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당신이 무사히 타락하기를 ㅣ 나비클럽 소설선
무경 지음 / 나비클럽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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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역사 미스터리 소설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을 읽고 관심 목록에 올려놓은 작가 무경의 연작단편집입니다. ‘계간 미스터리’ 2023년 가을호 신인상 수상작인 ‘치지미포, 꿩을 잡지 못하고’를 포함하여 모두 네 편이 수록돼있는데, 역설적이면서도 중의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 때문에 무슨 이야기가 실려 있을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인간 영혼의 타락을 기원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즐기다가 끝내 지옥으로 보내고 마는 악마입니다. 단, 이 악마는 ‘악마다운 짓’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타락하는 영혼을 지켜보며 향기로운 악취(?)를 만끽하거나 기껏해야 인간을 딜레마적인 상황에 몰아넣는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짐으로써 한 영혼의 급전직하를 유도할 뿐입니다. 재미있는 건 “인간이 봐도 인간 같지 않은 자들이 있지요? 그런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는 건 내 직업의식이 허락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대로 이 악마는 이미 타락해버린 영혼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타락하는 중인 영혼 또는 절대 타락할 것 같지 않지만 한순간 타락의 길에 들어서는 영혼이야말로 이 악마의 최대 관심대상인 것입니다.

 

수록된 네 편은 각각 1951년 한국전쟁 중의 지리산, 1992년 휴거 소동 이후 혼란에 빠진 사이비교단, 1987년 민주화 운동 와중의 부산의 폐광, 그리고 독재의 시대였던 1973년의 경찰서 취조실 등 모두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빨갱이 대장 잡기’로 공적을 세우려는 군인들, 휴거가 무산된 뒤 각자도생을 모색하는 교주와 교도들, 폐광에 숨겨진 금괴를 차지하려는 탐욕적인 인간들, 그리고 태연히 고문과 폭력을 휘두르던 경찰 등 네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순명료하고 급격한 타락이 횡행했던 시대이자, 인간을 극단적인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던 시대를 살아가다가 한순간에 “나약함과 야욕에 휘둘려 타인과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평범한 인간”들입니다.

 

독자는 악마 앞에서 스스로 타락해가는 인물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악마의 말 한마디에 휘둘려 탐욕과 본성을 드러내는 인물에게선 영화 속 악당의 최후를 지켜보는 듯 통쾌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선지 악마가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 풍의 타락 성공사(?)는 극적인 반전이나 쫄깃한 미스터리 서사 없이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읽히는데, 물론 그 뒷맛은 씁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하지 않는 인생은 가능한가?”라는 출판사 홍보 카피는 이 작품의 뒷맛을 아주 잘 대변하고 있는 문구인데, “스스로 타락하지는 않더라도 난 과연 악마의 속삭임을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자문이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무경의 신작 소식이 들렸을 때는 당연히 ‘마담 흑조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독특한 연작단편집을 만나게 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한동안 책을 읽을 수 없는 형편이 됐지만, 그래도 마담 흑조의 두 번째 이야기가 출간된다면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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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초 피는 병원, 아즈사가와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최주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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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슈 마쓰모토市 외곽의 아즈사가와 병원은 지역 의료기관이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뿐 아니라 환자 대부분이 80~90대의 고령이라는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는 작은 종합병원입니다. 도쿄 출신이지만 신슈의 시나노대학을 졸업한 후 마쓰모토에 눌러 앉은 1년차 수련의 가쓰라 쇼타로와, 잘못된 것이나 이상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당찬 성격의 3년차 간호사 쓰키오카 미코토는 악전고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아즈사가와 병원에서의 하루하루를 진심과 전력을 다해 버텨내는 의료인들입니다. 그리고 병원에는 ‘작은 거인’, ‘사신’, ‘블리자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개성 강한 베테랑 의사와 간호사들이 즐비한데, 이들은 따끔한 채찍이자 동시에 거대한 스승으로서 가쓰라와 미코토의 성장을 돕습니다.

 


‘물망초 피는 병원, 아즈사가와’는 ‘신의 카르테 시리즈’와 ‘스피노자의 진찰실’로 한국 독자와 친숙한 나쓰카와 소스케의 휴먼 메디컬 소설입니다. 낭만적이고 평화로워 보이는 표지와 제목은 나쓰카와 소스케를 잘 모르는 독자에겐 밝고 따뜻한 힐링 서사를 기대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물망초 피는 병원, 아즈사가와’는 고령화 사회, 연명치료, 올바른 치료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처하는 법 등 꽤 묵직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메디컬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두 주인공 가쓰라와 미코토의 달달한 멜로가 깔려 있고, 시종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져서 나쓰카와 소스케의 전작들과 비슷한 경향과 무게감을 지닌 것도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마주하기 거북하고 어두운 주제를 작가 특유의 따뜻한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낸, 제대로 된 메디컬 소설이라고 할까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각각의 소제목에는 모두 꽃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샌더소니아, 추해당, 달리아, 산다화, 얼레지, 물망초 등이 그것인데, 이런 설정은 1년차 수련의인 주인공 가쓰라의 본가가 꽃집으로 설정돼있기 때문입니다. “꽃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남의 아픔도 모른다.”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격언 삼은 가쓰라의 캐릭터는 지금까지 봐온 메디컬 픽션의 그 어느 주인공보다 진정성과 진심을 갖춘 인물로 보입니다. 비록 전작들의 주인공에 비해 주인공 가쓰라의 캐릭터가 다소 싱거워 보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7년 후쯤엔 가쓰라가 ‘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주인공 구리하라 이치토가 돼있을 것 같고, 다시 7년쯤 흐른 뒤엔 ‘스피노자의 진찰실’의 주인공 마치 데쓰로가 돼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입니다. (마지막 수록작에서 가쓰라와 구리하라 이치토가 운명적으로 만날 가능성을 암시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또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가쓰라에 호응하는 3년차 간호사 미코토 역시 ‘의사를 움직이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펼치는 건 물론 잘못된 것이나 이상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당찬 성격으로 설정돼서 가쓰라와는 묘하게 합이 잘 맞는 캐릭터입니다.

 

두 주인공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일명 ‘사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순환기내과 의사 다니자키입니다. “그 시절엔 어떤 환자든 최선을 다해 살리는 게 당연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에요.”라며 80세 이상 환자는 치료를 최소한으로만 하고 그냥 지켜보는 방침으로, 즉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유도하는 그의 의사로서의 철학은 무척 위험천만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달 남짓 그에게 지도를 받게 된 가쓰라는 ‘고령 환자에게 올바른 치료란 무엇인가?’라는, 베테랑들조차 정답을 내놓을 수 없는 화두를 놓고 의사로서 갈등을 거듭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때론 다니자키의 지독한 현실론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때론 그의 철학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무겁고 어둡고 지독히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쓰카와 소스케의 메디컬 소설은 언제나 웃음과 눈물을 번갈아 짓게 만들곤 합니다. 또한 감동이나 기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의료현장의 희로애락을 솔직담백하게 그려내서 매번 읽을 때마다 그 어느 독한 설정의 메디컬 픽션보다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판타지 같은 힐링 메디컬이 아니라 의료현장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면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나쓰카와 소스케의 작품들을 꼭 읽어볼 것을 강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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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체를 찾아주세요
호시즈키 와타루 지음, 최수영 옮김 / 반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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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종양에 걸려 자살을 결심한 베스트셀러 작가 모리바야시 아사미가 블로그에 “내 시체를 찾아주세요.”라는, 독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미스터리를 남긴 채 실종됩니다. 아사미와 다툰 뒤 호숫가 별장에 와있던 남편 마사타카는 담당 편집자 사오리를 통해 아사미의 소식을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출판계와 독자들이 패닉에 빠진 가운데 며칠 후 아사미의 블로그에 마사타카마저 깜짝 놀랄 만한 비밀 폭로글이 새로 올라오자 그녀의 생사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어 14년 전 벌어진 여고생 집단자살사건, 일명 ‘하얀 새장 사건’의 진상을 다룬 미공개 원고가 블로그에 올라오고 아사미가 사건 당사자 중 한 명이란 사실이 공개되자 세간은 아사미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녀의 시체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오랜만에 마지막 한 줄까지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던 수작을 만났습니다. 280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단 한 줄도 허투루 읽어 넘길 문장이 없어서 마치 5~6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을 읽은 듯 몸과 마음이 소진된 느낌이었습니다.

 

뇌종양으로 인해 자살을 결심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독자에게 남긴 마지막 미스터리는 자신의 시체를 찾아달라는 엽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이미 사망한 작가의 블로그에 미리 예약해둔 듯한 폭로성 글이 연이어 올라오는가 하면, 14년 전 작가 본인이 연루된 집단자살사건을 논픽션 형식으로 집필한 미공개 원고마저 차례로 공개되는 등 독자는 초반부터 여러 개의 미스터리 폭탄을 동시에 맞게 됩니다.

 

남편 마사타카와 편집자 사오리가 한 챕터씩 번갈아 화자를 맡고 중간중간 연일 갱신되는 아사미의 블로그 내용이 삽입됩니다. 말하자면 아사미의 생사 및 시체의 행방에 마사타카와 사오리를 제외한 엉뚱한 제3자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채 기생충처럼 아사미에게 얹혀 살아온 마사타카도, 아사미에게 집착에 가까운 동경심을 품은 탓에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던 사오리도 독자의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인물들이지만, 작가는 마지막까지 아사미가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죽었다면 예고대로 자살한 건지 혹은 살해당한 건지, 살해당했다면 누가 죽인건지 좀처럼 가늠할 수 없게 만들어서 호기심과 궁금증을 극대화시킵니다.

거기에다 네 차례에 걸쳐 조금씩 공개되는 14년 전 사건의 진상이 과연 현재 아사미에게 벌어진 사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지도 긴장감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인데, 막판에 밝혀지는 이 ‘연결’은 뜻밖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자아내면서 아사미의 삶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린 가혹한 운명을 원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복수란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끝까지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내 시체를 찾아주세요’는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거대하고도 집요한 복수를 그린 스릴러이자 두 개의 사건(작가 아사미의 생사 및 여고생 아사미가 겪은 집단자살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입니다. 장르물로서 완성도 높은 설계와 정교한 구성도 돋보였지만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요동치는 심리와 감정 묘사에도 공을 들였고, 덕분에 단순히 ‘진실 찾기’를 넘어 묵직한 여운까지 맛보게 해줬습니다.

 

일본에서는 2024년 드라마로 제작됐을 만큼 화제를 모았다고 하는데, 원작을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그만큼의 감흥을 드라마에서 맛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호시즈키 와타루의 다음 행보가 무척 궁금해지는데, 이 작품이 호응을 얻어 조만간 한국 독자들이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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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없는 것 ㅣ 하영 연대기 3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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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이 되자 한국을 떠나 나유진이라는 이름으로 뉴욕에 정착한 하영은 생활고에 시달리던 중 한국의 재벌가 미술관장인 한지윤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습니다. 자신의 딸 세나와 친구가 된 뒤 곁에서 지켜봐주기만 하면 맨해튼의 아파트와 고액의 보수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하영은 세나가 자신과 닮은꼴의 괴물임을, 그리고 한지윤의 제안은 단순히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심정에서가 아니라 일종의 감시가 목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세나 주위에서 끔찍한 살인이 벌어지자 하영은 자신의 과거와 다시 마주치기가 두려워 종적을 감추지만, 3년 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세나와 재회합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두 사람의 주위에 다시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본능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 11살의 맹아기 소시오패스(‘잘 자요, 엄마’)를 거쳐 살인을 부추기는 내면의 목소리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갈등하는 16살의 성장기 소시오패스(‘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였던 하영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하영 연대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에서 그녀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있을지 궁금증을 참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론 시리즈 2편인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의 서평 말미에 “‘완성된 소시오패스’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라고 썼지만, 마음 한쪽에선 정반대의 모습, 즉 과거를 끊어낸 채 어떻게든 평범하게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반전을 떠올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건 “연쇄살인범은 타고 나는가, 만들어지는가?”라는 정답 없는 의문에 대해 전작들에서 서미애가 보였던 관점 때문입니다. 즉 “서른 넘어 갑자기 살인마가 되는 경우는 없다.”라는 대사를 쓴 점이라든가 지금까지 시리즈에 등장한 소시오패스들이 대부분 ‘엄마의 학대’라는 외적 요인에 영향을 받은 점을 감안하면 서미애가 하영에게 ‘완성된 소시오패스’라는 외길 운명 대신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여지를 남기지 않을까, 라는 추론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떠나 뉴욕에 정착한 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하영의 초반부 모습은 꽤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영이 자신의 데칼코마니 같은 20살의 괴물 세나를 만나 또다시 과거로 끌려들어가고,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죽음의 그림자에 연이어 휩싸이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쯤 ‘하영 연대기’의 진짜 매력을 만끽할 수 있게 됩니다.

 

“언니도 날 알아본 거야. 말하지 않아도 언니는 알고 있었어. 내가 어떤 그림자를 감추고 있는지, 때론 어떤 충동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는지.” (p109)

 

“너는 거울 건너편에 서 있는 나야.” (p298)

 

자신의 과거와 살인을 부추기는 내면의 목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뉴욕의 익명성 속에 몸을 감췄지만, 자신과 꼭 닮은 세나와 엮이면서 하영의 삶은 또다시 바닥없는 심연에 빠집니다. 어떻게든 거기에서 도망치려 해보지만 운명은 하영을 세나와 한 세트로 묶어버립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살인 서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두 편의 전작과 달리 하영은 이번엔 관찰자 또는 방관자로 시작했다가 결국 자신과 세나를 바닥없는 심연에서 이끌어내는 세컨드 주인공으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폭주하는 소시오패스 하영’의 모습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다소 아쉽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시리즈 마지막 편의 미덕을 잘 살린 매력적인 설정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저기에 하영의 진면목을 목격할 수 있는 장면들이 꽤 실려 있습니다)

 

사실 두 편의 전작을 읽지 않았다면 ‘나에게 없는 것’의 진가를 100% 만끽하긴 어렵습니다. 유년기에 첫 살인을 저지른 하영이 어떻게 소시오패스로 진화했는지, 사춘기를 거치는 동안 소시오패스로서 어떤 갈등과 고민에 빠졌었는지를 모른 채 이 작품을 읽는다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하영 연대기 3부작’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300페이지 중후반 정도의 분량인 세 작품을 하루 이틀 안에 몰아서 읽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시리즈의 종결은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무척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무모한 바람이긴 하지만 언젠가 ‘하영 외전’ 한 편 정도는 출간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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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결혼
제네바 로즈 지음, 박지선 옮김 / 반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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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DC 최고의 형사 변호사 세라 모건은 결혼 10주년 다음 날 인생 최악의 상황을 맞이합니다. 전업 작가인 남편 애덤이 호숫가 별장에서 내연녀 켈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가 점차 소원해지던 중이었긴 해도 사랑 하나만으로 애덤을 믿어왔던 세라는 살인 못잖게 그가 1년 넘도록 켈리와 깊은 관계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세라는 애덤의 변호를 자처합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는 점과 그가 범인일 리 없다는 확신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무죄를 밝혀냄으로써 어떻게든 결혼생활을 지켜내고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는 일을 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사는 연신 난관에 부딪히고, 애덤마저 연이어 대형 사고를 치며 세라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가족 또는 부부가 주인공인 도메스틱 스릴러는 어지간히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으면 가급적 기피하는 장르지만, ‘완벽한 결혼’은 ‘내연녀를 살해한 남편을 변호하는 아내’라는 설정 때문에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남편에게 1년 넘도록 마음까지 주고받은 내연녀가 있었고 그 내연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됐다면, 보통의 아내라면 진실과는 관계없이 피해자 측에 서서 남편을 증오하며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라는 이제는 거의 사그라진 한 조각의 사랑과 형사 변호사로서의 명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신을 배신한 애덤의 변호를 자처합니다. 그리고 검찰과 보안관이 놓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무리한 방법까지 동원해가며 분투합니다. 한편 세라 덕분에 구속을 피해 가택연금 판정을 받은 애덤은 스스로 진범을 밝혀내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짓까지 저질러가며 위험한 행동을 일삼습니다. 문제는 그 행동들이 점점 더 애덤 본인을 옥죄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라와 애덤이 한 챕터씩 번갈아 1인칭 화자를 맡아 각자가 의심하는 인물들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한 챕터의 분량이 짧기도 하지만 무척 빠른 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돼서 두 사람의 심리묘사에 적잖은 분량이 할애됐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세라와 애덤의 조사가 진척될수록 여러 명의 용의자가 차례로 수면 위로 떠올라서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는데, 살해된 켈리의 과거 속에 의심스러운 인물들이 보이는가 하면, 조사에 비협조적인 보안관들도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고, 켈리를 살해할 만큼 원한 혹은 집착에 빠진 인물들도 눈에 띕니다. 또한 스스로 진실을 밝히려는 애덤의 무모한 폭주는 세라의 조사를 거듭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그녀로 하여금 “혹시 애덤이 진짜 범인이 아닐까?”라는 의문까지 품게 만들 만큼 여러 차례 위기를 자초하곤 해서 ‘내연녀를 살해한 남편을 변호하는 아내’라는 설정을 더욱 쫄깃하게 만듭니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 읽은 뒤 뭔가 아쉽고 허전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우선 일부 인물들의 관계나 캐릭터 설정이 다소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기엔 과도해 보이는 우연으로 엮인 인물들도 있고, 단지 한두 개의 역할을 위해 도구적으로 쓰이고 만 인물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작가가 미스디렉션을 위해 여러 명의 용의자를 등장시키며 의혹의 씨앗을 잔뜩 뿌려놓았지만, 정작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 사람은 신경 안 써도 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도 의심스럽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용의자들 외에 세라와 애덤 주변인물을 눈여겨보게 만든 설정은 꽤 정교하고 치밀했지만 눈길을 잡아끌 만큼 흡인력이 크진 않았습니다.

 

마지막 반전과 복선을 회수하는 방식은 100점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주인공 세라의 캐릭터도 한 번만 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의 후속작 ‘완벽한 이혼’이 미국에서 2025년에 출간됐고, 한국에도 2026년에는 소개될 예정이라고 해서 나름 기대감을 품게 됐습니다. 어딘가 좀 허술하고 아쉬운 대목들이 있긴 해도 진범 찾기 미스터리와 도메스틱 심리 스릴러가 잘 믹스된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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