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친의 유언장
신카와 호타테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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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제약회사의 후계자인 모리카와 에이지가 내 전 재산을 나를 죽인 범인에게 줄 것!”이라는 기묘한 유언장을 남긴 채 30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독감으로 인한 병사(病死)로 확정됐지만 회사는 유언에 따라 범인 선출전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십억 엔이 걸린 만큼 노숙자부터 샐러리맨에 이르기까지 너도 나도 범인임을 자처하고 나서자 언론마저 관심을 갖기에 이릅니다. “돈이 최고!”라는 신조를 가진 변호사 켄모치 레이코는 학창시절 에이지와 잠깐 사귄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에이지의 친구인 시노다를 앞세워 그의 대리인 자격으로 범인 선출전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일은 갈수록 꼬이고 유언장이 사라지는가 하면 의문의 살인사건까지 벌어지자 레이코는 작심하고 에이지의 죽음의 비밀을 캐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죽인 자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요절한 제약회사 후계자의 유언도 파격적이지만,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의 유산 상속 미스터리라는 홍보카피대로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28살의 뛰어난 변호사 켄모치 레이코입니다. 남친의 프로포즈 반지가 고작 40만 엔짜리라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걷어차는가 하면, 초대형 로펌에서 동기들 가운데 최고의 대우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보너스 삭감을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여기곤 거침없이 사표를 집어던지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가 황당해 보일 뿐인 범인 선출전에 나선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학창시절 잠시나마 에이지와 사귄 적이 있다는 인연이고, 또 하나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에이지의 재산이 훨씬 많으며 범인으로 선출된다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남을 만한 엄청난 성공보수를 챙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거대 제약회사가 범인 선출전을 강행하는 진짜 이유가 에이지의 유언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남긴 재산의 향방에 따라 회사 내 경영권 다툼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눈치 챈 레이코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전략으로 범인 선출전에서 우위를 점합니다.

하지만 일이 묘하게 돌아가면서 레이코는 본의 아니게 에이지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에이지의 죽음이 자살 혹은 타살일 가능성까지 제기됐고,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회사 사람들은 물론 에이지가 머물던 별장 인근의 인물들, 그가 사귀었던 전 여친들까지 가세하면서 유산상속전은 그야말로 복마전으로 변질됐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에이지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도 전부 제각각이고, 거기다가 살인, 불륜, 야합, 출생의 비밀 등 통속극에 나올 법한 소재들이 총동원되어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전개됩니다. 에이지가 남긴 유언 자체도 황당하고, 주인공이 돈에 미친 젊은 변호사라는 설정도 기승전결 따윈 무시한 B급 코미디 설정 같아서 초반부터 계속 위화감이 들었던 게 사실인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야기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계속 이리저리 꺾이다 보니 마치 엄청난 속도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듯 어질어질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어지러운 느낌만큼이나 도대체 어떻게 결론이 날까?”라는 기대감도 함께 들었는데, 레이코가 밝혀낸 유언장의 진실과 살인사건 미스터리는 반쯤은 박수를 보낼 만큼 깔끔하고 신통했지만, 반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상속, 지분, 세금 같은 용어들만 나오면 갑자기 까막눈이 되는 저의 무지함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에이지의 유언장에 담긴 진실을 모자람 없이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도쿄대 법대 출신의 전직 변호사인 작가가 나름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하려 했지만 저 같은 독자에겐 역시 무리였다고 할까요?

 

이 작품은 미스터리의 미덕 외에도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레이코가 제대로 된 변호사로 변모하는 일종의 성장소설의 매력도 갖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희대의 악녀 같지만, 실은 레이코는 변호사로서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몰랐던 탓에 엉뚱하게 돈을 추구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 레이코가 유산상속전을 거치며 여러 사람과 갈등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아낸 셈인데, 그 변신의 계기가 다소 억지스럽고 계몽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테마도 잘 소화해낸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살짝 4차원의 향기도 나는 이 작품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정공법보다는 B급 코믹 미스터리에 더 어울려 보이는데, 혹시라도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놓치지 않고 꼭 볼 생각입니다. 다만, 진지한 미스터리물로 각색된다면 잠시 고민하게 될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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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커플
재키 캐블러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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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떠나 브리스톨의 고급주택가 클리프턴에 자리를 잡은 30대 부부 젬마와 대니는 새 집과 주변 풍광에 만족하며 여유 있는 삶을 만끽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 대니가 사라지고, 젬마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 무렵 대니와 비슷한 외모의 남자들이 연이어 살해당한 사건 때문에 초긴장상태에 있던 경찰은 대니 역시 동일범에 의한 피해자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정황이 젬마를 가리키기 시작합니다. 경찰은 대니가 오래 전에 런던에서 살해됐을 지도 모른다는 추정과 함께 젬마를 의심하는데, 대니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혐의를 벗을 수 없음을 깨달은 젬마는 공포와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여러 번 실망을 겪은 탓에 웬만해선 가족이나 부부가 등장하는 심리 스릴러는 읽지 않는 편인데, ‘나를 찾아줘와 비슷한 인상을 풍기는 홍보카피에 끌려 읽게 된 작품입니다. 100페이지 내에 확실한 미끼가 안 보이면 그만두겠다는 생각으로 첫 장을 펼쳤는데, 초반부터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흥미로운 경찰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어떻게든 끝까지 달려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심플합니다. 멀쩡하던 남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와 비슷한 외모의 남자들이 연이어 살해되고, 경찰은 남편을 잃은 아내를 동정하다가 점차 그녀가 혹시 연쇄살인범이 아닐까?”라고 추정하게 되고, 그러다가 막판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실종과 살인의 진상이 밝혀집니다.

 

사라진 남편 때문에 절망에 빠진 젬마의 공포와 불안정한 심리가 꽤 많은 분량에 걸쳐 반복적으로 묘사된 점은 읽기 전부터 각오한 바지만, 그래도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행보가 한 챕터씩 번갈아 전개된 덕분에 지루하고 실망스럽기만 했던 다른 심리 스릴러들에 비하면 페이지를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생각지도 못한 단서들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젬마가 점차 유력한 용의자로 업그레이드되는 구성은 그 자체로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혹시 젬마가 진짜 범인일까?”라는, 위화감 가득한 의구심까지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대니 실종 사건의 진실이나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남자들이 연이어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은 충격적인 반전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지만, 진범의 범행동기 자체는 예상 밖의 신선함(?)을 제공합니다.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에 운이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긴 했어도 뜻밖의 범행동기 덕분에 큰 허점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무리수로 평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고, 제 경우엔 심리 스릴러를 향해 한껏 낮아진 눈높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대보다 괜찮았다고 느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눈물과 한숨과 자책이 뒤섞인 젬마의 절망감에 대한 반복적 묘사라든가 경찰과 젬마 모두 각자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거듭 이리저리 가설을 세워보는 장면들이 간혹 짜증을 일으키긴 했지만 심리 스릴러와 연쇄살인 미스터리가 적절하게 안배돼서 큰 거부감 없이 마지막까지 한 번에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그 매력이 온전히 발휘되지 않아 아쉽긴 했지만 에이번 경찰서의 헬레나 경감과 데번 경사 콤비는 시리즈가 기대될 만큼 눈길을 끈 캐릭터였습니다.

 

그리 높은 평점을 주진 못했지만, 심리 스릴러에 지친 독자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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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페이스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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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돈만 밝히는 괴팍한 천재로 소문난 성형외과 의사 히이라기 다카유키. 마취과 의사이자 대학원생으로 히이라기 클리닉에서 일하게 된 아사기리 아스카는 럭비공 같은 히이라기의 괴벽도 괴벽이지만 아름다움을 위해 몸에 칼을 대는 성형 자체에 대한 반감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말 못할 사정을 가진 환자들의 속내를 정확히 파악한 뒤 천재적인 실력으로 완벽한 성형을 이뤄내는 히이라기를 지켜보며 아스카는 복잡한 심정이 됩니다. 어느 날, 4년 전 미제로 남은 성형미인 연쇄살인사건과 동일한 수법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형사들이 히이라기를 찾아오자 아스카는 깜짝 놀랍니다. 더구나 프리랜서 언론인까지 히이라기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 접근해오자 아스카는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4년 전 사건과 히이라기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가면병동’, ‘시한병동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치넨 미키토의 작품입니다. 병원에서 벌어지는 인질극과 납치극을 다룬 가면병동시한병동은 현직 의사인 작가의 지식과 장르물의 미덕이 골고루 배합된 작품들로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맞먹는 웰 메이드 메디컬 미스터리였는데, ‘리얼 페이스역시 그에 못잖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미스터리 4년 전 성형미인 연쇄살인사건의 진상과 히이라기 다카유키의 비밀 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까지 작가는 여러 환자의 사례를 통해 성형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는 괴팍한 천재 히이라기와 돌직구 마취의사 아스카 사이의 충돌을 그립니다. 성형이란 그저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마음을 구해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정신외과라고 주장하는 히이라기는 겉으론 돈만 밝히는 듯 보여도 환자의 사정에 진정성이 없으면 가차 없이 수술을 거부하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아내의 얼굴을 전처와 똑같이 바꿔 달라는 재벌, 신분을 바꾸기 위해 다른 얼굴을 요구하는 야쿠자, 성형수술을 거듭한 끝에 엉망이 돼버린 연예인 등 거만하고 유별난 환자들 앞에서 히이라기는 자신만의 성형 철학을 조금도 굽히지 않습니다.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수술비를 요구하면서 말입니다.

반면, 안 그래도 성형 자체에 반감을 갖고 있던 아스카는 히이라기의 기행에 깜짝 놀라면서도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뭔지 조금씩 알아가면서 성형의 이면에 자리한 새로운 세계에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합기도 유단자인 아스카는 고용주인 히이라기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태도를 보이려고 하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하고, 단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는 돌직구 캐릭터인데, 이 작품에서 미스터리 서사를 빼버린다면 히이라기와 아스카의 이야기는 메디컬 코미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쾌하고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프롤로그와 세 차례에 걸친 막간챕터의 화자는 성형미인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입니다. 경찰은 4년 전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종적을 감춘 인물이 최근 다시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지만, 독자 입장에선 프롤로그막간을 읽어도 이 범인이 누구인지 쉽게 속단할 수 없습니다.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린 아스카는 단독으로 4년 전 사건과 히이라기의 비밀을 조사하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 사실마저도 마지막 장에 이를 데까지 몇 차례의 반전을 겪기 때문에 독자와 아스카 모두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절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습니다.

 

0.5개를 빼게 만든 딱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클라이맥스에서 느껴진 억지스러움입니다. 범인의 심리와 행동을 100% 정확하게 예상한 주인공은 마치 천리안 또는 관심법(觀心法)의 능력자처럼 보였는데, 예상과 한 치만 다르게 범인이 행동했더라면 모든 게 엉망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현실감도 부족해 보였고 다소 과한 억지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반전을 위한 설정이긴 했지만 왠지 고육지책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본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정신외과로서의 성형에 관한 이야기와 연쇄살인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데다, 병원 시트콤의 주인공 같은 히이라기와 아스카의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가세하면서 무거움과 가벼움을 롤러코스터처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현직 의사만이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병원 관련 묘사들은 직접 보는 듯 생생했고, 전작들처럼 마지막까지 독자를 몰아치는 거듭된 반전도 대단했습니다. 개인적으론 히이라기-아스카 콤비가 등장하는 시리즈물이 욕심나기도 하지만, 메디컬 코미디라면 모를까 메디컬 미스터리로 확장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아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라노벨 풍의 작품들과 동물의 몸에 깃든 저승사자 이야기를 제외하면 아직 못 읽은 치넨 미키토의 작품이 두어 편 되는데, ‘리얼 페이스덕분에 조만간 허겁지겁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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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마호로 역 시리즈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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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교외의 소도시 마호로에서 다다 심부름집을 운영하는 다다 게이스케는 어느 날 고교 동창 교텐 하루히코와 우연히 만난 뒤 내키지 않는 동업을 시작합니다. 개 산책, 정원 청소, 문짝 수리 등 네가 하면 되잖아!” 싶은 의뢰가 대부분이지만 지역 밀착형 심부름센터로서 무엇이든 맡겨주세요!”라는 경영 방침을 가진 다다 심부름집엔 가지각색의 의뢰인이 찾아옵니다. 혼자 일하는 데 익숙했던 다다는 친하기는커녕 학창시절 심각하게 미워했던 교텐과 함께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는데, 거기엔 나름의 사연이 있습니다. 또 둘 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깊고 오래된 상처를 갖고 있지만 결코 서로에게 내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년 동안 이런저런 의뢰를 함께 수행하면서 조금씩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미우라 시온은 따뜻하고 잔잔한 이야기를 주로 구사하기 때문에 독하고 잔인한 장르물을 좋아하는 저와는 거리가 먼 작가여야 당연하지만, 일본서점대상 수상작인 배를 엮다에 반한 뒤로 마사&’, ‘그 집에 사는 네 여자등 틈나는 대로 종종 만나오곤 했습니다. 모두 세 편으로 구성된 마호로 역 시리즈는 여러 번 제목을 들어본데다 미우라 시온의 작품이라 언젠간 꼭 읽어야지 생각해왔지만, 뒤늦게 개정판이 나오고야 읽을 기회를 잡게 됐습니다.

 

다다 심부름집에 들어오는 의뢰만 보면 가볍고 코믹한 톤의 이야기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행복과 구원에 대해 이야기’, ‘두 사람의 오묘하고 유쾌한 동거라는 홍보 카피 역시 이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다와 교텐의 의뢰인들은 사소하지만 귀찮은 일거리를 들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야기 역시 팽팽한 긴장감이나 대단한 반전이 깃든 미스터리를 품고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다다와 교텐의 동거는 유쾌하다기보다는 어딘가 묘한 불편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고, 그들의 행복과 구원은 절대 평화롭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다다와 교텐은 고교 3년 동안 같은 반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다다 입장에선 실어증에 걸린 듯 말문을 닫았던 교텐이 못마땅했고, 교텐에게 다다는 존재감 자체가 희미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엔 아무도 모르는 내밀한 사연이 있었고, 그 때문에 다다는 심부름집 소파를 제멋대로 차지한 교텐을 쉽게 내치지 못합니다. 다만, 두 사람은 서로의 현재의 상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저 둘 다 이혼했고, 자식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정도만 알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10여 년 전의 고교시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돼있는 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 두 사람이 타인들의 의뢰를 함께 수행하면서 조금씩 상대의 상처를 감지하기 시작하고, 끝내 그 상처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생각이 너무나도 달라 몇 번의 충돌 끝에 두 사람은 파국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뒤늦게 상대가 자신에게 행복과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귀찮고 사소한 일처럼 보였던 의뢰는 간혹 의외의 상황을 촉발시키곤 합니다. 살인, 마약, 폭력, 출생의 비밀 등 예기치 못한 사태들이 끼어들면서 다다와 교텐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할 때가 있는데, 그 덕분에 마호로 경찰서 형사의 집요한 관심을 사기도 합니다. 또 마호로 역 뒷골목의 매춘부, 새파랗게 젊은 조폭 보스, 부모가 없으면 좋겠다는 당돌한 초등학생, 살인을 저지른 친구를 비호하는 여고생 등 강렬한 캐릭터의 조연들이 등장하여 이야기가 느슨해질 만하면 때맞춰 긴장감을 일으키곤 합니다. 물론 이들은 알게 모르게 다다와 교텐 사이의 멀고도 깊은 골을 조금씩 좁혀주는 역할을 맡는데, 이 매력적인 조연들이 이어지는 시리즈 후속편에서도 그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미우라 시온의 작품이니만큼 씁쓸한 비극으로 마무리되지 않을 거란 건 익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다다와 교텐이 자신의 행복과 구원을 깨닫는, 그래서 상처는 언젠가 회복된다.”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 다소 쉽고 안이해 보였던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나름 큰 고비와 갈등을 겪은 뒤에 얻은 깨달음이긴 하지만, 그 고비와 갈등이 조금만 더 세고 길게 그려졌더라면 다다와 교텐의 해피엔딩이 훨씬 더 짙은 여운을 남겨줬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은 나오키상을 수상했고, 후속작인 마호로 역 번지 없는 땅TV드라마로, ‘마호로 역 광시곡은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극성(劇性)만 놓고 보면 후속작들이 더 강렬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는데, 기대보다 약간은 밋밋하게 읽힌 시리즈 첫 편 때문인지 언제쯤 다다와 교텐의 다음 이야기를 읽게 될지는 장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 읽지 못한 미우라 시온의 작품은 늘 관심권 안에 두고 지켜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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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스토리콜렉터 3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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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크리스토프와 긴 여행을 준비하던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피아 키르히호프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벌어진 연이은 살인사건 탓에 여행을 포기하고 수사에 합류합니다. 희생자들은 평범하고 원만한 사람들이었지만, 파괴력이 큰 총알에 의해 뇌와 심장을 관통당합니다. 단서 하나 못 잡고 당황하던 피아와 강력11반 반장 보덴슈타인은 어느 날 부고장으로 꾸며진 범인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범인이 10년 전 장기이식수술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한 복수를 벌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무수한 용의자만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 그 누구도 범인으로 특정하기 힘든 난감한 상황이 이어집니다. ‘타우누스 스나이퍼로 별명 붙은 범인의 복수극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지나 새해가 돼서도 멈출 줄 모릅니다.

 

타우누스 시리즈가운데 뿌리 깊은 원한에 기인한 복수극을 그린 깊은 상처와 여러 모로 비슷한 느낌을 준 작품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함에다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까지 장착한 추악한 인간들, 그들로 인해 몸과 마음에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입고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했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상처받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탐욕의 화신들을 향해 복수하는 범인 등 캐릭터와 사건은 물론 정서나 여운에 이르기까지 닮은 부분이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이 뛰어난 저격수라는 점은 물론 그 정체가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히지만, ‘누구나범인이 될 가능성과 동기를 지니고 있기에 독자는 마지막까지 인물 하나하나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또한 피해자 가족에게 전달된 부고장 형식의 메시지를 통해 범인의 의중과 희생자들 사이의 연관성까지 공개함으로써 경찰과 독자에게 일종의 도전장을 던지기도 합니다.

 

죄 지은 자들은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그들이 무관심, 욕심, 허영, 부주의를 통해 초래한 것과 똑같은 고통을... 나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리러 왔으니 죄를 짊어진 자들은 두려움에 떨 것이다.” (p214)

 

하지만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비롯한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은 희생자들의 면면이 범인의 주장처럼 죄를 짊어진 자들이 아닌 탓에 혼란에 빠집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의 목적이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는 것이라는 걸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범행 자체는 끔찍하고 잔혹하지만,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물론 독자마저도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배신감과 더불어 깊은 슬픔과 공감이라는 복잡하고 역설적인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누구를 혐오해야 할지, 누구를 동정해야 할지, 정답을 알면서도 선뜻 답을 낼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라고 할까요?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보덴슈타인이 여러 차례 순도 100%의 과격한 분노를 쏟아낸 건 어쩌면 복잡하고 역설적인 감정에 빠진 독자를 대변하고 위로하기 위해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나이퍼에 의한 연쇄살인사건 만큼이나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겪는 가족 문제가 적잖은 분량에 걸쳐 묘사됩니다. 결혼을 앞둔 설렘, 아직도 앙금이 남은 전 남편 헤닝과의 관계, 그리고 20년 넘게 벽을 쌓아놓고 살아온 부모형제에 대한 증오심 등 피아의 마음속에서 복잡하게 자리 잡은 가족에 대한 애증이 그려지는가 하면, 이혼 후 삶의 뿌리가 흔들렸지만 이제는 거의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던 보덴슈타인이 실은 여전히 혼란의 한복판에 놓여있음을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줍니다. 가족에 대한 두 사람의 애증과 혼란은 범인에게 살해당한 희생자들의 사연과 맞물려 가족이란 무엇인지, 언제나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인지, 혹시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존재는 아닌지 등 어려운 질문들을 연이어 던집니다.

 

타우누스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개인적인 수준의 사건들을 좀더 큰 맥락의 서사 - 역사적 배경, 사회구조적 문제, 지도층의 도덕적 부패 등과 연관시킴으로써 단순히 범인 찾기에 그치지 않고 묵직한 여운과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데 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역시 그런 점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야금야금 늘어나다가 이제는 가뿐히 600페이지를 넘기는 게 당연시된 분량이 살짝 부담스럽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적 복수라는 소재에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까지 겸비한 덕분에, 또 평소보다 더 많이 힘들어하고 더 많이 괴로워하고 더 날것 같은 감정들을 쏟아낸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매력적인 콤비 플레이 덕분에 시리즈 가운데 랭킹을 매긴다면 꽤 상위권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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