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번째 카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6 링컨 라임 시리즈 6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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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할렘 흑인박물관에서 자신의 조상에 관한 오래된 자료를 조사하던 16세 소녀 제네바가 한 남자의 습격을 받습니다. 당초 강간범으로 추정됐지만 남자는 제네바가 보던 오래된 자료를 탈취하여 종적을 감춘 것은 물론 그 뒤로도 제네바를 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전신마비 법과학자 링컨 라임과 이제 갓 형사로 승진한 아멜리아 색스는 범인이 남긴 몇 안 되는 단서를 통해 범행동기를 추리하지만 좀처럼 결과를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범인의 안전가옥을 발견하고 정체까지 알아낸 라임과 색스는 위험천만한 위기를 넘기며 사건을 해결한 듯 보였지만, 그 후로도 제네바를 향한 살해 시도가 계속 이어지자 이 끔찍한 범행의 최종 배후가 누구인지, 진짜 목적은 무엇인지 철저히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인 ‘12번째 카드는 전작들과는 사뭇 결이 다른 소재와 서사를 품고 있습니다. 법과학자 라임과 열혈경찰 색스가 잔혹하고 무자비한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액션 스릴러가 지금까지의 공통된 경향이었다면, ‘12번째 카드는 단 하나의 목적, 16세 소녀 제네바를 살해하려는 냉혹한 청부살인업자를 쫓는, 비교적 단선적인 구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프리 디버는 사건 못잖게 풍성한 이야기와 다양한 서사를 담아냄으로써 오히려 전작들보다 훨씬 더 볼륨감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지나치게 심플해 보이던 사건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를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12번째 카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무려 140여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배경으로 한 흑인할렘에 관한 서사입니다. 두 서사 모두 청부살인업자의 표적인 16세 소녀 제네바가 이끄는데, 제네바는 140년 전, 해방 노예로서 당대 거물 정치인들과 함께 흑인 인권운동을 벌이다가 갑작스레 절도범으로 몰려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죄판결을 받았던 까마득한 조상 찰스 싱글턴의 진실을 알고 싶어 오래된 자료를 검색하는 등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범죄와 마약과 혼란에 찌든 흑인들의 상징할렘을 탈출하기 위해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하는 반항적인 모범생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조상에 대한 자부심과 인종적 열패감을 함께 지닌 미묘한 캐릭터라고 할까요? 라임과 색스 역시 청부살인업자의 표적인 제네바를 보호하면서도 어떻게든 저주와도 같은 숙명을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려는 그녀를 지켜보며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겪게 됩니다.

 

‘16세 소녀 제네바 죽이기엔 주범인 청부살인업자 외에도 공범, 무기제공범, 사주범 등 꽤나 호화롭고(?) 요란한 범죄자들이 동원됩니다. 곤봉부터 독가스에 이르기까지 살해도구도 다채롭게 등장하는데, 너무 쉬운 표적에 비해 악당들을 과대포장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제프리 디버는 특유의 반전과 미스디렉션을 통해 단순해 보이던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발전시킵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 전엔 절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라는, 제프리 디버의 트레이드마크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독자를 희롱하곤 하는데, 양파껍질마냥 벗길 때마다 새롭게 드러나는 진실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연속 반전보다도 재미와 흥분을 선사해줬습니다.

 

제네바의 캐릭터가 워낙 눈길을 끌어서인지 상대적으로 라임과 색스의 활약은 미미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물론 라임은 미세증거를 통해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했고, 색스는 몸을 아끼지 않는 열혈형사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다소 아쉽게 읽힐 수밖에 없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앞선 다섯 편의 작품에서 두 사람의 수사 방식이 살짝 반복된다는 인상과 함께 약간의 피로감마저 느꼈던 터라 오히려 ‘12번째 카드에서 보여준 라임과 색스의 인간적인 모습이 더 신선하게 읽혔습니다. 특히 라임은 평소 그답지 않게 범행동기에 꽤나 신경을 쓰는 것은 물론 제네바를 통해 크고 작은 깨달음과 성찰을 얻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시리즈 여섯 편째에 이르러 작은 변곡점이 마련된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서평이 길어져서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지만, 지금껏 본 적 없는 청부살인업자의 독특한 캐릭터라든가 라임의 오랜 동료인 론 셀리토를 엄습한 위기, 또 제네바가 새롭게 알게 되는 할렘의 역사와 존재 의미 등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설정이 가득한 작품입니다. 저처럼 시리즈에 피로감을 느낀 독자라도 색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니 나름 기대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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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밀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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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유키 리쿠히코는 평균 시급의 100배에 달하는 엄청난 고액을 제시한 수상한 아르바이트 광고에 눈길이 끌립니다. 할 일이라곤 7일에 걸쳐 진행되는 인문과학적 실험의 피험자가 되어 24시간 내내 관찰당하는 게 전부. 의심스러우면서도 고액의 시급에 끌린 유키는 주최측의 안내에 따라 외진 숲속에 자리한 암귀관이라는 기괴한 지하 구조물에 발을 들입니다. 유키를 포함한 12명의 피험자는 주최측으로부터 각각 다른 흉기와 그에 관한 메모를 전달받곤 이 실험이 살인인간행동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고액 시급의 유혹이 더 컸고, 12명 모두 살인 같은 건 일어날 리 없다는 낙관론을 품습니다. 하지만 뜻밖의 첫 살인이 벌어지고 그때부터 암귀관은 잔혹한 데스 게임의 무대로 변합니다.

 


일본에서 2007년에 출간된 인사이트 밀2008년 한국에 처음 소개됐고(학산문화사), 이어 2022년 엘릭시르에서 개정판을 낸 요네자와 호노부의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클로즈드 서클과 데스 게임에 본격 미스터리까지 가미된 버라이어티한 서사에다 황금기 고전 미스터리에 대한 다양한 오마주까지 곁들여져서 비슷한 구조의 작품들과는 조금은 다른 매력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어마어마한 고액 시급은 기본이고 살인자, 피살자, 탐정, 조수 등 암귀관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의 주인공이 될 경우 몇 배의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는 설정 때문에 12명의 피험자들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 이상의 목표를 품게 되는데, 이 잔혹하면서도 자극적인 설정 때문에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를 밝히는 것보다 더 많은 궁금증과 기대감을 품게 만듭니다.

 

터무니없는 고액 시급에 끌려 위험천만한 아르바이트에 도전한 만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조금 별나고 독특하게 설정됐습니다. 리더를 자처하며 암귀관의 공포를 즐기는 자, 그런 리더의 곁에 빌붙어 목숨을 부지하려는 자, 위험한 분위기를 발산하며 언제라도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태연자약한 자 등 극과 극의 캐릭터들이 벌이는 갈등과 충돌은 살인사건 못잖게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특히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해된 시신들이 연이어 발견되는 가운데 범인 자체도 오리무중이지만 범행에 이용된 살해 도구가 누구의 것인지, 즉 주최측으로부터 그 도구를 제공받은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피험자들의 혼란과 불신은 더욱 가중됩니다.

 

이 다음부터는 부조리하고 비윤리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신 분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렇지 않으신 분은 이곳에서 떠나시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그 위험에 걸맞은 대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p47~48)

 

재미있는 건 살해당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도, 범인을 밝혀내고 싶다는 정의감도 하나같이 고액의 시급몇 배의 보너스라는 물질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대로 이 물질적인 동기는 인사이트 밀을 여느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나 데스 게임 스릴러와도 차별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동합니다. ‘부조리하고 비윤리적인 일을 감수하고라도 위험에 걸맞은 대가를 손에 넣으려는 욕망이 암귀관의 공포를 더욱 생생하고 잔인하게 만든다고 할까요?

 

이 작품이 한국에 처음 출간된 2008년에 읽었다면 새로운 스타일의 클로즈드 서클 데스 게임 미스터리에 좀더 환호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사이에 유사한 서사의 작품을 많이 접해온 터라 새로움과 신선함을 느낄 여지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요네자와 호노부가 그려낸 차별화된 이야기는 충분히 재미와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소재와 스토리에 비해 다소 과해 보인 분량 정도였는데, 속도감도 꽤 빠르고 인물들의 캐릭터도 매력적이라 지루함을 느낄 틈은 없었습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 후속편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실어놓고도 요네자와 호노부가 지금까지 인사이트 밀 2을 출간하지 않은 건 이 작품을 읽은 모든 독자라면 누구나 서운하게 느끼는 바일 텐데, 어쩌면 출간 20주년을 기념하여 후속편이 나올 지도 모르니 나름 기대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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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도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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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인 호사카 소스케는 치바 교도소에서 교정위원으로 자원봉사하며 젊은 날 저질렀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속죄하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코앞에 둔 딸 유아가 연쇄살인범에게 무참히 살해당하자 그의 삶과 신념은 완전히 붕괴되고 맙니다. 더구나 범인 이시하라 료헤이가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법정에서 비아냥과 희롱으로 일관하며 사형당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행동하자 호사카는 어떻게든 그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일념에 사로잡힙니다. 결국 호사카는 이시하라가 수감된 도쿄 구치소 교정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딸 유아의 복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합니다.

 


일본에서 2023년에 출간된 마지막 기도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야쿠마루 가쿠가 사형제도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사형수, 교정위원, 교도관, 피해자 유족 등 사형제도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과 고뇌와 트라우마를 다큐멘터리 이상의 리얼리티를 통해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딸을 죽인 사형수와 그에게 복수하려는 아버지이자 교정위원 목사란 설정은 극적이긴 해도 어떤 결말이 그려질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다소 밋밋한 구도로 보이는데, 야쿠마루 가쿠는 그의 전매특허인 막판에 불꽃처럼 터지는 반전대신 사형제도에 대한 정공법을 택함으로써 미스터리의 짜릿함과는 전혀 결이 다른 감동과 울림을 선사합니다.

 

일그러진 내면을 폭발시키기 위해 무고한 인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형수, 복수심에 사로잡힌 아버지지만 동시에 범죄자의 갱생과 구원을 소명으로 삼은 교정위원이란 딜레마에 빠진 남자, 사형집행에 참여한 뒤 사람을 죽였다.”라는 자책감과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교도관, 그리고 오로지 복수만이 피해자의 마음을 달랠 수 있다고 믿으며 신속한 사형집행을 요구하는 유족 등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여러 인물들이 보통 사람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사형제도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표출합니다.

 

끔찍한 범죄 못잖게 사형제도 자체가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크고 거대한 격정과 분노와 고뇌에 빠뜨리는가? 진정한 용서와 구원이라는 것은 한없이 어렵고 지난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야쿠마루 가쿠는 이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사형수 이시하라와 교정위원이자 피해자 아버지인 호사카 사이의 만남과 충돌과 변화를 통해 독자에게 건넵니다. 물론 그 대답은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고, 독자들에게 극과 극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을 만큼 논쟁적인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형찬성파든 사형반대파든 마지막 기도를 읽은 독자라면 한번쯤 사형제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을 갖게 될 텐데,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의미는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장르상 미스터리로 분류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사회고발물이나 사형제도에 관한 다큐멘터리라 생각하고 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스스로의 속죄와 딸의 복수와 사형수의 구원이라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딜레마에 빠진 호사카의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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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저택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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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저택은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괴담과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조합한 미야베 월드 2가운데 막내라고 할 수 있는 기타기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의 명칭은 책을 담는 상자인 문고를 만들어 파는 행상에 불과한데다 비주얼도 완력도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10대 소년 기타이치와, 대중탕의 가마 담당으로 늘 꾀죄죄한 모습에 말수도 적지만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있는 대단한 능력소년 기타지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미야베 월드 2대부분의 작품이 귀신이나 혼령을 등장시킨 괴담과 기담에 가깝다면, ‘기타기타 시리즈는 여러 능력자의 도움을 받는 소박한 소년탐정이 명백한 현실 속 사건을 풀어가는 정통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는데, ‘귀신 저택역시 정의감과 약자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기타이치가 자신을 아껴주는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지원과 엄호를 받으며 비극적이고 참혹한 두 개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 수록작인 통수치기는 기타이치가 어릴 때부터 몸담았던 문고가게가 방화로 인해 소실된 사건과 그 와중에 벌어진 사악한 절도사건을 다룹니다. 한 여인이 방화범으로 지목된 채 종적을 감췄지만 그녀를 잘 아는 기타이치는 다른 사정이 있었을 거라며 방화 이면의 진상 파악에 나섭니다. 또한 화재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의 임시거처에서 거액의 도난사건이 발생하자 대중탕 가마 담당 기타지의 힘을 빌어 범인들을 잡기 위해 분투를 벌입니다.

두 번째 수록작인 귀신 저택28년 전 한 여인이 납치된 뒤 살해된 사건에 주목한 기타이치가 동일범에 의한 또 다른 범행의 가능성을 제기하며 연쇄 납치살인사건 조사에 전력을 기울이는 이야기입니다. 괴팍하지만 꼼꼼하고 뛰어난 검시관과 지금은 은거 중인 전직 관리의 마음까지 움직인 기타이치는 끝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지만 뜻하지 않은 장벽에 부딪히며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귀신 저택은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무게감도 대단하고 어둠의 농도도 상당히 짙은 작품입니다. 이제 막 17세가 된 기타이치가 감당하기엔 사건 자체도 잔인하고 흉악한데다 그 이면의 사연들은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비참합니다. 더구나 기타이치와 기타지의 활약으로 사건은 일단종결되지만, 누가 봐도 깔끔하게 마침표를 찍기 어려운 상태로 막을 내립니다. 말하자면 기타이치의 마음속엔 숱한 의문과 회한과 아쉬움이 남아있다는 뜻인데, ‘편집자 후기에 따르면 이어지는 시리즈 네 번째 작품에서 이 모든 잔념들이 해소된다고 합니다.

 

기타이치에게 이처럼 무거운 시련과 어려운 시험을 부여한 건 그를 한 뼘 이상 성장시키기 위한 미야베 미유키의 의도적인 채찍이라고 합니다. 기타이치는 세상을 떠난 오캇피키(하급관리의 지명을 받아 치안업무를 맡던 민간인) 센키치 대장에게 문고 행상 일을 배운 것은 물론 오캇피키로서의 자질도 물려받았는데, 미야베 미유키는 궁극적으로 기타이치를 뛰어난 오캇피키로 성장시킬 계획입니다. 지금은 마음만 앞서는 똑똑한 10대 소년에 불과하지만 에도 시대의 명탐정이자 모두에게 존경받는 오캇피키가 되려면 이만한 고비는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한다는 게 미야베 미유키가 구상한 큰 그림인 것입니다. 아마 시리즈 네 번째 작품에선 오캇피키가 되겠다는 기타이치의 꿈이 좀더 분명하고 구체화될 것 같은데, 과연 어떤 사건을 통해 그런 결심에 이를지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타이치와 기타지의 활약도 흥미롭지만, 매번 그들을 돕는 에도 후카가와 어벤저스의 활약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어릴 때 천연두로 시력을 잃었지만 대신 뛰어난 후각과 직감을 보유한 마님, 현대의 과학수사도 무색하게 만드는 뛰어난 검시관, 계급 따윈 개나 줘버린 인간미 넘치는 사무라이, 성미는 고약하지만 정보와 인맥과 경륜이 넘치는 셋집 관리인 등 기타이치의 뒷배를 자처한 능력자들의 매력은 귀신 저택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미야베 월드 2의 막내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기타기타 시리즈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와 함께 필생의 사업이라 칭하며 작가 인생의 대단원을 장식할 작품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올 가을엔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열 번째 작품이 출간된다고 하는데, 그에 못잖게 기타기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 기다려지는 건 미야베 월드 2의 팬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심정일 거란 생각입니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야베 월드 2시리즈별 소개

https://blog.naver.com/memories226/221539848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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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
그래디 헨드릭스 지음, 류기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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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캐럴 박사가 이끄는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은 끔찍한 대량 살인극에서 홀로 살아남은 여성 여섯 명으로 이뤄진 상담과 치유를 위한 모임입니다. 리넷 타킹턴을 비롯하여 그녀들이 겪은 비극은 20여 년 전인 1980년대에 벌어졌고, 모임은 어느 새 16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멤버들 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그룹 자체의 존폐가 거론될 무렵 이들은 또다시 악몽에 사로잡힙니다. 멤버 중 한 명이 대량 살인범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누군가 그룹 멤버 모두를 노리는 정황이 분명하다는 점. 이 사실을 눈치 챈 리넷 타킹턴은 멤버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범인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지만 뜻밖의 사태로 인해 오히려 멤버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물론 경찰에게 추적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파이널 걸은 슬래셔 무비 혹은 공포영화에서 대량 살인범의 만행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을 죽이거나 제압하는 역할을 맡곤 하는데, 영화는 가족 또는 연인과 감격의 포옹을 나누며 악몽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의 웃음으로 마무리되지만, 현실 속 파이널 걸의 진짜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심신의 상처, 술과 약물에 찌들어도 잊히지 않는 사건 당일의 기억, 호기심과 관음증의 대상이 되어 원치 않는 유명세를 타야 하는 절망감 등 파이널 걸에겐 죽어야만 끊어낼 수 있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은 대량 살인극의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온 여섯 명의 파이널 걸의 이야기이자 자신들을 노리는 대량 살인범과의 절체절명의 대결을 그린 작품입니다.

 

화자 역할을 맡은 리넷은 파이널 걸이 겪는 후유증과 트라우마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꼭 필요할 때 외엔 외출을 자제하며, 외출할 경우엔 단 한 시도 주위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않습니다. CCTV, 철망, 금고 등 갖가지 안전장치를 해놓은 집에서조차 안정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교도소에 수감 중인 범인이 언젠가 자신을 죽이러 올 거란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범인은 감형을 받은 뒤 슬래셔 무비의 모델이 되거나 추종자들의 환호를 받지만 피해자인 리넷의 악몽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멤버 중 한 명이 새로운 대량 살인범에게 살해당하자 리넷은 극도의 공포에 빠집니다. 더구나 자신은 기관총 습격을 받고 다른 멤버들도 갖가지 위기에 처하자 누군가 그룹을 노리고 살인극을 벌이려 한다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철저하게 개인정보를 감추며 살아온 멤버들에 대해 범인이 너무나도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멤버 중 누군가가 범인과 내통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남자들은 자기들 실수로 죽는다. 그럼 여자는? 우리는 여자라서 죽는다.” (p43)

 

슬래셔, 혹은 파이널 걸영화는 고기 분쇄기 같은 것이다. 제작자와 제작사 대표들이 기계를 돌리면, 남성 팬들이 침을 흘리며 그 폭력적이고 성적인 판타지를 덥석 받아먹는다.” (p61)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에서 눈길을 끄는 설정 중 하나는 여섯 명의 멤버 모두 자신이 겪은 사건이 영화로 제작된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영화들은 하나같이 남성 범인여성 희생자를 무자비하게 도륙하고 해체하는 슬래셔 무비로 만들어졌고, 실제 대량 살인극에서 홀로 살아남은 멤버들을 한낱 오락거리의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심지어 잔인무도한 대량 살인범의 캐릭터에만 공을 들임으로써 무참히 살해당한 여성들을 그야말로 이름 없는 소품처럼 취급하기에 이릅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대중의 뇌리에 남는 건 개성 강한 남성 범인일뿐 여성 희생자는 성적 또는 폭력적 판타지의 대상으로만 기억될 뿐인데, 이런 작태를 노골적으로 고발하려던 작가는 남성들을 위해 분쇄기에 쑤셔 박히는 고기취급을 받았던 파이널 걸의 이미지를 전복시킴으로써 새로운 대량 살인범에 저항하는 그녀들의 분투를 더욱 더 현실감 있게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슬래셔 무비의 탈을 쓴 슬래셔 무비라고 할까요?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이 단순한 액션스릴러를 넘어 여성 연대서사 혹은 시스터 서사로서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늘어지는 전개와 기대에 못 미친 미스터리(누가 새로운 대량살인범인가?) 때문에 조금은 야박한 평점을 줬습니다. ‘메인 요리인 리넷과 멤버들의 생존 투쟁기보다 사이드 메뉴인 슬래셔 무비 관련 서술이 더 눈길을 끈 것도 아쉬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파이널 걸 자체가 워낙 매력적인 소재인데다 시스터 서사가 탄탄하게 그려진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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