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
아시자와 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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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 해에만 네 편의 작품을 한국에 출간해 주목받았던 아시자와 요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누구든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하지만 사소한 실수나 그릇된 대처 때문에 끔찍한 상황으로 돌변하고 마는 서늘한 아이러니가 다섯 편의 작품을 통해 그려집니다.

왜 하필 내가 불치병에 걸렸을까, 라며 자신의 불운을 원망하던 아내가 남편이 고백한 끔찍한 과거 이야기 속에서 에 관한 진실을 찾는 이야기(‘단지 운이 나빴을 뿐’), 어이없는 실수로 학교 수영장 물을 유실한 뒤 그걸 모면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지만 결국 더 큰 화를 자초하고 만 교사(‘벌충’), 이웃 남자의 고독사가 치매 초기인 아내와 자신의 실수 때문이라 자책하던 노인이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망각’), 영화감독 데뷔를 코앞에 뒀다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 30대 남자(‘매장’), 요리 책 베스트셀러 작가가 9년 만에 다시 만난 띠동갑 불륜남 때문에 겪게 되는 사면초가의 상황(‘미모사’) 등이 실려 있습니다.

 

(‘매장을 제외하곤) 누구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상황들이지만 그것들이 주인공의 사소한 실수나 그릇된 대처 때문에 점차 해결 불가능한 아수라장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극단적인 설정의 공포물보다 독자의 심장을 더 쫄깃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주인공들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길 바라지만 동시에 그렇게 될 리 없다는 걸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평균 5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매 작품마다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톤은 2021년에 출간된 단편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와 비슷하지만, 장르의 다양함이라든가 이야기의 깊이 면에서는 살짝 못 미친다는 생각입니다.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가 일상 속의 공포와 미스터리, 서술트릭, 그로테스크 호러 등 팔색조 같은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면 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는 양념이 좀 덜 들어간 싱거운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도 다섯 편의 수록작 가운데 세 편(‘벌충’, ‘망각’, ‘매장’)은 무척 재미있게 읽어서 절반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목에 관한 설명을 담은 옮긴이의 말혹은 해설이 실리지 않은 점입니다. 등장인물 중엔 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라는 비난을 들을 만한 인물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의 이 더러운 건 아니었고, 또 모두가 진실을 감추기 위해 어딘가에 더러운 손을 닦으려 한 것도 아니라서 굳이 수록작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수록작을 포괄하는 듯한 비유적인 제목을 단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가만 생각해보니 공교롭게도 재미있게 읽은 세 편의 주인공이 이 제목과 잘 어울린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런 해석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독특한 연작 괴담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을 시작으로 아시자와 요의 작품을 다섯 편째 읽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콤비가 주인공인 나의 신을 제외하곤 모두 평점 4~4.5개를 줄 정도로 제 취향에 아주 잘 맞는 작가입니다.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아마리 종활 사진관은 연작 미스터리지만 따뜻한 감성의 이야기라는 이유만으로 지금껏 외면 중입니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21년까지 일본에서 출간된 작품이 모두 13편이니 앞으로도 그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이 남았다는 뜻인데, 그건 저와 비슷한 취향의 독자에겐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번 독특한 이야기를 선보이는 아시자와 요가 다음엔 한국 독자에게 어떤 놀라움을 안겨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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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싱 걸스
M.M. 쉬나르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시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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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교살된 사체로 발견된 해먼드 사건을 맡은 매사추세츠 오크허스트 카운티 형사기동대의 경위 조 푸르니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현장 상황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성폭행이나 강도의 흔적도 없고 범인이 갖고 간 건 오직 희생자의 결혼반지뿐이며, CCTV에 찍힌 중절모를 쓴 용의자의 흔적은 호텔 인근에서 전혀 목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향인 뉴올리언스에 왔다가 때마침 똑같은 형태의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조는 현지 경찰과 FBI에 공조수사를 요청하지만 연쇄살인으로 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거절당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헤매던 어느 날 조와 동료들은 범인과 피해자가 접촉한 경로를 알아내고 수사에 박차를 가하지만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까봐 전전긍긍할 뿐입니다.

 

워커홀릭에 타고난 현장 형사 체질인 조 푸르니에와 그녀의 동료들이 연쇄살인이 확실하지만 그 어떤 확증도 없는 난해한 살인사건들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댄싱 걸스의 뼈대입니다. 시작과 함께 범인이 살인을 저지르는 상황이 디테일하게 그려지고 곧이어 범인의 본명이 마틴이라는 점이 공개됩니다. 그가 희생자를 고르는 기준과 기이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살해수법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이어 그의 오래된 트라우마와 범행동기가 설명됩니다.

초반부터 범인이 공개되면서 독자는 그를 쫓는 주인공 조 푸르니에의 동선과 역할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그녀는 좀 특이한 상황에 놓인 경찰입니다. 최단기간 형사 승진, 역대급 사건 해결률, 15년의 경찰 생활 중 세 번의 수상 등 탁월한 이력을 가진 덕분에 두 달 전 경위로 승진했지만 그녀에겐 승진을 받아들인 일이 너무나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타고난 현장 체질인 그녀는 밀려드는 행정업무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고, 당장이라도 강등을 요청하여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운 좋게 현장 수사를 지휘할 수 있게 된 해먼드 사건은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기에 조는 전력을 다해 수사에 매진합니다.

 

사실 중반까지만 해도 조금은 지루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범인인 마틴은 유년기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학대를 당하며 트라우마에 사로잡혔고, 그로 인해 살인에 대한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 뒤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죽어 마땅한 여자들을 살해하는 전형적인 연쇄살인범입니다. 또 해먼드 사건을 수사하는 조와 동료들의 초반 모습은 거의 일지에 가까울 정도로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묘사돼서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마틴이 자신의 챕터에서 범행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설명한 이후 조의 수사과정이 그려지다 보니 독자입장에선 뒷북에 헛발질만 날리는 그녀가 그저 답답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챕터는 희생자 중 한 명이 화자를 맡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는데, 실은 독자 입장에선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라 역시 지루함만 남긴 대목입니다. 경찰, 범인, 희생자가 번갈아 화자를 맡아서 입체적인 느낌이 들긴 했지만, 정작 긴장감을 증폭시킬 만한 요소들이 결여된 느낌이랄까요?

 

만약 이런 전개가 반복되다가 조가 마틴을 체포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됐다면 별 3개 이상을 주기가 어려웠겠지만, 매력적인 조의 캐릭터와 막바지에 전개된 의외의 반전 덕분에 끝까지 읽어낸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연쇄살인범 혹은 희대의 소시오패스를 다룬 이야기들을 많이 읽었지만 이런 식의 결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무척 흥미로웠는데, 그 결말이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한 여운까지 남겨서 혹시나 하고 출판사 소개글을 찾아보니 조 푸르니에 시리즈는 현재 5편까지 나왔으며 댄싱 걸스는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고 합니다.

 

4개라는 평범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댄싱 걸스에서 미처 마무리되지 않은 이야기도 궁금하고, 주인공 조 푸르니에가 과연 경위 계급을 내던지고 현장 형사로 돌아가 맹활약하게 되는지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5편까지 출간된 걸 보면 분명 그만한 힘과 매력을 지닌 게 분명해 보이는데, ‘댄싱 걸스에서 느낀 아쉬움들이 후속작에선 모두 만회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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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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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식당을 경영하는 유키히토는 낯선 남자의 협박전화를 받습니다. 그는 15년 전 유키히토의 아내 에쓰코의 죽음이 당시 4살이던 딸 유미 때문이란 걸 안다며 돈을 요구합니다. 유미에게 숨겨온 비밀이 폭로될 위기에 처하자 유키히토는 심신이 망가졌고, 끝내 식당 문을 닫고 잠시 몸을 피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유미는 아버지의 고향인 하타가미에 가고 싶다며 고모 아사미까지 함께 갈 것을 제안합니다. 31년 전 어머니가 의문사했고, 1년 후엔 아버지가 살인범으로 몰렸던 고향이라 유키히토로선 내키지 않았지만, 어쩌면 부모의 비극의 진실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취재진으로 위장하고 하타가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유키히토는 끔찍하지만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진실과 맞닥뜨립니다.

 

(대표작은 읽지도 못했고 겨우 여섯 편밖에 못 읽었지만) 최근에 읽은 절벽의 밤까지 미치오 슈스케는 제게 다소 애매한 작가였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밤은 그가 일본 유수의 문학상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점, 또 이 작품에 대해 앞으로 내가 쓰는 작품들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며 과도한 자신감을 내비친 이유를 확실히 공감하게 만든 명품입니다. 다 읽은 뒤 인터넷 서점에서 발견한 반전이라는 흔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 수수께끼라는 일본 독자의 호평 역시 100% 공감할 수 있었는데, 연말에 선정할 개인적인 미스터리 베스트에도 포함될 것이 거의 분명할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40대 중반에 이른 유키히토에겐 인생을 뒤흔든 세 번의 위기가 있습니다. 30년 전 고향 하타가미에서 벌어진 부모의 비극, 15년 전 4살 딸 유미가 일으킨 아내 에쓰코의 죽음, 그리고 현재 딸 유미에게 아내의 죽음의 진상을 알리겠다며 돈을 요구하는 한 남자의 협박이 그것입니다. 어머니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아버지는 살인범으로 몰리다가 고향을 등졌으며, 누나 아사미는 신사에서 벼락을 맞아 온몸에 번갯불 모양의 흉터가 남는 비운을 겪은 탓에 유키히토에겐 딸과 아내와 함께 꾸린 가족이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지만, 아내가 죽고 15년이 지난 지금, 딸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자 유키히토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그가 몸을 피한 곳이 부모와 누나에게 끔찍한 참극을 남긴 고향 하타가미라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키히토를 더욱 긴장하게 만든 건 이왕 하타가미로 갈 거라면 30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겠다고 결심한 점입니다. 딸 유미와 누나 아사미까지 취재진으로 위장한 가운데 하타가미의 신사를 지키는 신관 기에, 하타가미에 머물고 있던 향토연구가 아야네, 그리고 30년 전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이웃들을 통해 조금씩 진실에 다가가지만, 유키히토는 이 세상에는 어떤 신도 없다.”는 결론을 내릴 만큼 가혹하고 잔인한 운명의 장난들을 알게 되면서 자책과 회한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시간과 기억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왜곡되거나 훼손된 기억의 문제, 그로 인해 벌어진 기막힌 오해와 의심들, 그리고 30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지는 잇단 살인과 자살은 유키히토 집안 3대에 걸쳐 악몽과도 같은 시련을 안겨줍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진실이 오랜 시간의 오해와 의심을 불식시켜주긴 하지만 위로와 안식 대신 씁쓸함, 안타까움, 자책감을 더할 뿐이라 독자로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마음으로 느껴지는 무게감이 엄청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소개한 반전이라는 흔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 수수께끼라는 일본 독자의 호평은 클라이맥스에서 엔딩에 걸친 폭발적인 전개를 읽다 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텐데, 가족의 비극과 정교한 미스터리가 제대로 합을 이룬 가운데 과거와 현재가 뒤엉킨 미스터리가 완벽한 복선 회수와 함께 명쾌하게 설명되는 대목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라 감탄과 한탄을 번갈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설정 중 하나는 벼락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뇌신’(雷神)이며, 유키히토의 고향 하타가미는 벼락이 많이 치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은 지명입니다. 아버지가 살인범으로 몰렸던 그해 아사미는 벼락에 직격당했고,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신관 기에가 모시는 신은 뇌신입니다. 명백한 과학현상이지만 어딘가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성격도 갖고 있는 벼락과 그것을 관장하는 뇌신의 이야기는 유키히토의 진실 찾기에서도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설정이라 읽는 내내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매번 그의 대표작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읽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데, ‘용서받지 못한 밤덕분에 조만간 책장에서 구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작품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긴 했지만 그의 진가를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 같아 반갑고 또 반가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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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 호텔 스토리콜렉터 101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김미정 옮김 / 북로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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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글래스 호텔1970년부터 무려 38년에 걸쳐 버나드 메이도프가 저지른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 사기사건(일종의 다단계 금융사기)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하지만, 독자들의 예상과 달리 금융사기를 다룬 범죄 스릴러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읽기 전엔 탐욕, 죄악, 사랑, 망상의 아름답고도 끔찍한 서사시.”라는 홍보 카피가 살짝 이해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내용과 형식 모두 독특한데다 조금은 난해하기까지 한 이 작품을 제대로 압축한 문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폰지 사기사건을 조사하여 악당과 배신자와 피해자를 규명하는 통속적인 스릴러 서사가 아니라 그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속내,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그린 작품이란 뜻입니다. 미디어 리뷰 가운데 사기사건의 피해자들이 입은 참상을 정교한 방식으로 조명하는 동시에, 인간이 도덕적 타락으로 매끄럽게 빠져드는 찰나를 포착했다는 설명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표면적으론 약물에 중독된 폴과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빈센트 이복남매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작품엔 원톱이든 투톱이든 확실한 주인공이 없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폰지 사기를 저지른 조너선 알카이티스와 그의 수족들, 폰지 사기에 휘말려 전 재산을 날리고 만 사람들, 또 그들 주변의 지인 등 꽤 많은 인물들이 대등한 비중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딱히 악당이라 부를 만한 인물이 없는 것도 특징인데, 주범인 알카이티스와 그의 수족들은 피해자를 등치는 사악한 악당이라기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유혹에 넘어갈 법한 돈에 대한 탐욕을 이겨내지 못한 가련한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또 대부분의 인물들이 사기사건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지만, 정작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사기사건과는 무관한)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나 개인사에 할애돼있습니다. 특히 그 이야기들은 기승전결이라는 익숙한 전개 대신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는 구성으로 이뤄져있는데, “상자를 잃어버린 퍼즐 같은 작품글래스 호텔의 이런 특징을 함축한 평입니다. 이 작품의 미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특징 때문에 독자에 따라 제법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여러 인물 중 비중이나 역할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주범인 알카이티스의 트로피 아내가 된 빈센트입니다. 가난, 어머니의 실종, 정학과 가출 등 10대 초반에 온갖 불행을 맛봤던 빈센트가 5성급 호텔에서 바텐더로 일하다가 호텔 소유주인 알카이티스의 눈에 들어 대저택의 사모님이 된 뒤 돈이 주는 자유를 만끽하는 대목은 역설적이게도 무척이나 황홀하고 매력적으로 읽힙니다. 그녀가 누리는 행복은 알카이티스의 범죄수익 덕분이며 그 때문에 그녀를 사기사건의 종범(從犯)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은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운명처럼 찾아든 돈의 자유를 만끽했을 뿐인 무고한 희생양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글래스 호텔이 사기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라기보다 빈센트라는 한 여성의 굴곡진 삶과 욕망을 그린 소설로 읽힌 건 바로 이런 모호하고도 매혹적인 그녀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금융사기를 다룬 범죄스릴러를 기대한 독자에겐 선과 악, 죄와 벌이라는 이분법적인 서사 대신 사건에 말려든 사람들의 심리에 방점을 찍은 글래스 호텔이 난해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익숙하지 않은 서사에 여러 번 당혹감을 느낀 게 사실이지만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지막 장까지 달린 걸 보면 분명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과 매력이 깃든 게 분명합니다. 다만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이야기가 아닌 만큼 시간을 두고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이 작품의 진가를 찬찬히 만끽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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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2월 29일
송경혁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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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일에 태어나 4년마다 생일을 맞이하는 수현. 20대 초반 전역한 그를 기다린 건 엄청난 빚과 간경화로 투병 중인 어머니뿐입니다. 불법 콜택시, 일명 콜때기로 호구지책을 마련하지만 수현은 미래를 생각할 겨를도, 더 이상 잃을 것도, 죽지 않을 이유도 없는 무의미한 삶을 살아갑니다. 생일인 229, 도박사이트를 통해 자신과 생일이 같은 현채를 알게 된 수현은 그녀와 함께 충동적으로 현금 수송차량을 탈취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뺑소니를 당한 경찰에게서 빼앗은 총을 갖고 있던 현채가 엉겁결에 은행원을 쏴 죽이고 맙니다. 급한 나머지 현금을 나눠가진 뒤 4년 후 자신들의 생일인 229일에 다시 만나기로 한 두 사람. 하지만 이후 229일은 수현에게 4년마다 되풀이되는 끔찍한 지옥도를 펼쳐 보입니다.

 

살아갈 이유조차 없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돈이 필요한 수현과 평범하고 모자람 없어 보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큰돈이 필요하다는 현채. 더구나 우연히 손에 넣은 총까지 지닌 두 사람이 아무 계획도 없이 충동적으로 현금 수송차량을 탈취하다가 은행원을 죽이는 대목까지만 해도 영원한 고전 보니&클라이드’(한국 개봉 제목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비슷한 전개를 예상했던 게 사실입니다. 현금 탈취 4년 후 자신들의 생일날 다시 만난 두 사람이 두 번째 한탕을 저지르며 희대의 2인조로 진화하는 액션 스릴러의 향기가 물씬 풍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 차례의 4년이 흐르는 동안 수현과 현채는 초반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극적인 반전과 함께 피비린내와 긴장감이 작열하는 치명적인 관계가 되고 맙니다.

 

사실 여섯 번째 229은 서평을 쓰기가 참 난감한 작품입니다. 229일이 돌아올 때마다 점점 더 짙고 불온한 악의에 휩싸이는 수현과 현채의 비밀을 설명하지 않곤 초반 이후의 줄거리를 소개할 방법이 없는데, 대략 1/3쯤 공개되긴 하지만 제가 볼 땐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라 함부로 언급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공이 어떤 종류의 갈등을 벌이는지, 각자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는지, 궁극의 목표는 무엇인지조차 소개할 수 없으니 인상비평 수준의 다소 모호한 서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드보일드는 특성상 누아르와 결합하기 쉽지만, 언제나 누아르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우리 주변에서 언제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범죄의 경계선에 선 사람들이 이야기의 주체일 때 건조함과 비극성이 극대화되기도 한다.”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수현과 현채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들이지만 실은 과거도 미래도 온통 감당하기 힘든 비극으로 채워진 심연 같은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피할 수 없는 파국이 예정된 두 사람의 행보는 최대한 절제된, 그래서 오히려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하드보일드 스타일대로 묘사되는데, 특히 어딘가 공감 능력이 결여된 듯한 수현의 캐릭터와 차분한 미소와 낮은 목소리 속에 섬뜩한 냉기를 품고 있는 현채의 캐릭터는 작가가 구사하는 건조한 문장들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수현과 현채의 잔혹한 이야기는 다섯 번의 229, 그러니까 16년에 걸쳐 느리지만 위험하게 끓어오르다가 극적으로 폭발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맞이하는 여섯 번째 229일은 독자에게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그 누구도 편들어 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선사합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하드보일드 스타일 엔딩이라고 할까요?

 

이 작품은 송경혁의 첫 장편이라고 합니다. 고즈넉이엔티의 케이스릴러 시리즈를 통해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는 신인작가들을 여럿 만났는데, 송경혁 역시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대단한 유망주라는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하드보일드 혹은 누아르 스타일을 고수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좀더 그쪽으로 파고들어 자신의 강점을 살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매력적일 여섯 번째 229이 많은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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