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소녀 - Novel Engine POP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정은주 옮김, 치런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명문 세이보 여고 경영자의 딸이자 뛰어난 미모와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3학년생 시라이시 이츠미가 학교 화단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원인은 추락사. 사인도 범인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츠미가 이끌던 문학동아리 멤버 6명은 학기말 정기모임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낭독회로 대체합니다. ‘아름다운 소녀 이츠미의 죽음을 테마로 각자 단편소설을 쓴 뒤 직접 발표하기로 한 것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오랜 전통대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갖고 온 재료 외엔 무엇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암흑전골을 나눠 먹는 가운데 멤버들은 세이보 여고의 비너스이츠미와 자신이 맺었던 빛나던 인연과 아름다운 추억담을 그린 소설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는 자신만의 추리로 장식합니다. 이츠미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지목한다는 뜻인데, 문제는 지목된 범인이 모두 제각각이란 점입니다.

 

고백하자면, 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라노벨로 분류된 작품들은 미스터리 서사가 담겨있더라도 조금의 미련도 없이 외면해온 게 사실입니다. 아마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암흑소녀역시 영원히 제 관심권에 들어올 가능성이 없었을 텐데, 다 읽은 후의 솔직한 소감은 그동안 라노벨이란 포장 때문에 놓친 숨은 진주들이 얼마나 될까?”라는, 제 스스로도 예상 못한 탄식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 면에서는 별 5개도 부족한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미스터리나 반전의 힘이 허술하거나 미약한 것도 아닙니다. 흥미로운 미스터리가 포함된 단편집 결혼기담을 포함하여 한국에 소개된 아키요시 리카코의 모든 작품을 읽었지만 개인적으론 그녀의 최고작인 성모다음으로 추천할 만한, 재미와 미스터리와 반전이 잘 믹스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폐쇄적이고 엄격하지만 동시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미션계 여고라는 배경, 의사를 꿈꾸던 재원이자 극강의 외모와 카리스마로 학교 구성원들의 경외심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던 여학생의 의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문학동아리 멤버들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낭독회, 그것도 마치 관련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명탐정이 최종 결과를 발표하듯 각자 집필한 소설을 통해 범인을 지목하는 긴장감 넘치는 설정 등 라노벨과 미스터리의 풍성한 재료들이 흥미진진하게 배치돼있습니다.

소설이 발표될 때마다 앞서 발표된 소설의 추리를 뒤집는 진술이 등장하는데, 그 때문에 독자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누가 이츠미를 죽인 범인인지 마지막 소설이 발표될 때까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게 됩니다. ,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엇이 들어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암흑전골을 떠먹으며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할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낭독을 듣는다는 설정은 거듭 용의자를 뒤바꿔가며 독자에게 스릴 넘치는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특히 인생의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시절, 누구보다도 정점에 서고 싶었던, 그래서 모두를 조연으로 내치고 홀로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10대 소녀들의 예민하고도 위험천만한 욕망과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저지른 치명적인 비밀과 거짓말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멤버들의 단편소설은 다 읽고 되돌아 생각해보면 지독한 악취만 느껴질 정도로 악의 그 자체에 가까워서 새삼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짜릿한 건 반전의 여왕이란 별명답게 작가가 막판에 터뜨리는 연이은 반전 폭탄들입니다. “여고생들끼리 주고받는 미스터리에 뭐가 있겠어?”라는 라노벨 차별자의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반전 폭탄들은 폼만 그럴듯하게 잡아놓고 억지만 가득 찬 결말을 내세운 일부 함량 부족 미스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성모때문에 아키요시 리카코의 팬이 된 독자들도 아마 암흑소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성모이후의 미스터리들이 (기대치가 워낙 높아서 그랬겠지만) 고만고만했던데 반해, ‘암흑소녀는 아키요시 리카코의 필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반전의 여왕이라는 그녀의 별명이 단지 성모한 편 때문에 얻어진 게 아니란 걸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지금도 할인가 9천원에 판매 중인 암흑소녀는 충분히 제값을 하고도 남는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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