을 폭격하다!”라는 홍보카피대로 시리즈 첫 편의 데뷔 무대에서 후와의 주 공격대상은 오사카 경찰청입니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살인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가 잘못된 것을 포착한 후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사카 경찰청이 오랫동안 은폐해온 치명적인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경찰은 물론 검찰 내부에서까지 지탄과 비난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후와는 그에 아랑곳 않고 거침없는 행보와 함께 살인사건의 진실 찾기에 몰두합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미하루의 심장은 하루하루 위태롭게 쪼그라들 뿐이지만, 때론 반발하고 때론 공감하며 조금씩 후와의 진심과 검사가 가야할 길을 배우기도 합니다. 물론 “사무관은 뇌(검사)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팔다리나 그림자일 뿐”이라는 후와의 차갑고 가차 없는 독설엔 여전히 격분하면서도 말입니다.

 

‘표정 없는 기계 같은 검사’라는 캐릭터 못잖게 ‘현장을 뛰는 검사’라는 점도 무척 매력적인데 후와의 행보는 사실 검사라기보다는 경찰이나 형사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경찰의 수사자료를 검토하여 기소 여부를 결정하거나 법정에서 변호사와 다투는 것보다는 사건 현장을 일일이 탐문하며 직접 정보를 얻고 추리를 하는 일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현장 스타일’은 장르물 속 검사에게선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캐릭터라 앞으로도 그의 위험천만한 활약을 기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검찰과 경찰을 둘러싼 시끄러운 말들이 많이 나오는 와중이라 이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조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검찰과 경찰의 태도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꽤 클 것 같습니다. 동시에, 후와 슌타로라는 검사가 분명 픽션 속 판타지 캐릭터이긴 하지만 현실 속에 저런 검사가 한 명쯤 있다면 참 좋겠다는, 허황된(?) 바람을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후속작인 ‘표정 없는 검사의 분투’가 연재를 마쳤다고 합니다. 빠르면 2021년엔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벌써부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기다려집니다. 또,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생각만 해도 기대감에 들뜨게 만드는 뉴스가 있는데, 그건 바로 ‘표정 없는 검사’ 후와 슌타로와 ‘악덕 변호사’ 미코시바 레이지가 언젠가 한 번 제대로 맞붙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입니다. 서평엔 언급 안 했지만 후와 슌타로에겐 표정을 없애야만 했던 비극적인 과거가 있습니다. 어릴 적 참혹한 토막 살인을 저질렀던 ‘악덕 변호사’ 미코시바 레이지와 마찬가지로 후와에게도 ‘속죄’라는 큰 화두가 인생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속죄’라는 접점을 가진 두 괴물이 만난다면 그야말로 불꽃 정도가 폭발이 일어날 것 같은데 나카야마 시치리가 과연 어떤 사건으로 그들을 만나게 할지, 또 그들의 진검승부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엄청 기대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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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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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강사인 세라는 상사이자 명성이 대단한 교수 러브록에게 매일 성희롱을 당하고 있다. 러브록은 전임강사 자리를 얻고 싶다면 자신과 자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세라는 평생의 커리어가 달린 자리를 포기할 수도, 러브록을 더 이상 참아낼 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세라는 우연히 한 아이를 구하게 되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보상으로) 누구든 사람 한 명을 없애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위험천만한 악마와의 거래. 세라는 그 손을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요약하면, 성희롱에 시달리던 세라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사적 복수를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판타지처럼 나타난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한 남자의 제안으로 인해 세라는 갈등에 빠집니다. 전화 한 통이면 자신의 삶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쓰레기 같은 러브록을 제거할 수 있지만,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탓입니다. 갈등 끝에 그녀는 ‘29초의 통화’를 통해 일을 저지르고 말지만 사태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으면서 더 큰 혼란을 일으킵니다.

 

작가의 전작인 ‘리얼 라이즈’를 읽고 “다양한 코드가 뒤섞인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라며 나름 우호적인 서평을 쓴 기억도 있어서 신작 소식이 무척 반가웠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너무 실망스러운 작품이라 중도에 포기할 생각이 든 게 사실입니다. 뼈대만 추려서 보면 나름 흥미로운 설정과 소재이긴 하지만, 정작 스토리는 지극히 단선적인 장면들의 무한반복에 가까울 정도로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여자와 동거 중인 남편이나 세라를 정신없게 만드는 어린 남매에 대한 반복적 묘사는 이야기의 핵심과 무관한데도 불구하고 단지 세라의 혼란을 강조하기 위해 수시로 등장했고, 러브록 교수의 집요한 성희롱 장면은 세라의 ‘분노의 게이지’를 끌어올리려는 의도와 달리 살짝 수위만 높아질 뿐 유사한 장면들이 장황하게 반복된 탓에 가해자에 대한 분노보다는 무력한 피해자에 대한 짜증이 더 강해지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좀 과장하면, 무미건조할 정도로 요점만 짚고 최대한의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작가라면 이 작품의 첫 200페이지를 (최대한 양보해도) 그 절반도 안 돼 마무리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결국 속독하듯 눈에 확 들어오는 중요한 지문과 대사에만 집중하기로 했는데, 절반이 채 되기 직전 그마저도 피곤해져서 접으려고 생각할 즈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한 문장이 눈에 띄는 바람에 마지막까지 달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는 통쾌한 리벤지 스릴러”라는 카피에 비해 세라가 거둔 ‘승리’의 과정과 결과는 다소 어이없거나 허무할 정도로 쉬워 보였습니다. 기승전결 어느 부분도 현실감이 없었지만 억지스런 반전과 허망한 엔딩이 가장 아쉬웠는데, 따지고 보면 성희롱과 육아와 부부 문제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세라의 하소연 외에 정작 스릴러 코드가 제대로 발동된 대목은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전작에 비해 너무 큰 실망감을 느낀 탓에 작가의 다음 작품을 읽게 될지 지금으로선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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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감옥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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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금색기계’, ‘야시’, ‘멸망의 정원’에 이어 네 번째로 만난 쓰네카와 고타로입니다.

각각 에도시대, 현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기이하고 오묘한 판타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온 몸이 금색으로 뒤덮인 신비한 존재(‘금색기계’),

내밀한 연결통로로 드나들 수 있는, 요괴와 죽은 자들이 활개 치는 이계(‘야시’),

지구를 감싼 해파리 모양의 공포의 ‘미지의 존재’ 속에 자리한 평온한 마을(‘멸망의 정원’) 등

쓰네카와 고타로가 창조한 시공간과 캐릭터는

단순한 판타지 이상의 특별하고 고혹적인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을의 감옥’은 쓰네카와 고타로의 이런 마력을 담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무한 반복되는 11월 7일이란 날짜에 갇혀버린 여대생 아이짱(‘11월 7일’),

오래전부터 신역(神域)으로 불리며 스스로 일본 전역을 옮겨다니는 기괴한 초가집(‘신의 집’),

환술(마법) 능력을 타고난 소녀가 스스로 그 능력에서 도망치는 이야기(‘환술을 쓰는 소녀’) 등

역시 쓰네카와 고타로다운 독특하고 신비한 판타지가 펼쳐집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수록된 세 편의 일관된 주제는 ‘감옥’, 즉 ‘갇힘’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세 주인공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각각 시간, 공간, 환상에 갇히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무한 반복되는 11월 7일에 갇힌 ‘나’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난 뒤 어떻게든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듯 기괴한 초가집에 갇힌 ‘나’는

다른 희생양을 끌어들여서라도 초가집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돌아가려 애씁니다.

한때 자신이 지닌 엄청난 환술 능력에 집착했던 소녀는 스스로 그 능력을 버리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이하며 감금당한 채 억지로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세 편에 대한 느낌은 조금씩 달랐는데,

‘11월 7일’은 타임루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사건을 맛볼 수 있었지만

깜짝 스토리나 반전보다는 존재론적 메시지가 강조돼서 조금은 심심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마지막 수록작 ‘환술을 쓰는 소녀’는 읽는 내내 환상 속에 빠진 듯 묘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단편보다는 중편 정도로 확장됐다면 좀더 ‘친절한’ 이야기가 됐을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너무 많은 생략과 비약 때문에 줄거리, 캐릭터, 메시지를 이해하기가 난감했다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 ‘신의 집’은 쓰네카와 고타로 특유의 호러판타지 서사가 반짝반짝 빛난 작품인데,

3일마다 스스로 일본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신비한 초가집 설정도 매력적이고,

그 안에 갇힌 뒤 분노-체념-순응으로 이어지는 ‘나’의 변화 과정이라든가

초가집과 연관된 실종과 살인 등 강력사건의 발생이란 설정도 흥미롭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실과 연결돼있는 이계를 다룬 (제가 너무 좋아하는) ‘야시’와도 일맥상통하는 설정이라

개인적으로 다른 수록작들에 비해 좀더 끌렸습니다.

 

솔직하게 총평을 하면, 기대했던 것만큼의 만족을 느끼지 못한 게 사실인데,

아무래도 판타지의 농도나 깊이가 ‘금색기계’나 ‘야시’에 비해 얕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 세 편 모두 공통적으로 단편보다는 좀더 긴 분량의 중편에 어울리는 소재들인데

실제로는 ‘요약된 이야기’처럼 생략과 비약이 많았다는 점도 아쉬움을 느끼게 한 대목입니다.

어쩌면 분량 자체가 판타지의 농도와 깊이를 얕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색기계’나 ‘야시’를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작품을 읽고 쓰네카와 고타로에 대해 살짝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을 텐데,

부디 두 작품을 통해 쓰네카와 고타로의 진면목을 만끽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이 좋은 성과를 얻어서 절판된 ‘초제’와 ‘천둥의 계절’도 재출간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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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7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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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설정 가운데 출판사 소개글에는 없는 한 가지가 포함돼있는 서평입니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그 설정 없이는 서평이 불가능해서 포함시킨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이 작품은 공식적으로는 ‘해리 보슈 시리즈’ 7편이지만,

실은 ‘테리 매케일렙 시리즈’ 2편이라고 해도 될 만큼 투톱 주인공이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6년 전 보슈가 담당한 매춘부 살인사건의 용의자였지만 유유히 법망을 빠져나간 한 남자가

기이하고 끔찍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 사건을 맡은 LA보안관서의 제이 윈스턴은 수사가 벽에 부딪히자

전직 FBI요원이지만 지금은 새로 꾸민 가족과 섬에서 지내고 있는 매케일렙을 찾아갑니다.

‘블러드 워크’ 이후 3년 동안 평범한 시민이 되어 낚싯배를 운영해온 매케일렙은

오랜만에 접한 살인사건에 흥분하면서 그동안 억눌러온 본능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블러드 워크’의 비극이 맺어준 아내 그래시엘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케일렙은 적극적으로 수사에 뛰어들지만 이내 큰 충격에 휩싸이고 맙니다.

자신이 쫓은 단서대로라면 이 사건의 범인은 다름 아닌 해리 보슈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보슈는 여배우 교살 혐의로 체포된 영화감독의 재판에 검사팀 일원으로 참여중입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데다 피고인인 영화감독의 또 다른 살인혐의까지 밝혀내려는 상황이라

보슈는 재판에만 몰두해도 모자란 형국이지만,

매케일렙과의 만남으로 인해 자신이 심각할 만큼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깨닫습니다.

 

일일이 따져보진 않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매케일렙의 수사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고,

보슈는 오히려 ‘Also featuring’에 가까운 역할로 등장합니다.

물론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보슈와 매케일렙의 사건은 접점을 갖게 되고

두 사람의 수사는 짜릿한 반전과 함께 일심동체 같은 활약상을 펼치긴 하지만,

아무래도 법정에 매어있는 보슈가 동분서주하며 활약하기에 어려운 상황인 건 분명합니다.

 

사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이 작품은 사건만 놓고 보면 전작들에 비해 꽤 단순한 편입니다.

보슈를 범인으로 여겼던 매케일렙이 다시 제대로 된 수사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슈 역시 매케일렙을 도와 자신의 혐의를 푸는 것은 물론

진범과 진실 찾기에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제목이 암시하는대로 ‘어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보슈에 대한 프로파일링 서류에 매케일렙은 “밤보다 짙은 어둠 = 보슈”라고 적습니다.

함께 비극적인 살인사건을 수사했던 적이 있는데다

보슈의 ‘겉으로 드러난 스타일’과 ‘안으로 감춘 내면’을 파악한 매케일렙은

보슈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어쩌면 그의 ‘어둠’이 법망을 빠져나간 용의자를 직접 응징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그리고 그 ‘어둠’의 근원 중 하나는 매춘부였던 어머니가 살해당한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그러니 그의 ‘어둠’이 더 짙고 깊어지기 전에 자신이 그를 체포해야 되는 것 아닐까, 라는,

한편으론 확신하면서도 한편으론 믿고 싶지 않은 복잡한 심경으로 말입니다.

 

덕분에 이 작품엔 유독 ‘어둠’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마치 모든 악이 집결해있는 듯한 LA의 ‘어둠’과 함께

보슈의 이름의 기원인 15세기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 속 ‘어둠’도 자주 언급되고,

보슈의 ‘어둠’을 뒤쫓는 매케일렙 본인 마음속의 ‘어둠’도 수시로 눈에 띕니다.

그래서인지, 속도감과 긴장감으로 충만한 스릴러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와 내면 묘사에 충실한 느리고 어두운 스릴러에 더 가깝게 보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어둠도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는 매케일렙의 고뇌는

니체의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와 같은 맥락인데

이 두 문장은 이번 작품 속 보슈와 매케일렙의 내면을 잘 함축하고 있는 셈입니다.

 

매케일렙이 보슈를 용의자로 꼽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하는데,

그건 바로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작품에 관한 묘사들입니다.

이미 그의 그림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문외한인 탓에 그저 잔혹, 엽기, 흉포함이라는 속된 느낌밖엔 못 받았지만,

지상 세계의 방탕함과 폭력을 끔찍한 디테일로 표현한 그의 그림에 대해

한번쯤은 책으로든 강의로든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가 몇몇 장면에 등장하는 점인데,

그는 보슈가 참여한 여배우 교살사건 재판을 취재하면서

보슈는 물론 과거 ‘시인’에서 잠깐 만난(것으로 설정된) 매케일렙과도 재회하게 됩니다.

아쉬운 건, 매커보이의 캐릭터가 특종에 목을 맨 삼류 잡지 기자처럼 설정된 탓에

읽는 내내 ‘깐족대고 얄미운, 그래서 한 대 패주고 싶은 나쁜 기자’처럼 보인 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만 보면 전작들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어오다 보니

보슈의 내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좌충우돌하던 보슈의 고뇌가 ‘라스트 코요테’로 일단락된 뒤

이어진 ‘트렁크 뮤직’과 ‘앤젤스 플라이트’가 사건에 집중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이었기에,

그 다음 작품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던 것 같은데,

모든 건 제 멋대로 추정일 뿐이지만 그런 면에서 제겐 흥미롭게 읽힌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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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 ㅣ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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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정보도 없이 띠지나 뒷표지도 안 보고 본문부터 읽어가던 중에

1/3쯤 된 지점에서 갑자기 “어!”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형사인 이 작품의 주인공 나츠메 노부히토가

작년에 출간된 단편집 ‘형사의 눈빛’의 주인공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 작품이 ‘나츠메 노부히토 시리즈’라는 설명은 없었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음에도 왜 그에 관한 카피가 한 줄도 없을까, 무척 궁금했고,

본문에서도 나츠메에 대한 좀더 상세한 소개가 없어서 한편으로 아쉽기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다소 특이한 제목이라 다 읽고 확인해봤는데 원제 그대로 번역된 제목이었습니다.

묘한 제목의 뉘앙스 때문에 처음엔 밀실 트릭이나 본격미스터리가 아닐까 추측해봤지만

사회파 미스터리에 주력하는 야쿠마루 가쿠가 갑자기 작풍을 틀진 않았을 것 같아서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대학병원 외과의사인 스가 쿠니하루가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됩니다.

성추행범으로 몰렸다가 불기소처분을 받은 그가 수치심과 좌절감에 자살했다고 여겨졌지만

정작 그의 성추행혐의를 조사했던 검사 키요마사는 타살 가능성을 엿보고 재조사에 나섭니다.

한편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형사인 나츠메는 막내 여형사 아다치 료코와 함께

행방불명된 의대 입시학원생 아사카와 미키오의 행방을 찾던 중

키요마사 검사의 호출을 받곤 두 사건이 한 가닥으로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가가 혹시 억울하게 성추행 혐의를 뒤집어쓴 것인지, 또 정말 타살된 게 맞는지,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스가를 그토록 증오했던 것인지,

또, 행방불명된 미키오는 스가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 연관돼있는 것인지,

검사 키요마사와 형사 나츠메는 각 의문에 대해 전혀 다른 답을 내놓은 채 수사에 임합니다.

 

인터넷 서점을 보면 출판사가 워낙 인색하게(?) 작품 소개를 하고 있는데,

400페이지 안팎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나 서사가 꽤 방대해서 그럴 수도 있고,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있는 대목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 나름대로 정리한 줄거리가 초반부 소개에 불과한 것도 그 때문인데,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이 작품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설계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의심과 추리를 100% 확신하며 돌직구처럼 용의자를 밀어붙이는 검사 키요마사와 달리

형사 나츠메는 어딘가 한량 같기도 하고, 형사답지 않은 젠틀함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 검사와 형사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사를 펼치다 보니

가끔은 이 두 인물의 ‘선의의 대결’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어쩌면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나츠메 & 키요마사 시리즈’가 나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검사 키요마사는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빠진 나머지 다소 억지스러워 보였고,

형사 나츠메는 천재 스타일의 과도한 비약적 추리를 펼친 탓에 공감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또, 일본에선 당연한 일인지 몰라도 검사가 아랫사람 부리듯 관할서 형사를 다루는 대목이나

바쁜 와중에 상관의 지시와 무관하게 제멋대로 사건을 골라 수사를 하는 나츠메의 태도는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치곤 어딘가 현실감이 많이 결여된 느낌이 강했습니다.

 

또, 기름기라곤 전혀 맛볼 수 없는, 마치 ‘줄거리 요약’처럼 읽힌 건조하고 단편적인 문장들은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감안하더라도 여러 번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속도감은 엄청나게 빨라졌지만 감정이입을 할 만한 여지가 너무 부족했던 나머지

다 읽고도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이라든가 비극의 여운을 맛보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론 ‘형사의 눈빛’에서 설정된 나츠메의 캐릭터가 일관성 없어 보인 점도 아쉬웠는데

묻지마 범죄로 딸을 잃은 뒤 남들보다 한참 많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한 비극적 이력도,

그런 탓에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던 사람’이 ‘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사람’으로 변한 사연도,

그래서 “저에게 있어 수사란 항상 괴롭습니다.”라고 고백하던 그의 애잔한 내면도

이 작품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야쿠마루 가쿠의 팬임에도 중반까지만 해도 별 세 개만 줄 생각이었지만,

중후반부터 몰아친 그의 특유의 반전과 설계 덕분에 가까스로(?) 별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사실, 서평도 이렇게까지 길게 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내용 소개는 별로 없고, 안 읽은 독자에게 의문만 잔뜩 던진 장황한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영 아니라고 비추하기도 애매한 작품이라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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