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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
아시자와 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2년 4월
평점 :
2021년 한 해에만 네 편의 작품을 한국에 출간해 주목받았던 아시자와 요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누구든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하지만 사소한 실수나 그릇된 대처 때문에 끔찍한 상황으로 돌변하고 마는 서늘한 아이러니가 다섯 편의 작품을 통해 그려집니다.
왜 하필 내가 불치병에 걸렸을까, 라며 자신의 불운을 원망하던 아내가 남편이 고백한 끔찍한 과거 이야기 속에서 ‘운’에 관한 진실을 찾는 이야기(‘단지 운이 나빴을 뿐’), 어이없는 실수로 학교 수영장 물을 유실한 뒤 그걸 모면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지만 결국 더 큰 화를 자초하고 만 교사(‘벌충’), 이웃 남자의 고독사가 치매 초기인 아내와 자신의 실수 때문이라 자책하던 노인이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망각’), 영화감독 데뷔를 코앞에 뒀다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 30대 남자(‘매장’), 요리 책 베스트셀러 작가가 9년 만에 다시 만난 띠동갑 불륜남 때문에 겪게 되는 사면초가의 상황(‘미모사’) 등이 실려 있습니다.
(‘매장’을 제외하곤) 누구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상황들이지만 그것들이 주인공의 사소한 실수나 그릇된 대처 때문에 점차 해결 불가능한 아수라장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극단적인 설정의 공포물보다 독자의 심장을 더 쫄깃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주인공들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길 바라지만 동시에 그렇게 될 리 없다는 걸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평균 5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매 작품마다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톤은 2021년에 출간된 단편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와 비슷하지만, 장르의 다양함이라든가 이야기의 깊이 면에서는 살짝 못 미친다는 생각입니다.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가 일상 속의 공포와 미스터리, 서술트릭, 그로테스크 호러 등 팔색조 같은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면 ‘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는 양념이 좀 덜 들어간 싱거운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도 다섯 편의 수록작 가운데 세 편(‘벌충’, ‘망각’, ‘매장’)은 무척 재미있게 읽어서 절반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목에 관한 설명을 담은 ‘옮긴이의 말’ 혹은 ‘해설’이 실리지 않은 점입니다. 등장인물 중엔 “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라는 비난을 들을 만한 인물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의 ‘손’이 더러운 건 아니었고, 또 모두가 진실을 감추기 위해 어딘가에 더러운 손을 닦으려 한 것도 아니라서 굳이 수록작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수록작을 포괄하는 듯한 비유적인 제목을 단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가만 생각해보니 공교롭게도 재미있게 읽은 세 편의 주인공이 이 제목과 잘 어울린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런 해석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독특한 연작 괴담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을 시작으로 아시자와 요의 작품을 다섯 편째 읽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콤비가 주인공인 ‘나의 신’을 제외하곤 모두 평점 4~4.5개를 줄 정도로 제 취향에 아주 잘 맞는 작가입니다.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아마리 종활 사진관’은 연작 미스터리지만 따뜻한 감성의 이야기라는 이유만으로 지금껏 외면 중입니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21년까지 일본에서 출간된 작품이 모두 13편이니 앞으로도 그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이 남았다는 뜻인데, 그건 저와 비슷한 취향의 독자에겐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번 독특한 이야기를 선보이는 아시자와 요가 다음엔 한국 독자에게 어떤 놀라움을 안겨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