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의 노크
케이시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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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초보자, 실패자들이 모인 동네라서 늘 사건과 사고가 끊이질 않았죠. 한마디로 끈적이는 동네예요. 장사 안 되는 식당 주방처럼 찌든 때가 여기저기 붙은 곳이죠. 우울, 슬픔, 비루함, 분노, 모든 것이 뒤섞여 끈적거려요.” (p51)

 

막장과도 같은 동네에 자리 잡은 원룸 건물 3층에는 여섯 명의 여자가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젊은 층인 무속인, 디자이너, 사회복지사, 지적장애인, 액세서리 노점상, 그리고 건물을 관리하는 50대 여성이 그들입니다. 모든 소음이 넘나들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살지만 그녀들 사이엔 타인의 영역에 절대 무관심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녀들은 서로의 삶의 대부분을 눈치 챕니다. 일부러든 아니든 엿봐서 알게 된 것도 있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들 때문에 알게 된 것도 있지만, 결코 내색하진 않습니다. 그런 그녀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 건 복도에서 발견된 한 남자의 사체입니다. 경찰은 여섯 명의 여성을 상대로 참고인 조사를 벌이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얼마 후 경찰마저 손을 뗀 상태에서 그녀들이 사는 3층에는 더욱 더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독특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작품입니다. 변사(變死) 혹은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이자 생존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의 일그러진 탐욕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고, 지독할 만큼 궁지에 몰린 밑바닥 삶의 피폐함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 혹은 현실과 유리된 듯 망상과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인 진술서 혹은 녹취기록으로 구성된 1부는 다분히 미스터리의 틀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녀들의 진술 내용은 사건에 관한 것보다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 혹은 어딘가 4차원인 듯한 세계관을 토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각자의 ‘독백’을 담은 2부는 변사 사건 이후 사뭇 달라진 원룸의 분위기와 함께 여섯 여성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거나 소통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소음조차 차단하지 못하던 얇은 벽이 변사 사건 덕분에 뻥 뚫린 듯 그녀들은 서로를 탐색하거나 호기심을 드러내는데, 문제는 그녀들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온한 기운이 파국 이상의 결말을 예고라도 하듯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눈길을 끈 독특한 설정과 탄탄하면서도 유려한 문장들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서사 때문입니다. 앞서 미스터리, 탐욕, 피폐함, 망상과 광기 등 다양한 코드들을 언급했는데, 이 가운데 정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단 하나만 꼽으라면 다 읽은 지금도 명확히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요.”라는 뒤표지의 카피나 “망설이면 진다. 한 번에 목덜미를 물고 숨통을 끊어야 한다. 시간을 끌고 미루는 순간 내가 먹잇감이 된다.”라는 본문 속의 강렬한 문장이 이 작품을 대변하는 듯 하지만, 과연 이게 전부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인데, 미스터리 혹은 장르물이라 하기엔 ‘사족’이 배보다 더 큰 배꼽처럼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청춘들을 그린 사회고발물이라 하기엔 그녀들의 ‘상태’가 하나 같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또, 어떤 독자의 서평대로 마치 ‘악녀선발대회’마냥 파국으로 치닫는 클라이맥스에 제대로 이입할 수 없었던 건 그 자체가 현실인지 망상인지, 미스터리인지 광기 서린 쇼인지 애매모호했기 때문인데, 그런 탓에 다 읽고도 한두 줄로 요약이 안 되는 이리저리 뒤엉킨 기분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새로운 시도가 곳곳에서 엿보이긴 했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가 ‘동시상영’된 탓에 오히려 그 미덕이 가려진 작품이 됐습니다. 출판사는 홍보글에서 ‘화차’와 ‘미야베 미유키’를 언급했는데, 개인적으론 서사 자체가 대중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았고, (설령 그것이 캐릭터 묘사를 위한 장치였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부풀려진 사족들은 순기능보다는 부작용에 더 가까웠다는 점에서 다소 무리한 홍보성 멘트로 보였습니다.

정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요.”였다면 이 작품은 훨씬 더 슬림한 분량 속에 직설적이고 선명한 이야기를 담았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악녀선발대회’에 좀더 충실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지독히 통속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뭔가 ‘있어 보이게’ 포장하긴 했지만, 그 포장지 때문에 정작 진짜 통속적인 재미가 가려졌다는 느낌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이 작품이 영화화될 때 원작에 충실하게 제작된다면 ‘저주받은 걸작’이 될 가능성이 높은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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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의 살의
미키 아키코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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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일본 Q현의 유서 깊은 니레 가문 저택에서 일가족 독살사건이 벌어집니다. 유력한 단서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받은 남자는 살인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행을 인정하고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그로부터 42년이 지난 2008년,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가석방으로 세상에 나온 남자는 니레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당시 사건현장에 있었던 한 여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살인범이 아니었지만 범행을 자백했던 이유를 설명하며 뒤늦게나마 진범을 알아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추리소설 마니아인 여자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남자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어왔던 여자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가설을 공유하고 진범을 추리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추리가 달아오를수록 두 사람의 가설은 충격적인 내용들로 채워진다는 점, 또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진범 후보로 떠오른다는 점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본격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등장인물 소개’와 ‘사건이 벌어진 현장의 조감도’가 맨 앞에 실린 것을 발견하곤 지레 올드한 본격이 아닐까, 선입견을 가졌던 게 사실인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래, 이게 진짜 본격의 맛이지!”라는 감탄이 여러 차례 튀어나올 정도로 흥미진진했기 때문입니다.

2010년 신인상 수상 당시 시마다 소지로부터 들은 격찬 덕분에 ‘추리의 정밀기계’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후 열두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는 이력을 보면 미키 아키코가 이제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을 특별한 별명에 걸맞게 그녀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정교한 설계도 위에 각종 트릭과 거듭되는 반전의 향연을 펼쳐나갑니다. 그것도 두 남녀가 주고받는 편지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서 말입니다.

 

인터넷서점에 소개된 ‘목차’를 보면 편지를 주고받는 남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지만, 살인사건을 묘사한 첫 챕터의 재미 때문에라도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부적절해서 줄거리 속에 그저 ‘남자’, ‘여자’라고만 언급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편지의 내용이라든가 그 이후의 전개 역시 거의 모든 것이 스포일러라 서평 쓰기가 무척 난감한 것 역시 사실인데, 뒤집어 얘기하자면 그만큼 트릭과 반전이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고 물샐 틈 없이 설정돼있다는 뜻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선인 1960년대, 가부장적이고 독재적인 선대 당주에 의해 장기판 말처럼 휘둘려 애정 하나 없이 가족이 된 인물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질투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 그 일그러진 관계는 일가족 독살사건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범인이 아님에도 스스로 무기징역수가 된 남자는 42년이 지난 후 진실을 알아내고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 하에 수없이 다양한 가설을 세우고 진범을 쫓는 집념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남자와 편지를 주고받는 여자 역시 단순한 추리 파트너가 아니라 40여 년 동안 심중에 지독한 애증을 품어온 인물로 남자에게 복잡다단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미스터리한 캐릭터입니다.

 

두 남녀의 편지가 다섯 차례 오간 후 이야기는 급격한 흐름을 탑니다. 42년 전 사건의 여파는 또다시 끔찍한 비극을 일으켰고, 경찰 수사는 그럴 듯하지만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결론을 내며 종결됩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거듭된 반전을 통해 뒤집히고 또 뒤집히기를 반복합니다. “이게 진짜 본격의 맛이지!”라는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온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이 작품의 제목에 들어간 ‘기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게 됩니다.

‘기만의 살의’는 인물이나 사건 모두 굉장히 아날로그적이지만, 빼어난 트릭과 반전의 힘은 올드한 설정 따위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현대적입니다. 속도감 역시 대단해서 단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만드는데, 문제는 이 속도감에 도취되면 작가가 숨겨놓은 힌트와 단서를 죄다 놓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독자를 안달복달 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미덕이라고 할까요?

 

자극적이지만 허술함 또는 불편함이 더 많이 느껴질 정도로 ‘변형된 형태의 본격’을 추구하는 작품들이 적잖은 요즘, 미키 아키코라는 작가를 발견한 건 꽤 행운이란 생각입니다. 60세(2007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63세에 데뷔작을 내놓았으니 그 자체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후 12편의 작품을 출간한 저력은 일본 미스터리의 탄탄한 토대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만드는 사실입니다. ‘기만의 살의’가 호응을 얻는다면 그녀의 작품들을 연이어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머잖아 그 기대가 꼭 실현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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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키스 ㅣ 스토리콜렉터 98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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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피오르 해안에 자리한 소도시 크리스티안순에서 IT기업 인턴사원의 피살체가 발견됩니다. 치밀한 계획과 지독한 증오심이 엿보이는 사건이지만 수사과장 플레밍 토르프는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해 답답할 뿐입니다. 같은 시간, 한때 연적이었지만 여전히 절친으로 지내고 있는 플레밍을 도와 외국인 여성노동자 살인사건을 해결하여 ‘대머리 탐정’이란 별명과 유명세까지 얻은 광고 카피라이터 단 소메르달은 딸 라우라의 부탁으로 결혼사기를 당한 50대 여교사 우르술라를 만납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정식 의뢰를 받아 사립탐정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문제는 단이 구해온 결혼사기꾼의 지문이 플레밍이 맡은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플레밍은 어쩌면 외국인 여성노동자 살인사건 때처럼 단 때문에 또다시 자신과 경찰이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유다의 키스’는 2020년 봄에 출간된 ‘이름 없는 여자들’의 뒤를 잇는 ‘단 소메르달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혀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아나 그루에가 덴마크 작가란 점 때문에, 즉 차갑고 잔혹한 북유럽 스릴러를 맛볼 수 있다는 기대 하나 때문에 선택했던 작품인데, 고백하자면, 아무 정보도 없이 읽다가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파악한 시점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기대했던 북유럽 스릴러의 톤과는 전혀 다른 코지 미스터리가 전개됐기 때문입니다.

단과 플레밍은 오랜 절친이지만 단의 아내 마리아네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플레밍의 여친이었고, 이 사실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둘 사이에 앙금 아닌 앙금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플레밍이 마리아네의 뺨에 키스를 할 때면 단의 혈압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물론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지만 말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살인사건을 놓고 협업과 갈등을 벌이며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가 이 시리즈의 핵심입니다.

 

‘이름 없는 여자들’에서 두 사람은 팽팽한 갈등 끝에 ‘각자 수사’를 진행한 뒤 자신들이 획득한 정보와 추리를 공유하기로 타협한 바 있지만, ‘유다의 키스’에서는 거의 단이 주도권을 쥔 채 수사과장 플레밍과 경찰을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저돌적인 수사를 펼쳐나갑니다. 살짝 다혈질이지만 연륜을 자랑하는 플레밍은 자칫 사건을 망치고 범인을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는 단의 광폭행보에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본업인 광고 카피라이터만큼이나 뛰어난 수사관으로서의 ‘촉’을 지닌 단의 성과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지경을 여러 차례 겪게 됩니다.

 

플레밍이 담당한 살인사건과 단이 조사하는 결혼사기사건이 우연히도 ‘지문’이라는 접점을 갖게 되면서 이야기는 코지 미스터리를 벗어나 심각한 수준으로 격상됩니다. 단이 쫓는 결혼사기꾼의 행각은 피해 여성이 한둘이 아님이 밝혀지고 그 수법도 지능적이고 정교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단순사기로 볼 수 없는 중대범죄로 규정됩니다. 또 결혼사기꾼과 살해된 IT기업 인턴사원의 배경에 엄격한 규율을 지닌 종교단체가 있음을 알아낸 단과 플레밍은 애초 예상과 달리 사건이 꽤 복잡하게 꼬여있으며 비극적인 가족사까지 연루된 사실을 깨닫습니다.

 

흥미롭게 읽었지만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 단의 공명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직접 찾아낸 단서와 정보가 아깝기도 하지만 처음 정식으로 의뢰받은 ‘내 사건’이란 인식 탓에 단은 어떻게든 경찰을 배제하고 자신이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은 나머지 무리한 행동을 반복합니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호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혀 수사를 망칠 수도 있는 행보를 멈추지 않는 단의 모습은 때론 ‘민폐 캐릭터’로 보일 정도로 불편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선지 ‘이름 없는 여자들’과 달리 사건을 해결한 단에게 박수를 보낼 수만은 없었는데, 독자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의 ‘공명심과 이기심’ 때문에 비호감의 인상이 강하게 남고 말았습니다. 또 아마추어인 단의 수사에 행운이 과도하게 많이 따른 점과 막판에 밝혀진 결혼사기범의 범행 동기가 다소 억지스럽게 설명된 점 역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들이라 별점을 삭감하게 된 이유입니다.

 

이 시리즈가 7편이나 출간됐고 TV시리즈로 제작되어 세 번째 시즌을 앞둔 점만 봐도 캐릭터와 스토리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데, ‘유다의 키스’는 코지 미스터리의 매력과 스릴러의 미덕이 잘 믹스된 서사도 만족스러웠고, 매끄러운 전개와 간결하고 생기 넘치는 문장들도 전작 못잖게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앞서 언급한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단 소메르달 시리즈’를 한국에서 계속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유일한 바람이라면 부디 단이 더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민폐까지 끼치며 독주하는 일만은 자제해줬으면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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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의 사육사
김남겸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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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할 수 있습니까?”

 

표지에 실린 카피만 봐도 이 작품이 사적 복수를 다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소재지만 이제 더는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래서인지 엇비슷한 전개 혹은 억지스러운 설정에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끄는 제목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했던 건데, 결론부터 말하면 “과연 이런 사적 복수를 계획할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물과 설정 모두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줄거리를 거의 공개하지 않은 출판사의 간략한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요점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상식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이 택한 복수의 방법은 ‘상대방에게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하고 잘만 다룬다면 새로운 사적 복수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설정이지만, 읽는 내내 불편함과 반발심만 들었던 건 그 어디에서도 “그럴 듯하다”라는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적 복수를 결심하게 만든 애초의 사건은 충분히 비극적이긴 했지만 과연 이런 식의 극단적인 복수를 계획하게 만들 만큼 참혹하고 잔인했는가? 설령 그렇다 해도 복수 가담자들이 선택한 방법은 과연 적절하고 치명적인가? 즉, 그 방법이 ‘상대방에게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안겨주는 것’이라는 복수 가담자들의 목표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그 목표 자체가 과연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힐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No”입니다. 복수 가담자들이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입은 상처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지만, 이후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한 그들의 행보, 즉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을 연구하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복수를 계획하는 과정은 전혀 상식적이지도 않고 납득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복수는 오히려 가담자들에게 더 큰 상처만 남길 뿐 정작 가해자가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겪을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가담자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도 없었고, 그 방법조차 억지스러웠던 탓에 이들의 사적 복수 이야기는 그저 공허하게만 느껴졌을 뿐입니다.

 

앞서 “얼마든지 가능하고 잘만 다룬다면 새로운 사적 복수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설정”이라고 언급했듯 설정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독자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하기에는 인물도, 사건도, 복수의 방법도 허술하거나 억지스러웠고, 또 문장과 구성 등 전반적인 필력 역시 부족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사적 복수 이야기를 좋아해서 기대감이 높았던 탓에 조금은 신랄할 혹평이 되고 말았는데, 많은 작가들이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댄 소재인 만큼 사적 복수를 구상하는 작가라면 좀더 치열한 고민과 정교한 설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독자의 고언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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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종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1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
빈스 플린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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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스 대통령의 재선을 좌지우지할 예산안 의결을 앞두고 최측근인 비서실장 스투 개럿과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크 낸스는 찬성표를 확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원들을 압박합니다. 이상주의를 꿈꾸던 하원의원 마이클 오루크는 미국을 파탄에 빠지게 할 예산안을 지켜보며 워싱턴 정가의 탐욕과 위선에 환멸을 느낍니다. 의결일 당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예정된 승리에 도취돼 흥분하지만 이른 새벽에 벌어진 원로 정치인 세 명의 암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암살범들은 예산안의 전면수정과 개혁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언론을 통해 발표합니다. 오루크는 살해된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기득권과 사익을 위해 농단을 부려온 자들이라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지만, 왠지 이 충격적인 암살사건이 자신이 1년 전 만났던 누군가와 연관돼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임기종료’는 CIA 비밀암살요원의 활약을 그린 ‘미치 랩 시리즈’의 작가 빈스 플린의 데뷔작입니다. 미치 랩이 등장하진 않지만 ‘미치 랩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론 시리즈 프리퀄을 읽는 듯한 기분 좋은 책읽기가 됐습니다. 정의로운 이상주의 정치가인 하원의원 마이클 오루크는 ‘미치 랩 시리즈’에서는 단역급 카메오 정도로만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주인공을 맡은 ‘임기종료’에서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맹활약합니다. 또한 전직 네이비실(Navy SEAL)이자 미치 랩의 영원한 동료인 스콧 콜먼을 비롯하여 CIA 국장 토머스 스탠스필드, 대 테러센터 본부장 아이린 케네디, FBI 특수요원 스킵 맥마흔, 대통령 경호요원 잭 워치 등 낯익은 인물들의 초기 모습은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습니다.

 

예산안 의결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은 한국에서도 낯익은 모습이지만 그것이 노회한 정치인들을 향한 대량 암살로까지 번지는 설정은 다소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산안 의결이 현직 대통령의 재선을 가늠할 수 있는 ‘예비선거’의 성격을 띠고 있고, 예산안 자체가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야합의 결과이며 장차 미국을 파산으로까지 이끌 수 있는 위험천만한 덫이라는 설정 때문에 큰 위화감 없이 초반부 시퀀스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갈등의 주체들은 크게 넷입니다. 예산안 수정과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연이어 암살을 자행하는 범인들, 암살범들의 메시지에 동의하면서도 살인과 폭력이 옳은 방법인지 고민에 빠지는 하원의원 오루크, 암살범들을 쫓는 FBI와 CIA, 그리고 예산안 통과를 목전에 뒀다가 암살범들 때문에 궁지에 몰리자 위험한 음모를 꾸미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그들입니다.

주로 중동 테러리스트를 주적으로 삼은 ‘미치 랩 시리즈’와 달리 내부의 적, 즉 사익과 기득권에 눈먼 탐욕스런 정치인들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민주적 절차인 투표를 통해 개혁을 이뤄야 한다는 논리와 폭력 역시 개혁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라는 논리가 팽팽하게 맞섭니다. 이 당혹스런 상황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하원의원 오루크는 숱한 고민과 갈등 끝에 전직 해병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며 야합과 이기심이 판치는 워싱턴 정가와의 전면전을 결심합니다.

 

위선으로 가득 찬 비열한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스토리는 중동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한 액션 스릴러 이상의 쾌감과 흥분을 발산합니다. 비록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이 합리화되는 대목은 편하게 읽히지 않았지만, ‘미치 랩 시리즈’에서 이미 그 진가를 맛봤던 빈스 플린 특유의 ‘과격한 주장과 논리’는 충분히 독자를 설득하고도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캐릭터의 힘이 그 주장과 논리를 탄탄히 밑받침하고 있는데, 악당들은 얄미울 정도로 똑똑한데다 몇 대 날려주고 싶을 정도로 야비했고, 암살범들의 고도의 전략과 작전수행능력은 몇 번이나 박수를 보내주고 싶을 만큼 뛰어났으며, 이상주의를 꿈꿨던 초보 정치인이 숱한 위기를 넘기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대목들은 단순한 영웅서사 이상의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딱 한 가지, 별 0.5개를 빼게 만들었던 아쉬움은 다소 과해 보였던 분량입니다. 데뷔작이라 욕심을 부려서 그런지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들이 곳곳에서 템포를 처지게 만들었는데 그런 장면들이 쌓이다 보니 평균 450~550 페이지 정도였던 ‘미치 랩 시리즈’보다 훨씬 긴 650 페이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하루 안에 너끈히 마칠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했지만 아주 사소한 옥의 티처럼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순서대로라면 가장 먼저 읽었어야 할 ‘임기종료’지만, 개인적으론 오히려 ‘미치 랩 시리즈’를 마친 뒤에 읽은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미치 랩은 등장하지 않지만 “이런 게 프리퀄의 재미!”라는 걸 잔뜩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새삼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미치 랩 시리즈’가 더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적어도 빈스 플린이 생전에 직접 집필했던 작품(‘The Last Man’, 2012년, ‘미치 랩 시리즈’ 13편)까지만이라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The Survivor’부터 2021년 작 ‘Enemy at the Gates’까지는 Kyle Mills에 의해 집필된 ‘미치 랩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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