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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자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9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양병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예전에 인터넷 중고서점을 통해 구했지만,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의 론도’가 아니었다면 아마 몇 년은 더 책장 신세를 면치 못했을 작품입니다. ‘도착의 론도’에서 사건의 발단이 되는 주인공의 추리소설 제목이 ‘환상의 여인’인데다 그것이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차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설정되어 있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선 출판사에 따라 제목을 ‘환상의 여자’ 또는 ‘환상의 여인’으로 붙였습니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1942년 작 ‘Phantom Lady’는 세 가지 버전으로 국내에 출간됐는데, 제가 읽은 것은 2008년에 2판 7쇄(초판 1977년)를 찍은 동서문화사의 ‘환상의 여자’입니다. 초판이 워낙 오래돼서 그런지 등장인물의 이름도 최근 출간된 작품들과는 다르게 표기됐습니다. 존 롬바드(엘릭시르)와 잭 론버드(동서), 버지스(엘릭시르)와 바제스(동서)가 대표적 경우인데, 이 서평에서는 제가 읽은 동서문화사 표기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홍보카피에 따르면 “세계 3대 미스터리이며, 미스터리 팬이라면 읽지 않았어도 줄거리는 다 아는” 작품이라지만, 3대 미스터리라는 것이 일본에서 근거도 없이 갖다 붙인 타이틀이란 점은 진작 알고 있었고, 제 경우 나름 미스터리 팬을 자처하는 편이지만 무슨 이야기인지조차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유명세를 떨친 작품이고, 아직 못 읽은 고전이라는 점 때문에 약간은 숙제나 의무감 같은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습니다.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스콧 헨더슨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아내와 다툰 후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가 오렌지색 모자를 쓴 ‘환상의 여자’를 만나 늦은 밤까지 바, 극장, 레스토랑 등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사이 아내가 살해된 것입니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만 찾으면 무죄입증은 간단해지는데, 문제는 그녀의 이름이나 주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외모까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다 그녀와 함께 다녔던 바, 극장, 레스토랑은 물론 마주쳤던 택시기사, 거지 등 모두가 스콧 헨더슨은 기억하지만 곁에 있던 여자는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형일자가 점점 다가오는 가운데 그의 무죄를 믿는 형사 바제스의 권유로 스콧 헨더슨은 절친인 잭 론버드에게 ‘환상의 여자’를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론버드의 끈질긴 탐문에도 ‘환상의 여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목격자들이 한 명씩 기이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1942년 작임을 감안하더라도 요즘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에는 내용, 구성, 전개 모두 올드함이 과합니다. CCTV만 있었다면 금세 해결될 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설정, 수사(탐문)의 과정, 반전의 구조 등 미스터리의 뼈대 자체가 너무 허술하거나 개연성이 부족한 나머지 공감을 얻지 못 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밤이었고, 나란히 앉은 시간이 많았으며, 정신상태가 온전치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스콧 헨더슨이 ‘환상의 여자’의 외모를 전혀 기억하지 못 한다는 설정, 또 사건과 무관한, 더구나 몇 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가 중남미에서 날아와 마치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처럼 탐문을 벌인다는 설정, 그리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반전과 진범의 범행 동기 등이 대표적 예입니다.
실은 조금은 화가 난 상태로 서평을 쓰고 있는 중인데, 그건 작품 자체보다 제가 읽은 동서문화사의 번역본에 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명백히 직역이거나 일본식 번역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문장들 때문에 맥락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몇 번씩 다시 읽어도 그 의미가 모호한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드물지 않게 보이는 오타가 1977년 초판 이후 무려 30여년이 흘러 2판 7쇄가 되도록 고쳐지지 않은 건 이해할 수가 없었고, “있었소.”, “아닐세.”, “생각나오?” 등 사극 대사와 꼭 닮은 문장들 역시 초판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물론 오류투성이의 낡은 번역 때문에 작품 자체를 비난해선 안 되겠지만, 어쨌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에의 몰입을 방해했고, 그러다 보니 작품 자체가 가진 약점이 더 도드라져 보였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환상의 여자’가 지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분명 인정할 부분이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딱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미덕마저 온전치 못하게 만든 것은 명백히 불량한 번역과 30년 넘게 수정 한 번 하지 않고 재쇄만 남발한 출판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