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소녀 - Novel Engine POP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정은주 옮김, 치런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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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명문 세이보 여고 경영자의 딸이자 뛰어난 미모와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3학년생 시라이시 이츠미가 학교 화단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원인은 추락사. 사인도 범인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츠미가 이끌던 문학동아리 멤버 6명은 학기말 정기모임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낭독회로 대체합니다. ‘아름다운 소녀 이츠미의 죽음’을 테마로 각자 단편소설을 쓴 뒤 직접 발표하기로 한 것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오랜 전통대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갖고 온 재료 외엔 무엇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암흑전골을 나눠 먹는 가운데 멤버들은 세이보 여고의 ‘비너스’ 이츠미와 자신이 맺었던 빛나던 인연과 아름다운 추억담을 그린 소설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는 자신만의 추리로 장식합니다. 즉 ‘이츠미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지목한다는 뜻인데, 문제는 지목된 범인이 모두 제각각이란 점입니다.

 

고백하자면, 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라노벨로 분류된 작품들은 미스터리 서사가 담겨있더라도 조금의 미련도 없이 외면해온 게 사실입니다. 아마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암흑소녀’ 역시 영원히 제 관심권에 들어올 가능성이 없었을 텐데, 다 읽은 후의 솔직한 소감은 “그동안 라노벨이란 포장 때문에 놓친 숨은 진주들이 얼마나 될까?”라는, 제 스스로도 예상 못한 탄식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 면에서는 별 5개도 부족한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미스터리나 반전의 힘이 허술하거나 미약한 것도 아닙니다. 흥미로운 미스터리가 포함된 단편집 ‘결혼기담’을 포함하여 한국에 소개된 아키요시 리카코의 모든 작품을 읽었지만 개인적으론 그녀의 최고작인 ‘성모’ 다음으로 추천할 만한, 재미와 미스터리와 반전이 잘 믹스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폐쇄적이고 엄격하지만 동시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미션계 여고라는 배경, 의사를 꿈꾸던 재원이자 극강의 외모와 카리스마로 학교 구성원들의 경외심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던 여학생의 의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문학동아리 멤버들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낭독회, 그것도 마치 관련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명탐정이 최종 결과를 발표하듯 각자 집필한 소설을 통해 범인을 지목하는 긴장감 넘치는 설정 등 라노벨과 미스터리의 풍성한 재료들이 흥미진진하게 배치돼있습니다.

소설이 발표될 때마다 앞서 발표된 소설의 추리를 뒤집는 진술이 등장하는데, 그 때문에 독자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누가 이츠미를 죽인 범인인지 마지막 소설이 발표될 때까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게 됩니다. 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엇이 들어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암흑전골을 떠먹으며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할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낭독을 듣는다는 설정은 거듭 ‘용의자’를 뒤바꿔가며 독자에게 스릴 넘치는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특히 인생의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시절, 누구보다도 정점에 서고 싶었던, 그래서 모두를 조연으로 내치고 홀로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10대 소녀들의 예민하고도 위험천만한 욕망과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저지른 치명적인 비밀과 거짓말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멤버들의 단편소설은 다 읽고 되돌아 생각해보면 지독한 악취만 느껴질 정도로 악의 그 자체에 가까워서 새삼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짜릿한 건 ‘반전의 여왕’이란 별명답게 작가가 막판에 터뜨리는 연이은 반전 폭탄들입니다. “여고생들끼리 주고받는 미스터리에 뭐가 있겠어?”라는 ‘라노벨 차별자’의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반전 폭탄들은 폼만 그럴듯하게 잡아놓고 억지만 가득 찬 결말을 내세운 일부 함량 부족 미스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성모’ 때문에 아키요시 리카코의 팬이 된 독자들도 아마 ‘암흑소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성모’ 이후의 미스터리들이 (기대치가 워낙 높아서 그랬겠지만) 고만고만했던데 반해, ‘암흑소녀’는 아키요시 리카코의 필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반전의 여왕’이라는 그녀의 별명이 단지 ‘성모’ 한 편 때문에 얻어진 게 아니란 걸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지금도 할인가 9천원에 판매 중인 ‘암흑소녀’는 충분히 제값을 하고도 남는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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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후루타 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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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오 출판사의 에이스 편집자 카에데는 어느 날 딸의 옷을 직접 제작하는 포스팅을 올려 인기를 얻고 있는 딸바보 아빠 ‘소라파파’의 블로그에 시니컬한 댓글을 남깁니다. “당신은 정말 아이를 사랑하나요?” 그런데 그날 이후 자신의 과거의 비밀이 담긴 일기장이 인터넷에 공개되고 댓글을 통해 지독한 공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한편 어린 딸을 본가에 맡긴 채 홀로 도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다나시마는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와 5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인 아내 미유키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의 유일한 행복은 딸을 위해 옷을 직접 만드는 것뿐. 하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자신의 블로그를 찾아와 집요한 비난 댓글을 다는 한 여자 때문에 격분하고 맙니다. 딸에 대한 사랑을 이기심으로 왜곡하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고 여긴 다나시마는 여자를 파멸에 몰아넣기로 결심합니다.

 

지금은 친절하고 수더분한 40대 순경 아저씨지만 한때 용의자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자백 전문 가노’라 불리며 현경 수사1과에서 맹활약했던 가노 라이타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연작단편집 ‘거짓의 봄’(한국 출간 2021년)으로 처음 알게 된 여성콤비 작가 후루타 덴의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고대하고 있던 ‘가노 라이터 시리즈’의 장편이 아니라서 아쉬웠지만, 데뷔 후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란 점과 독특한 표지 덕분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다양한 코드들이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막판에 거듭된 반전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는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심리스릴러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또 (뒤표지 카피대로) 인터넷과 SNS에서 횡행하는 ‘익명의 악의’가 어떤 식으로 파멸적 비극을 만들어내는지를 디테일하게 그린 사회파 장르물의 미덕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막판 반전이 돋보이는 미스터리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론 ‘탐욕스럽게 애정을 갈구하고 상처받을까 봐 두려운 나머지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구는 사람’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주제에 자존심이 세고 자기애로 똘똘 뭉친 사람’, 그리고 시기, 질투, 미움 같은 악의에 사로잡혀 상대를 망가뜨리려는 사람들이 벌이는 심리스릴러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14살에 겪은 비극으로 인해 어떻게든 과거를 삭제해버리고 싶은 나머지 스스로를 전혀 다른 사람, 즉,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강한 면모를 가진 사람으로 탈바꿈시키고 싶었던 카에데는 30대에 이르렀을 때 나름 그 목표를 이뤄냈다고 자부했지만, 사소한 댓글 하나에서 시작된 균열이 점차 사방으로 번지면서 일상을 무너뜨리자 공포에 휩싸입니다.

한편,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정성으로 간병하며 딸을 위해 직접 옷을 만드는 딸바보 다나시마 역시 그 내면에는 복잡다단한 심리가 뒤얽힌 인물입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는 공무원 일,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교차하는 아내와의 추억, 진짜 사랑인지 자신의 이기심의 산물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딸에 대한 감정, 그리고 가족들과의 불화 등 그의 삶에 평온함을 갖다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과거와 혼란스러운 현재 때문에 허우적대다가 무심결에 주고받기 시작한 ‘익명의 악의’로 인해 패닉에 빠지는 두 주인공 카에데와 다나시마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읽는 내내 미스터리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심리스릴러의 주인공으로 보였습니다. 또 그들의 과거와 현재에 큰 생채기를 남긴 이들이 가족 혹은 그만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더더욱 그들의 불안정을 부추겼는데, 이 역시 심리스릴러를 더욱 심도 있게 만든 요소입니다. 실제로 주인공들의 ‘책임’ 못잖게 사건의 도화선이 된 건 그들 주변 인물들의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악의였고,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론 ‘모두가 그녀를 죽였다’가 이 작품에 더 어울리는 제목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두 주인공이 펼치는 심리스릴러는 이 작품의 매력이자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사건 자체나 팩트보다는 일그러지고 왜곡된, 혹은 타인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심리적 혼란이 과도하게 강조되다 보니 “굳이 저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언행들이 자주 반복된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에 기대를 걸었던 독자에겐 두 주인공의 애매모호한 행보 때문에 다소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앞서 읽은 ‘거짓의 봄’과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에서 맛볼 수 있었던 후루타 덴의 필력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홀딱 빠질 정도는 아니라도 계속 관심을 갖고 신간소식을 기다리게 만든 건 분명한데, 다음에는 제가 고대하던 ‘가노 라이터 시리즈’의 장편(‘朝と夕の犯罪’, 일본 출간 2021년)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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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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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인 ‘침입자들’에서 범상치 않은 45살 택배기사 행운으로 등장하여 시니컬한 매력과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전직 용병 K. 과거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던 그는 한때 전 세계를 함께 누볐던 동료 안나로부터 5년 만에 부탁 전화를 받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K가 도착한 곳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듯한 작은 어촌마을에 자리한 러시아풍의 저택. 그런데 안나를 만난 K는 예상했던 것과 달리 소박하기만 한 안나의 부탁에 놀랍니다. 자신의 동생 이레네와 조카 마리를 이 이상한 마을에서 데리고 나가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저택의 노부인과 그녀의 망나니 손자들이 벌일 유혈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듣곤 깊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결국 안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K는 다른 용병들과 함께 저택에 머물며 특유의 냉소와 무관심으로 가장한 채 피비린내가 진동할 전쟁을 준비합니다.

 

‘파괴자들’에 앞서 출간된 ‘침입자들’을 먼저 읽은 이유는 같은 주인공의 활약을 그린 시리즈물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침입자들’에서 그저 묵묵히 노동에만 전념하는 말수 적은 택배기사 같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지닌 것으로 보였던 그는 단지 자신이 맡은 구역이 행운동이라는 이유만으로 작품 내내 ‘행운’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침입자들’이 택배기사로 일하며 자신 못잖게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과 인연을 맺고 다양한 사건을 겪는 행운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후속작인 ‘파괴자들’은 행운이 과거의 자신, 즉 용병 K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야말로 피와 살이 난무하는 한바탕 전쟁에 참여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듯한 작은 어촌마을, 그곳에 생뚱맞게 자리 잡은 러시아풍 저택, 그리고 치외법권 지역이라도 되는 듯 마약, 매춘, 도박을 통해 자신들만의 왕국을 이끌고 있는 노부인과 손자들, 거기에다 그들에게 고용된 무자비한 글로벌 용병들.

K가 한바탕 전쟁을 준비하는 공간은 다소 판타지에 가깝게 설정돼있긴 하지만, 그곳을 채우고 있는 인물들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자체가 워낙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조금도 위화감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특히 이미 세 차례의 전쟁으로 숱한 피비린내를 겪고도 네 번째 최후의 전쟁을 준비 중인 노부인과 세 손자들 사이의 긴장감과 함께 그들에게 고용된 용병들 사이의 속고 속이는 두뇌싸움, 그리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상을 저지르는 무자비함은 마치 영화로 보는 듯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독자 입장에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쉼 없이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K의 본색과 능력을 알아본 노부인과 세 손자들이 어떻게든 K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거액을 베팅하거나 협박을 일삼기도 하지만 오로지 K는 안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데만 열중할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침입자들’에서도 익히 본 적 있는 K만의 특유의 비아냥과 냉소와 썩은 유머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물론 조금의 자비심이나 주저함도 없는 어마어마한 폭력 재능 역시 독자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을 만큼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그려지는데, 그가 과거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을 박살내고 얻은 별명 ‘아미고 델 디아블로’(악마의 친구)의 진가를 확인시켜주는 흥분지수 만점의 대목들이기도 합니다.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대규모 유혈 전쟁도 짜릿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용병들의 잇따른 반전입니다. 그야말로 “용병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이 반전들은 자칫 애매한 권선징악으로 끝날 수도 있던 이야기를 묵직하고 비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전작인 ‘침입자들’의 서평에서 주인공 행운의 입을 빌린 작가의 지적 허영이 과도했다는 쓴소리를 한 적 있는데, 다행히도 ‘파괴자들’의 K에게선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이야기에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침입자들’에서 맛봤던 작가의 필력이 단발성이 아니란 점, 또 그가 오마주를 바친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대가 켄 브루언의 매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 만족스런 책읽기가 됐습니다. (저는 켄 브루언의 작품들에게 높은 평점을 주진 못했지만 그의 냉소적이다 못해 신랄한 문장들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작가가 앞으로 K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주인공을 창조하더라도 “한국형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신세계를 개척했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앞으로도 자신만의 특화된 장르에 더욱 공을 들여주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액션 스릴러 혹은 누아르에 관한 한 ‘뜨거운 피’의 김언수, ‘방의강 시리즈’의 방진호에 이어 신작 소식을 기다리게 만든 한국 장르물의 기대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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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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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한 장을 넘겼을 때 재미가 없다면 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 장을 넘겼다면 분명 오늘이 가기 전에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될 거라고 자신한다.”

 

말 그대로 자신감 넘치는 출판사 소개글의 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습니다. 과거를 꽁꽁 숨긴 채 고된 택배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45살 남자 ‘행운’이 주인공입니다. 그가 맡은 구역이 행운동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범상치 않은 이력과 함께 심연과도 같은 깊은 상처를 품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단 몇 조각의 단서만 주어질 뿐 독자는 그의 본명은 물론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기에 비아냥 가득한 말장난과 썩은 농담으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는 것인지, 또 도대체 어떤 이력을 지녔기에 문(文)과 무(武)는 물론 예술과 영화와 팝음악에 이르기까지 가히 통달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끝까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행운이 과거의 어느 지점 – 아마도 그가 백지처럼 지워버리고 싶었던, 하지만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는 떡밥을 남겨놓음으로써 후속작에서 이어질 그의 행보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만 어마어마하게 부풀려놓습니다.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2021년에 출간된 ‘파괴자들’에 관심을 가진 덕분입니다. 소개글을 잠깐 훑어보니 제가 좋아하는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제멋대로 이름 붙이자면 ‘희대의 공처가이자 무적의 살인청부업자 방의강의 하드보일드 시니컬 액션스릴러’쯤 됩니다.)와 닮은꼴처럼 보였고, 알고 보니 주인공 K의 택배기사 시절을 다룬 ‘침입자들’이라는 전작이 있다기에 순서대로 읽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인터넷서점에서는 ‘추리/미스터리’로 분류해놓았지만 실은 스릴러로 분류될 작품입니다. 하지만 하위 장르까지 따지면 딱히 ‘이것’이라고 명명하기가 마땅치 않습니다. 약간의 액션과 납치극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거친 노동과 중독 수준의 알코올과 장서가 수준의 독서에만 몰두하는 비밀 가득한 한 남자가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비밀을 털어놓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맺는 다채로운 관계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음험하기도, 냉소적이기도, 친절하기도, 소심하기도 한 복잡미묘한 행운의 캐릭터 자체는 하드보일드 스릴러와 아주 잘 어울려 보여서 피와 살이 난무하기는커녕 대부분 택배기사의 고달픈 일상으로 채워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행운은 대놓고 철벽을 쳐놓은 45살의 택배기사인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대체로 멀쩡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인데,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매일 같은 자리에서 멍 때리다가 행운만 나타나면 담배 한 개비를 요구하는 우울증 환자, 경찰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헛소리만 떠벌리는 동네 바보, 난데없이 나타나 행운에게 경제철학 강의를 늘어놓는 노망난 노교수, 은밀한 눈빛으로 그를 유혹하는 게이 바 직원, 빈곤과 가난의 중간에서 삶을 저울질하는 폐지 줍는 소녀가 그들입니다. 가끔 칼을 품은 양복쟁이들도 등장하고, 별 일 아닌 일만 해줘도 거액을 주겠다며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선의의 침입자’도 있고 ‘악의를 숨긴 침입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행운에게는 그들의 사연과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모두 침입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은 그들의 침입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줍니다. 때론 거칠게 부딪히기도 하지만 때론 스스로도 모를 이유로 그들을 감싸주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택배기사로서 고된 시간들을 보내며 다양한 인연들을 맺었던 행운은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어디론가 떠나려는 모습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립니다. 아마도 후속작인 ‘파괴자들’은 그렇게 떠난 행운이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또다시 과거의 K로 살아가는 이야기와 함께 꽁꽁 감춰진 그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룰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쩌면 제가 좋아하는 ‘하드보일드 시니컬 액션스릴러’가 제대로 터져줄 것 같아 나름 기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좀 길지만 쓴 소리 한마디만 꼭 하고 싶은데(재미있게 읽고도 별 1개를 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학, 영화, 그림, 사진, 음악, 심지어 경제와 수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묘사되는 행운의 과도한 천재성 때문에 읽는 내내 짜증을 넘어 화가 나기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두세 번이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요하듯 반복된 행운의 ‘올 라운드 천재성’은 실은 작가의 지적 허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대목부터는 “OOO는 이렇게 말했지.”라는 문장만 보이면 아예 그 문단을 통째로 건너뛰곤 했습니다. 작가 스스로 인정한 켄 브루언과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오마주까지는 괜찮았지만, 적정선을 넘어 잘난 척으로밖에 안 보인 인용들은 오히려 행운의 캐릭터를 훼손시킬 뿐이었습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지적 허영을 반복할 생각이라면 그것이 곧 자신의 소설을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작가 스스로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인공 행운이라면 그런 식으로 ‘잘난 척’을 일삼는 인물에게 과연 어떤 냉소 섞인 비아냥을 보낼까, 생각해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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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독자
막스 세크 지음, 한정아 옮김 / 청미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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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헬싱키의 고급 주택가에서 베스트셀러 작가 로저 코포넨의 아내 마리아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검은 드레스와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채 발견된 그녀는 ‘조커’처럼 기괴하게 웃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현장 수사관들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더더욱 놀라운 건 범행수법이 로저의 베스트셀러인 ‘마녀사냥’에 묘사된 것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이후 책 내용을 모방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헬싱키 경찰은 그저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담당 형사인 제시카 니에미는 중세 마녀사냥을 연상시키는 살해수법, 일부러 정보를 흘리는 듯한 범인의 기이한 행태, 흑발의 젊은 여성이란 것 외엔 공통점이 없는 희생자 등 난해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 속에서 명백히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지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당혹감에 빠지고 맙니다.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핀란드 스릴러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서 특별히 더 관심을 가진 작품입니다. 산타클로스의 고향에 걸맞게 핀란드는 눈으로 뒤덮인 한겨울 풍경 외엔 달리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는데, ‘모방 독자’는 그 이미지 가운데 차갑고 어두운 면만 뚝 떼어내 옮겨놓은 듯 폭설, 얼음바다, 강풍 등 스산한 분위기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마녀사냥’ 3부작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로저 코포넨의 아내 마리아를 시작으로 검은 머리의 젊은 여성들이 책 속에 묘사된 수법 그대로(혹은 비슷하게) 연이어 살해당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과 단서들은 하나 같이 비현실적인 기괴함 혹은 신비주의나 사탄주의의 악취를 풍기고 있어서 담당 형사 제시카 니에미를 비롯한 수사진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시신들은 (대부분) 똑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독살, 화형, 익사, 압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돼서 도무지 범인의 동기나 희생자 선정 방식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듭니다.

사건과 함께 나란히 전개되는 이야기는 주인공 제시카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15년 전에 그녀가 베네치아에서 겪은 끔찍한 악몽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 섞인 기억,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도저히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없었던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상실의 자리를 메우고자 향했던 베네치아에서의 4개월간의 악몽 등 제시카는 유능한 강력계 형사라는 외피 속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속 수법을 모방한 잔혹한 연쇄살인, 중세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이상학적 코드들(마녀사냥, 신비주의, 사탄숭배, 정신이상 등), 그리고 매력적이지만 몸과 마음이 상처로 가득한 주인공 등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들이 포진돼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것은 몇몇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가장 큰 것은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입니다. 다분히 북유럽 스릴러다운 설정이긴 하지만 어느 한 곳 공감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범인의 ‘마지막 메시지’는 기괴함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질적인 북유럽의 문화적 충격이라도 만끽했다면 그나마 조금은 보람이 있었을 텐데 그 역시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다음으론 주인공 제시카의 캐릭터인데, 작가는 초반부터 “그녀는 무척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반복적으로 묘사되던 ‘제시카의 고통’은 뒤늦게 그녀가 6살에 겪은 가족의 해체와 15년 전에 겪은 베네치아에서의 악몽을 통해 부연설명됩니다. 제시카의 과거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 걸 보면 그녀의 ‘고통’이 현재 벌어진 사건과 관련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에도 그녀의 ‘고통’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연쇄살인사건 스토리와 분리된 듯 ‘따로국밥’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없어선 안 될 설정이지만 너무 과도한 분량과 비중을 차지한 나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납득하기 힘든 범인의 동기와 더 납득하기 힘든 주인공의 캐릭터가 접점을 이루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이 다소 허무하게 보인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 작품을 극찬한 번역가와 인터넷서점 서평란에 별 5개를 준 많은 독자들처럼 취향만 잘 맞는다면 ‘모방 독자’는 사건 자체나 제시카의 캐릭터, 범인의 기괴한 범행동기 등 모든 면에서 충분히 열광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소수의견일 가능성이 무척 높지만) 개인적으론 핀란드의 스산하고 지독한 한겨울의 풍경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대목을 찾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가혹한 기후와 자연환경이 지배하는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이런 소재와 설정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도, 또 대박을 위한 필수조건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저 같은 성향의 한국 독자에게 어필하기에는 ‘산타클로스’만큼이나 현실감이 부족해 보인다는 게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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