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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웃는 숙녀 두 사람 ㅣ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5월
평점 :
특급호텔에서 열린 동창회에서 독살사건이 일어나고, 관광버스가 폭발하며 수십 명이 사망합니다. 이어 학교 방화와 살인, 피트니스 클럽 폭파 등 테러 수준의 범죄가 꼬리를 물고 벌어집니다. 수백 명의 인력을 동원하고도 피해자들 사이의 접점은 물론 제대로 된 단서 하나 찾지 못한 경찰이 궁지에 몰릴 무렵, 놀랍게도 CCTV에 유력 용의자가 포착됩니다. 엽기적인 연쇄살인에 관여한 뒤 의료교도소를 탈주해 지명 수배 중인 우도 사유리. 그녀는 희대의 악녀 가모우 미치루의 지시로 대량살상을 저지르고 있지만 경찰은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필수까지는 아니어도 ‘비웃는 숙녀 두 사람’을 제대로 맛보려면 먼저 읽어야 할 작품들이 있습니다. 악녀 가모우 미치루의 소름 돋는 행적을 그린 ‘비웃는 숙녀 시리즈’ 두 편과 사이코패스 우도 사유리의 과거를 그린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 두 편이 그것입니다. (좀더 오랜 사유리의 과거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의 첫 편인 ‘속죄의 소나타’에 소개됩니다.)
간략하게 두 사람의 캐릭터를 정리해보면, 자신의 손은 조금도 더럽히지 않은 채 상대를 치명적인 절망에 빠뜨리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거나, 심지어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희대의 악녀 가모우 미치루의 목적은 돈도 쾌락도 아닙니다. 그냥 툭 하고 머릿속의 방아쇠가 당겨지면 그 순간 상대를 으스러뜨리겠다는 욕망이 불붙고, 이어 누구도 생각해내기 어려운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그대로 실천할 뿐입니다. 반면 해리성 인격 장애와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지닌 우도 사유리는 어려서부터 의료소년원에 수용된 적이 있으며, 성인이 된 뒤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에 관여한 일로 의료교도소에 갇혔다가 탈주한 인물입니다. 두 악녀의 차이라면, 미치루가 동정도 자비도 공감 능력도 없으며 사람을 그저 벌레처럼 여기는 반면, 사유리는 적어도 상대를 ‘동족’으로 인식하기에 살인 행위에서 흥분과 희열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살육과 파괴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공포 불감증이기에 무감각하게 일을 벌일 수 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p293~294)
각각 다른 시리즈에서 희대의 악녀 역할을 수행한 미치루와 사유리가 콤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비웃는 숙녀 두 사람’은 올해 최고 기대작 중 한 편으로 꼽힐 만 했습니다. 과연 두 사람이 ‘원 팀’으로 활약할지, 아니면 누군가 죽어야 끝나는 벼랑 끝 게임의 적으로 만나게 될지 무척 궁금했는데, 결론적으론 두 이야기를 모두 맛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그동안 ‘개인’을 목표물로 삼았던 두 사람이 어마어마한 수준의 대량살상을 저지른다는 점입니다. 특히 앞선 작품들에서 타인의 악의를 부추겨 끔찍한 짓을 저지르게 사주하긴 했지만 단순히 악녀로만 볼 수 없는 선악의 경계선에 서있던 미치루가 독살과 폭탄을 이용하는 순도 100%의 악녀로 부활한 점은 꽤 충격적인 대목이었습니다. 테러 수준의 대량살상을 저지른 미치루와 사유리가 과연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읽는 내내 궁금했는데, 나카야마 시치리는 예의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흥미롭고 서늘한 종장을 선보입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다른 시리즈의 인물들이 교차 출연하는 장면들입니다. 의료소년원에서 사유리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데다 현재는 그녀의 변호인 겸 신원보증인인 미코시바 레이지가 카메오 이상의 비중으로 등장하고,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에서 사유리를 쫓던 사이타마 현경의 신참 고테가와가 이제는 제법 구력이 붙은 형사로 찬조 출연합니다. 또 ‘비웃는 숙녀 시리즈’에서 미치루의 악행과 신출귀몰한 행적에 충격을 받았던 아소 반장은 수사를 이끄는 라이벌 기리시마 반장과는 사뭇 다른 추론을 내세웁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두 가지 아쉬움이 남았는데, 하나는 두 악녀의 폭발력이 기대만큼 강렬하진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경시청 수사1과 형사 미야마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 탓으로 보이는데, 물론 마지막 장에서 작가가 독자의 기대와 갈증 – 두 악녀의 정면충돌 - 을 해소해주긴 하지만 그 역시 살짝 모자란 느낌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블루홀식스의 작품답지 않게 여러 곳에서 발견된 오타입니다. 조사 등 단순 오타는 물론 인물 이름까지 틀린 경우가 제법 있어서 무척 아쉬웠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라도 꼭 수정되기를 바랍니다.
‘비웃는 숙녀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나카야마 시치리의 여러 시리즈 가운데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 입장에서 앞으로 적어도 몇 편 정도는 미치루의 이야기를 더 만나보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저지른 대량살상 때문에 미치루는 돌아올 수 없는 선을 확실히 넘었고 언젠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겠지만, 그 전까지 ‘악녀’ 미치루의 이야기가 좀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욕심은 아마 저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