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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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인 침입자들에서 범상치 않은 45살 택배기사 행운으로 등장하여 시니컬한 매력과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전직 용병 K. 과거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던 그는 한때 전 세계를 함께 누볐던 동료 안나로부터 5년 만에 부탁 전화를 받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K가 도착한 곳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듯한 작은 어촌마을에 자리한 러시아풍의 저택. 그런데 안나를 만난 K는 예상했던 것과 달리 소박하기만 한 안나의 부탁에 놀랍니다. 자신의 동생 이레네와 조카 마리를 이 이상한 마을에서 데리고 나가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저택의 노부인과 그녀의 망나니 손자들이 벌일 유혈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듣곤 깊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결국 안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K는 다른 용병들과 함께 저택에 머물며 특유의 냉소와 무관심으로 가장한 채 피비린내가 진동할 전쟁을 준비합니다.

 

파괴자들에 앞서 출간된 침입자들을 먼저 읽은 이유는 같은 주인공의 활약을 그린 시리즈물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침입자들에서 그저 묵묵히 노동에만 전념하는 말수 적은 택배기사 같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지닌 것으로 보였던 그는 단지 자신이 맡은 구역이 행운동이라는 이유만으로 작품 내내 행운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침입자들이 택배기사로 일하며 자신 못잖게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과 인연을 맺고 다양한 사건을 겪는 행운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후속작인 파괴자들은 행운이 과거의 자신, 즉 용병 K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야말로 피와 살이 난무하는 한바탕 전쟁에 참여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듯한 작은 어촌마을, 그곳에 생뚱맞게 자리 잡은 러시아풍 저택, 그리고 치외법권 지역이라도 되는 듯 마약, 매춘, 도박을 통해 자신들만의 왕국을 이끌고 있는 노부인과 손자들, 거기에다 그들에게 고용된 무자비한 글로벌 용병들.

K가 한바탕 전쟁을 준비하는 공간은 다소 판타지에 가깝게 설정돼있긴 하지만, 그곳을 채우고 있는 인물들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자체가 워낙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조금도 위화감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특히 이미 세 차례의 전쟁으로 숱한 피비린내를 겪고도 네 번째 최후의 전쟁을 준비 중인 노부인과 세 손자들 사이의 긴장감과 함께 그들에게 고용된 용병들 사이의 속고 속이는 두뇌싸움, 그리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상을 저지르는 무자비함은 마치 영화로 보는 듯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독자 입장에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쉼 없이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K의 본색과 능력을 알아본 노부인과 세 손자들이 어떻게든 K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거액을 베팅하거나 협박을 일삼기도 하지만 오로지 K는 안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데만 열중할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침입자들에서도 익히 본 적 있는 K만의 특유의 비아냥과 냉소와 썩은 유머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물론 조금의 자비심이나 주저함도 없는 어마어마한 폭력 재능 역시 독자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을 만큼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그려지는데, 그가 과거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을 박살내고 얻은 별명 아미고 델 디아블로’(악마의 친구)의 진가를 확인시켜주는 흥분지수 만점의 대목들이기도 합니다.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대규모 유혈 전쟁도 짜릿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용병들의 잇따른 반전입니다. 그야말로 용병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이 반전들은 자칫 애매한 권선징악으로 끝날 수도 있던 이야기를 묵직하고 비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전작인 침입자들의 서평에서 주인공 행운의 입을 빌린 작가의 지적 허영이 과도했다는 쓴소리를 한 적 있는데, 다행히도 파괴자들K에게선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이야기에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침입자들에서 맛봤던 작가의 필력이 단발성이 아니란 점, 또 그가 오마주를 바친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대가 켄 브루언의 매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 만족스런 책읽기가 됐습니다. (저는 켄 브루언의 작품들에게 높은 평점을 주진 못했지만 그의 냉소적이다 못해 신랄한 문장들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작가가 앞으로 K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주인공을 창조하더라도 한국형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신세계를 개척했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앞으로도 자신만의 특화된 장르에 더욱 공을 들여주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액션 스릴러 혹은 누아르에 관한 한 뜨거운 피의 김언수, ‘방의강 시리즈의 방진호에 이어 신작 소식을 기다리게 만든 한국 장르물의 기대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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