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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감옥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금색기계’, ‘야시’, ‘멸망의 정원’에 이어 네 번째로 만난 쓰네카와 고타로입니다.
각각 에도시대, 현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기이하고 오묘한 판타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온 몸이 금색으로 뒤덮인 신비한 존재(‘금색기계’),
내밀한 연결통로로 드나들 수 있는, 요괴와 죽은 자들이 활개 치는 이계(‘야시’),
지구를 감싼 해파리 모양의 공포의 ‘미지의 존재’ 속에 자리한 평온한 마을(‘멸망의 정원’) 등
쓰네카와 고타로가 창조한 시공간과 캐릭터는
단순한 판타지 이상의 특별하고 고혹적인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을의 감옥’은 쓰네카와 고타로의 이런 마력을 담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무한 반복되는 11월 7일이란 날짜에 갇혀버린 여대생 아이짱(‘11월 7일’),
오래전부터 신역(神域)으로 불리며 스스로 일본 전역을 옮겨다니는 기괴한 초가집(‘신의 집’),
환술(마법) 능력을 타고난 소녀가 스스로 그 능력에서 도망치는 이야기(‘환술을 쓰는 소녀’) 등
역시 쓰네카와 고타로다운 독특하고 신비한 판타지가 펼쳐집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수록된 세 편의 일관된 주제는 ‘감옥’, 즉 ‘갇힘’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세 주인공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각각 시간, 공간, 환상에 갇히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무한 반복되는 11월 7일에 갇힌 ‘나’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난 뒤 어떻게든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듯 기괴한 초가집에 갇힌 ‘나’는
다른 희생양을 끌어들여서라도 초가집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돌아가려 애씁니다.
한때 자신이 지닌 엄청난 환술 능력에 집착했던 소녀는 스스로 그 능력을 버리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이하며 감금당한 채 억지로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세 편에 대한 느낌은 조금씩 달랐는데,
‘11월 7일’은 타임루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사건을 맛볼 수 있었지만
깜짝 스토리나 반전보다는 존재론적 메시지가 강조돼서 조금은 심심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마지막 수록작 ‘환술을 쓰는 소녀’는 읽는 내내 환상 속에 빠진 듯 묘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단편보다는 중편 정도로 확장됐다면 좀더 ‘친절한’ 이야기가 됐을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너무 많은 생략과 비약 때문에 줄거리, 캐릭터, 메시지를 이해하기가 난감했다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 ‘신의 집’은 쓰네카와 고타로 특유의 호러판타지 서사가 반짝반짝 빛난 작품인데,
3일마다 스스로 일본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신비한 초가집 설정도 매력적이고,
그 안에 갇힌 뒤 분노-체념-순응으로 이어지는 ‘나’의 변화 과정이라든가
초가집과 연관된 실종과 살인 등 강력사건의 발생이란 설정도 흥미롭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실과 연결돼있는 이계를 다룬 (제가 너무 좋아하는) ‘야시’와도 일맥상통하는 설정이라
개인적으로 다른 수록작들에 비해 좀더 끌렸습니다.
솔직하게 총평을 하면, 기대했던 것만큼의 만족을 느끼지 못한 게 사실인데,
아무래도 판타지의 농도나 깊이가 ‘금색기계’나 ‘야시’에 비해 얕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 세 편 모두 공통적으로 단편보다는 좀더 긴 분량의 중편에 어울리는 소재들인데
실제로는 ‘요약된 이야기’처럼 생략과 비약이 많았다는 점도 아쉬움을 느끼게 한 대목입니다.
어쩌면 분량 자체가 판타지의 농도와 깊이를 얕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색기계’나 ‘야시’를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작품을 읽고 쓰네카와 고타로에 대해 살짝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을 텐데,
부디 두 작품을 통해 쓰네카와 고타로의 진면목을 만끽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이 좋은 성과를 얻어서 절판된 ‘초제’와 ‘천둥의 계절’도 재출간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