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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강사인 세라는 상사이자 명성이 대단한 교수 러브록에게 매일 성희롱을 당하고 있다. 러브록은 전임강사 자리를 얻고 싶다면 자신과 자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세라는 평생의 커리어가 달린 자리를 포기할 수도, 러브록을 더 이상 참아낼 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세라는 우연히 한 아이를 구하게 되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보상으로) 누구든 사람 한 명을 없애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위험천만한 악마와의 거래. 세라는 그 손을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요약하면, 성희롱에 시달리던 세라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사적 복수를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판타지처럼 나타난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한 남자의 제안으로 인해 세라는 갈등에 빠집니다. 전화 한 통이면 자신의 삶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쓰레기 같은 러브록을 제거할 수 있지만,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탓입니다. 갈등 끝에 그녀는 ‘29초의 통화’를 통해 일을 저지르고 말지만 사태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으면서 더 큰 혼란을 일으킵니다.
작가의 전작인 ‘리얼 라이즈’를 읽고 “다양한 코드가 뒤섞인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라며 나름 우호적인 서평을 쓴 기억도 있어서 신작 소식이 무척 반가웠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너무 실망스러운 작품이라 중도에 포기할 생각이 든 게 사실입니다. 뼈대만 추려서 보면 나름 흥미로운 설정과 소재이긴 하지만, 정작 스토리는 지극히 단선적인 장면들의 무한반복에 가까울 정도로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여자와 동거 중인 남편이나 세라를 정신없게 만드는 어린 남매에 대한 반복적 묘사는 이야기의 핵심과 무관한데도 불구하고 단지 세라의 혼란을 강조하기 위해 수시로 등장했고, 러브록 교수의 집요한 성희롱 장면은 세라의 ‘분노의 게이지’를 끌어올리려는 의도와 달리 살짝 수위만 높아질 뿐 유사한 장면들이 장황하게 반복된 탓에 가해자에 대한 분노보다는 무력한 피해자에 대한 짜증이 더 강해지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좀 과장하면, 무미건조할 정도로 요점만 짚고 최대한의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작가라면 이 작품의 첫 200페이지를 (최대한 양보해도) 그 절반도 안 돼 마무리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결국 속독하듯 눈에 확 들어오는 중요한 지문과 대사에만 집중하기로 했는데, 절반이 채 되기 직전 그마저도 피곤해져서 접으려고 생각할 즈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한 문장이 눈에 띄는 바람에 마지막까지 달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는 통쾌한 리벤지 스릴러”라는 카피에 비해 세라가 거둔 ‘승리’의 과정과 결과는 다소 어이없거나 허무할 정도로 쉬워 보였습니다. 기승전결 어느 부분도 현실감이 없었지만 억지스런 반전과 허망한 엔딩이 가장 아쉬웠는데, 따지고 보면 성희롱과 육아와 부부 문제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세라의 하소연 외에 정작 스릴러 코드가 제대로 발동된 대목은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전작에 비해 너무 큰 실망감을 느낀 탓에 작가의 다음 작품을 읽게 될지 지금으로선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