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 독자
막스 세크 지음, 한정아 옮김 / 청미래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핀란드 헬싱키의 고급 주택가에서 베스트셀러 작가 로저 코포넨의 아내 마리아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검은 드레스와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채 발견된 그녀는 조커처럼 기괴하게 웃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현장 수사관들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더더욱 놀라운 건 범행수법이 로저의 베스트셀러인 마녀사냥에 묘사된 것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이후 책 내용을 모방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헬싱키 경찰은 그저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담당 형사인 제시카 니에미는 중세 마녀사냥을 연상시키는 살해수법, 일부러 정보를 흘리는 듯한 범인의 기이한 행태, 흑발의 젊은 여성이란 것 외엔 공통점이 없는 희생자 등 난해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 속에서 명백히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지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당혹감에 빠지고 맙니다.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핀란드 스릴러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서 특별히 더 관심을 가진 작품입니다. 산타클로스의 고향에 걸맞게 핀란드는 눈으로 뒤덮인 한겨울 풍경 외엔 달리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는데, ‘모방 독자는 그 이미지 가운데 차갑고 어두운 면만 뚝 떼어내 옮겨놓은 듯 폭설, 얼음바다, 강풍 등 스산한 분위기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마녀사냥’ 3부작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로저 코포넨의 아내 마리아를 시작으로 검은 머리의 젊은 여성들이 책 속에 묘사된 수법 그대로(혹은 비슷하게) 연이어 살해당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과 단서들은 하나 같이 비현실적인 기괴함 혹은 신비주의나 사탄주의의 악취를 풍기고 있어서 담당 형사 제시카 니에미를 비롯한 수사진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시신들은 (대부분) 똑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독살, 화형, 익사, 압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돼서 도무지 범인의 동기나 희생자 선정 방식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듭니다.

사건과 함께 나란히 전개되는 이야기는 주인공 제시카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15년 전에 그녀가 베네치아에서 겪은 끔찍한 악몽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 섞인 기억,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도저히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없었던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상실의 자리를 메우고자 향했던 베네치아에서의 4개월간의 악몽 등 제시카는 유능한 강력계 형사라는 외피 속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속 수법을 모방한 잔혹한 연쇄살인, 중세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이상학적 코드들(마녀사냥, 신비주의, 사탄숭배, 정신이상 등), 그리고 매력적이지만 몸과 마음이 상처로 가득한 주인공 등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들이 포진돼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것은 몇몇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가장 큰 것은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입니다. 다분히 북유럽 스릴러다운 설정이긴 하지만 어느 한 곳 공감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범인의 마지막 메시지는 기괴함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질적인 북유럽의 문화적 충격이라도 만끽했다면 그나마 조금은 보람이 있었을 텐데 그 역시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다음으론 주인공 제시카의 캐릭터인데, 작가는 초반부터 그녀는 무척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반복적으로 묘사되던 제시카의 고통은 뒤늦게 그녀가 6살에 겪은 가족의 해체와 15년 전에 겪은 베네치아에서의 악몽을 통해 부연설명됩니다. 제시카의 과거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 걸 보면 그녀의 고통이 현재 벌어진 사건과 관련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에도 그녀의 고통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연쇄살인사건 스토리와 분리된 듯 따로국밥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없어선 안 될 설정이지만 너무 과도한 분량과 비중을 차지한 나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납득하기 힘든 범인의 동기와 더 납득하기 힘든 주인공의 캐릭터가 접점을 이루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이 다소 허무하게 보인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 작품을 극찬한 번역가와 인터넷서점 서평란에 별 5개를 준 많은 독자들처럼 취향만 잘 맞는다면 모방 독자는 사건 자체나 제시카의 캐릭터, 범인의 기괴한 범행동기 등 모든 면에서 충분히 열광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소수의견일 가능성이 무척 높지만) 개인적으론 핀란드의 스산하고 지독한 한겨울의 풍경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대목을 찾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가혹한 기후와 자연환경이 지배하는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이런 소재와 설정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도, 또 대박을 위한 필수조건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저 같은 성향의 한국 독자에게 어필하기에는 산타클로스만큼이나 현실감이 부족해 보인다는 게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결론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찰리 돈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식적으로는 시카고경찰서 특수조사팀 소속이지만 실은 프리랜서나 다름없는 범죄 재구성 전문가로리 무어. 번아웃과 우울증 때문에 6개월 넘게 잠수를 타던 그녀는 갑작스레 사망한 변호사 아버지가 남긴 업무를 떠맡게 되는데, 그 가운데 로리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가석방을 코앞에 둔 일명 도적에 관한 것입니다. 40년 전 연쇄납치살인마로 지목됐지만 시신도 없고 단서도 없이 정황증거만으로 60년 형을 선고받았던 도적의 가석방은 언론마저 주목하는 사안인데, 로리로서는 아버지가 왜 그 오랜 시간동안 도적같은 자를 변호하며 적잖은 돈을 받아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도적의 과거 자료 속에 등장하는 미지의 여인 때문에 로리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집니다. 40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터넷과 과학수사 없이 거의 완벽한 범죄의 재구성을 이뤄내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찰리 돈리가 창조한 독특한 커플 주인공 로리 무어와 레인 필립스는 이미 수어사이드 하우스’(20211)를 통해 한국 독자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원작 출간순서로는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가 먼저입니다.) 10년째 연인이지만 결혼 따윈 생각하지 않는 두 사람은 각각 최고의 범죄 재구성 전문가, 최고의 법정-범죄심리학자로 공인받은 인물들입니다. 특히 메인 주인공인 로리 무어의 캐릭터는 워낙 독특해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지독한 자폐, 강박, 편집증은 30대 중후반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악수 같은 간단한 스킨십조차 거부하는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갑옷 차림 - 두꺼운 뿔테안경, 이마까지 내려쓴 비니, 턱 밑까지 단추를 채운 회색 코트, 전투적 분위기를 내뿜는 컴뱃 부츠 으로 세상과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했던 유년의 상처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엄청난 집중력과 정보 분석력, 그리고 사건을 재구성해 진실을 캐내는 힘의 원천이 돼줬습니다. 전직 FBI 프로파일러이자 범죄심리학자인 연인 레인과의 협업 외엔 오롯이 홀로 모든 작업을 진행하는 로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보기에는 산발적이고 상관없는 것들을 연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카고경찰서 살인전담반장 론 데이비슨이 그 누구의 간섭도 거부하는 천방지축로리를 내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품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발군의 재능과 이미 수차례 입증된 뛰어난 실적 때문입니다.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는 여러 면에서 수어사이드 하우스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비극들이 우연처럼 또는 운명적으로 한꺼번에 충돌하며 사건들을 빚어낸다는 점, 또 등장인물, 시공간, 사건 모두 다소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독자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특히 어지간한 스릴러 작가라면 못 해도 600페이지 안팎의 분량을 쏟아내고도 남을 소재와 서사를 400페이지 미만의 분량에 욱여넣은 탓에이야기는 단 한 줄도 설렁설렁 넘길 수 없게끔 정교하고 빽빽하게 구축돼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스릴감도 대단하고 재미나 반전 역시 매력이 철철 넘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979년 시카고를 공포에 빠뜨린 20대 여성 연쇄실종사건에 집착하는 자폐증 환자 앤절러의 이야기와 함께 40년 후인 2019, 살인범 도적의 가석방 절차를 떠맡게 된 로리의 이야기가 교차로 전개됩니다. 뭐든 한 번 꽂히면 통제불능 수준에 빠지고 마는 집착 덕분에 연쇄실종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는 앤젤러의 이야기가 심리-호러-범죄 스릴러를 골고루 겸비한 서사라면, 아버지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40년 전의 진실을 추적하는 로리의 이야기는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미스터리의 힘을 발산합니다. 과연 앤절라는 40년 전 제대로 된 진실을 파헤친 것인지, 그렇다면 성실한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왜 도적을 감싸온 것인지, ‘도적은 정말 가석방될 만큼 죄를 뉘우친 것인지 등이 로리에게 주어진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들입니다.

 

짧게는 1~2페이지, 길어도 10페이지 남짓하게 짧게 끊어진 챕터들은 안 그래도 빠른 속도감을 몇 배는 더 가속시켰는데, 덕분에 화장실 갈 틈도 없이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수어사이드 하우스보다 재미와 힘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라 느껴졌는데, 특히 여러 주인공 중 한 자리 정도를 차지하는데 불과해서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수어사이드 하우스와 달리 거의 원맨쇼에 가까운 폭주를 보여준 로리는 그녀 자신의 캐릭터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빛나게 한 일등공신이라는 생각입니다.

 

2021년에만 한국에 두 편의 작품이 소개된 찰리 돈리는 이제 막 중견으로 발돋움하려는 단계의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존을 검색해보면 ‘Summit Lake’, ‘The Girl Who Was Taken’, ‘Don't Believe It’, ‘Twenty Years Later’ 등의 작품이 나오는데, 대부분 로리와 레인이 등장하진 않는 것 같지만, 그와 관계없이 가능하다면 원작 출간순서대로, 그게 어렵다면 뒤죽박죽이라도 좋으니 2022년에도 그의 작품을 꼭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찰리 돈리의 매력적인 스릴러라면 언제든지 환영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상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이혁재 옮김 / 더이은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2008살인 방관자의 심리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가 2021년 개정판이 나온 건데, 초판의 경우 각 수록작의 제목들을 원제와 무관하게 의역한데다, 원작과 달리 엉뚱한 작품을 표제작으로 내세운 바람에 개정판과 서로 다른 작품으로 오인할 여지가 많습니다.)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된 경찰소설의 대가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집입니다. 비록 경찰(혹은 사법기관)이 등장하진 않지만 깊고 묵직한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는 수작입니다. 제목인 진상은 수록된 작품 중 한 편의 제목이지만 실은 모든 수록작들을 아우르는 화두이자 주제이기도 합니다. 다섯 작품 모두 과거와 현재에 걸쳐 벌어진 참혹하고 안타까운 비극을 다루고 있는데, 그 비극들은 하나같이 고의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교묘히 은폐된 진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늦게 드러난 그 진상은 사건 관련자 모두에게 후련함이나 속 시원한 엔딩보다는 더욱 더 고통스러운 상처와 암울한 미래를 남겨놓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과자라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집주인에게 쫓겨나 길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선의 덕분에 집이라는 안식처를 얻게 되지만 숙명처럼 다시 찾아온 불행에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타인의 집), 전도유망한 공무원 자리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자체장 선거에 나섰지만 14년 전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18번 홀), 아들을 살해한 범인이 10년 만에 체포됐다는 소식에 오히려 회한과 비통함에 빠진 아버지가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뒤 오히려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드는 이야기(진상), 정리해고 당한 뒤 불법 아르바이트로 위태로운 삶을 유지하던 한 남자가 방화 살인사건에 연루되면서 겪게 되는 아이러니하고도 서글픈 이야기(불면), 대학시절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체육부 합숙과정에서 친구를 잃은 남자들이 12년이 지나서야 마주치게 되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에 대한 이야기(꽃다발 바다) 등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동안 읽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들은 장편(‘64’, ‘그림자밟기’, ‘빛의 현관’, ‘사라진 이틀’, ‘클라이머즈 하이’)의 경우 사건과 서사는 무척 묵직하고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깊은 여운과 따뜻한 감동도 함께 남겨준 반면, 단편집(‘얼굴()’, ‘종신검시관’)은 경찰(혹은 사법기관 종사자)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다소 가볍고 읽기 편한 느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상은 일반인들이 주인공을 맡고 있긴 해도 각각 전과자, 살인 은폐자, 살인사건 유족, 정리해고자, 학폭 피해자 등 어두운 과거를 지닌 캐릭터들인데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날수록 오히려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 세례라도 받은 양 더욱 더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그의 어느 장편보다도 무겁고 스산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 중 뒷맛이 가장 씁쓸했다고나 할까요? 물론 미스터리의 재미와 긴장감은 그에 못잖게 대단하지만 말입니다.

 

개정판을 제외하고 한국에 출간된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은 모두 12편입니다. 아직 읽지 못한 4편 가운데 루팡의 소식3의 시효는 책장에 오랫동안 방치해놓은 상태인데, 게을러서라기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나중에 먹으려고 일부러 아껴둔, 그런 심정으로 방치해놓은 게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신간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면 아까워서라도 기약 없이 계속 방치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작품들이 한 편이라도 더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간 미스터리 2021.겨울호 - 72호
계간 미스터리 편집부 지음 / 나비클럽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름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광팬이라 자처하면서도 그 분야를 다룬 평론이나 문예지 혹은 장르물 잡지를 읽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뭐랄까, 어렵고 학구적일 거란 선입견도 작용했고, 직접 읽은 작품의 후반부에 실린 해설이라면 모를까, 광범위하고 원론적인 주제에 대한 전문가의 식견은 그리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를 접하게 된 건 순전히 제가 가입한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를 소개한 글이 실렸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긴 분량은 아니지만 종종 서평도 올리고 댓글도 자주 달곤 하는 카페의 이모저모를 소개한 내용은 제법 흐뭇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카페 소개글 외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270여 페이지의 분량 안에 담긴 다양한 글들을 읽으면서 내심 놀랐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특히 여성 캐릭터 리부트라는 제목 하에 실린 죽어야 하는 여자들’(듀나), ‘추리 소설의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한이)는 그동안 장르물을 읽으면서 여러 번 생각했던 바를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어서 무척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살해 혹은 고문당하는 장면조차 관음증의 대상으로 여겨진 여성 캐릭터의 문제라든가 그것을 고의적으로든 무의식으로든 애용해온 작가들의 태도, 그리고 마초 주인공이 날뛰던 하드보일드 시대에 더욱 저급한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한 여성 캐릭터에 대한 고찰 등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한 내용들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신인상 수상작’, ‘단편소설’, ‘특별 초청작’, ‘미니픽션’,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트릭의 재구성등 다채로운 미스터리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는데, “확실하게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단편 혹은 미니픽션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작품도 꽤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름 돋을 정도로 잔인하지만 동시에 정갈하기(?) 짝이 없는 소시오패스를 그린 인간을 해부하다’(류성희)는 장편으로의 확장이 기대되는 작품이었고,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소재인 장기 기증을 일종의 복수코드와 접목시킨 토요일의 예고 살인’(황세연)은 비록 미스터리 자체는 평범했지만 설정 자체가 매력적이라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 마니아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소심한 욕심을 품기 마련인데, 수록된 미스터리 작품들을 보며 그런 욕심이 조금은 더 생긴 게 사실입니다. 물론 타고난 재능도 없고 연마한 필력도 없으니 그저 소박한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어쩌면 계간 미스터리덕분에 무모한(?) 도전에 나서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처음 접한 미스터리 전문 잡지의 독특한 재미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과월호도 찾아보고 싶어졌고 앞으로 나올 신간들 역시 그 목차를 눈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미스터리의 탄탄한 토대를 위해, 또 화수분처럼 재능 있는 한국 장르물 작가들의 산실로서 앞으로도 계간 미스터리가 늘 건승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동생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3, 워싱턴 주의 소도시 시더 그로브에서 18살 세라가 실종된 직후 인근에 사는 성범죄 전과자 에드먼드가 체포됩니다. 세라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에드먼드는 정황증거만으로 1급 살인죄와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어느 날, 세라의 유골이 발견되자 동생의 실종 이후 한시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애틀경찰국 강력계 형사 트레이시 크로스화이트는 그동안 자신이 품어왔던 의심이 사실이라고 확신하며 주위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라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20년 전 빈약했던 정황증거와 석연치 않은 법정공방 끝에 에드먼드의 유죄를 이끌어낸 건 다름 아닌 트레이시 자매의 아버지, 시더 그로브의 보안관, 그리고 검사와 변호사 등이었는데, 트레이시의 눈에는 그들이 뭔가를 감추고 있으며 어쩌면 진범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내 동생의 무덤은 다채로운 장르가 잘 버무려진 스릴러입니다. 20년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치열한 미스터리+법정 스릴러이자 시애틀경찰국 최초의 여성 강력계 형사의 거침없는 활약을 그린 형사물이며, 동생을 잃고 가족이 붕괴된 뒤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온 평범한 한 여성의 비극을 그린 가족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세라의 죽음의 진실을 찾으려는 트레이시의 여정은 가시밭길 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첫 과제가 20년 전 아버지와 보안관을 비롯한 모든 사법기관이 범인으로 지목한 잔혹한 성범죄 전과자 에드먼드가 무죄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 때문인데, 그로 인해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시더 그로브 사람들은 트레이시에게 차갑고 냉정한 시선만 보낼 뿐이며, 당시 수사를 맡았던 노회한 보안관 캘러웨이는 노골적으로 트레이시의 행보를 막아섭니다. 더불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트레이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애틀경찰국 수사국장의 압박까지 더해져 트레이시의 운신의 폭은 극도로 불리한 지경에 처합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트레이시의 지원군이 돼준 건 어린 시절 친구이자 지금은 변호사가 된 댄 올리리입니다. 그녀의 의심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댄은 당시 에드먼드를 유죄로 몰아간 자들의 행동과 법정에서 거론된 증거들을 재조사한 뒤 공식적인 재심 절차에 돌입합니다.

 

동생의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아버지를 비롯하여 자신과 친밀했던 사람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 진범을 찾기 위해 잔혹한 성범죄 전과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만에 하나, 성범죄 전과자만 풀어준 채 아무런 진실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최악의 가능성 등 피를 말리는 재조사에 있어서 트레이시에게 긍정적인 요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20년 전의 진실을 향해 오로지 돌직구처럼 달려들 뿐입니다. 때론 운이 따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예리한 추리와 성실한 발품으로 성과를 얻어내는 트레이시의 행보는 독자의 눈길을 한시도 다른 곳으로 향하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모든 것이 밝혀지는 중후반부의 반전의 대목은 전혀 새로운 전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놀라움과 함께 마음 한쪽을 서늘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전은 트레이시가 오랫동안 참아왔던 격한 감정을 일시에 터지게 만들고 맙니다.

 

이런 구도 덕분에 독자는 마지막 장까지 숨 가쁘게 가속만 반복하는 롤러코스터에 탄 기분을 만끽하게 되는데, 범죄스릴러와 법정스릴러가 절묘하게 결합된 이야기는 한때 그 분야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존 그리샴을 떠올리게 했고, 그중에서도 (줄거리는 가물가물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펠리컨 브리프의뢰인의 감흥을 기억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이 2014년에 출간된 점, 또 이후 현지에서 트레이시 크로스화이트 시리즈8편까지 나온 점을 감안하면 왜 이제야 한국에 소개됐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다행인 건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지만) 시애틀경찰국 최초의 여성 강력계 형사로서 마초들 틈바구니에서도 절대 기죽지 않는 열혈 캐릭터 트레이시의 맹활약을 접할 기회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대도시 시애틀을 무대로 강력범죄와 치열한 전쟁을 벌일 트레이시의 모습이 더 기대되는데, 그 기대대로 머잖아 후속작들이 연이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