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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 ㅣ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아무 정보도 없이 띠지나 뒷표지도 안 보고 본문부터 읽어가던 중에
1/3쯤 된 지점에서 갑자기 “어!”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형사인 이 작품의 주인공 나츠메 노부히토가
작년에 출간된 단편집 ‘형사의 눈빛’의 주인공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 작품이 ‘나츠메 노부히토 시리즈’라는 설명은 없었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음에도 왜 그에 관한 카피가 한 줄도 없을까, 무척 궁금했고,
본문에서도 나츠메에 대한 좀더 상세한 소개가 없어서 한편으로 아쉽기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다소 특이한 제목이라 다 읽고 확인해봤는데 원제 그대로 번역된 제목이었습니다.
묘한 제목의 뉘앙스 때문에 처음엔 밀실 트릭이나 본격미스터리가 아닐까 추측해봤지만
사회파 미스터리에 주력하는 야쿠마루 가쿠가 갑자기 작풍을 틀진 않았을 것 같아서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대학병원 외과의사인 스가 쿠니하루가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됩니다.
성추행범으로 몰렸다가 불기소처분을 받은 그가 수치심과 좌절감에 자살했다고 여겨졌지만
정작 그의 성추행혐의를 조사했던 검사 키요마사는 타살 가능성을 엿보고 재조사에 나섭니다.
한편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형사인 나츠메는 막내 여형사 아다치 료코와 함께
행방불명된 의대 입시학원생 아사카와 미키오의 행방을 찾던 중
키요마사 검사의 호출을 받곤 두 사건이 한 가닥으로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가가 혹시 억울하게 성추행 혐의를 뒤집어쓴 것인지, 또 정말 타살된 게 맞는지,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스가를 그토록 증오했던 것인지,
또, 행방불명된 미키오는 스가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 연관돼있는 것인지,
검사 키요마사와 형사 나츠메는 각 의문에 대해 전혀 다른 답을 내놓은 채 수사에 임합니다.
인터넷 서점을 보면 출판사가 워낙 인색하게(?) 작품 소개를 하고 있는데,
400페이지 안팎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나 서사가 꽤 방대해서 그럴 수도 있고,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있는 대목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 나름대로 정리한 줄거리가 초반부 소개에 불과한 것도 그 때문인데,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이 작품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설계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의심과 추리를 100% 확신하며 돌직구처럼 용의자를 밀어붙이는 검사 키요마사와 달리
형사 나츠메는 어딘가 한량 같기도 하고, 형사답지 않은 젠틀함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 검사와 형사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사를 펼치다 보니
가끔은 이 두 인물의 ‘선의의 대결’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어쩌면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나츠메 & 키요마사 시리즈’가 나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검사 키요마사는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빠진 나머지 다소 억지스러워 보였고,
형사 나츠메는 천재 스타일의 과도한 비약적 추리를 펼친 탓에 공감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또, 일본에선 당연한 일인지 몰라도 검사가 아랫사람 부리듯 관할서 형사를 다루는 대목이나
바쁜 와중에 상관의 지시와 무관하게 제멋대로 사건을 골라 수사를 하는 나츠메의 태도는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치곤 어딘가 현실감이 많이 결여된 느낌이 강했습니다.
또, 기름기라곤 전혀 맛볼 수 없는, 마치 ‘줄거리 요약’처럼 읽힌 건조하고 단편적인 문장들은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감안하더라도 여러 번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속도감은 엄청나게 빨라졌지만 감정이입을 할 만한 여지가 너무 부족했던 나머지
다 읽고도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이라든가 비극의 여운을 맛보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론 ‘형사의 눈빛’에서 설정된 나츠메의 캐릭터가 일관성 없어 보인 점도 아쉬웠는데
묻지마 범죄로 딸을 잃은 뒤 남들보다 한참 많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한 비극적 이력도,
그런 탓에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던 사람’이 ‘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사람’으로 변한 사연도,
그래서 “저에게 있어 수사란 항상 괴롭습니다.”라고 고백하던 그의 애잔한 내면도
이 작품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야쿠마루 가쿠의 팬임에도 중반까지만 해도 별 세 개만 줄 생각이었지만,
중후반부터 몰아친 그의 특유의 반전과 설계 덕분에 가까스로(?) 별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사실, 서평도 이렇게까지 길게 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내용 소개는 별로 없고, 안 읽은 독자에게 의문만 잔뜩 던진 장황한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영 아니라고 비추하기도 애매한 작품이라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