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부 인터넷서점에서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분류해 놓았지만, ‘허즈번드 시크릿은 마크 해던의 빨간 집이나 넬레 노이하우스의 여름을 삼킨 소녀처럼 가족에게 닥친 불행, 가족으로부터 가해진 상처, 가족을 향한 분노를 다룬 비() 장르물에 더 가까운 작품입니다. 물론 제목대로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축은 남편의 비밀이고 미스터리 코드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 장르물의 훌륭한 미덕도 갖추고 있습니다.

 

소중한 딸이 살해당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절망과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력한 용의자 코너를 눈앞에서 매일 마주해야 하는 레이첼 크롤리, 우연히 발견한 남편 존 폴의 편지 한 통 때문에 하루아침에 일상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물론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날들이 잿더미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세실리아 피츠패트릭, 쌍둥이나 다름없는 펠리시티와 남편 윌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불륜 고백을 듣곤 어린 아들과 함께 친정으로 떠나게 된 테스 올리리 등 세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편이 7일 동안 겪은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기입니다.

 

딸을 앞서 보내고 이제 아들과 손자까지 멀리 떠나보내야 될 노인의 구원(舊怨)과 상심,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본 덕분에 남편의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된 아내의 갈등, 남편의 불륜에 증오심으로 맞대응하면서도 어린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아내의 혼란, 그리고 고부간, 형제간, 부모자식간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쏟아내는 관심, 애정, 의심, 증오, 시기, 질투 등 그야말로 가족을 둘러싸고 품을 수 있는 모든 극단적인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이 작품이 추리/미스터리로 분류된 것은 세실리아가 연 판도라의 상자 속 남편의 비밀 때문인데, 이 비밀이 초반부에 일찌감치 폭로되면서 이야기는 알게 된 비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어떻게 해도 가족의 붕괴를 막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세실리아의 고뇌와 이미 붕괴된 가족을 30년 가까이 겨우겨우 지탱해 온 레이첼의 상처는 뛰어난 장르물 못잖은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엔딩에 대한 궁금함과 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훨씬 더 강력해집니다. 또한 남편의 불륜에 항거하는 테스의 이야기는 보조축이면서도 불륜뿐 아니라 중년부부가 맞이할 수 있는 정서적 위기를 현실감 있게 다루고 있어서 말초적인 재미와 함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세 가족을 몰아넣은 작가가 어떤 엔딩을 택할지 무척 궁금했는데, 해피엔딩으로 끝나도, 작위적인 비극으로 끝나도 실망스러울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만, 작가는 한편으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엔딩을, 한편으론 전혀 예상 못 한 충격적인 엔딩을 선사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위기의 날들을 보낸 세 가족에게 어김없이 새날이 밝아오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독자는 이라고 인쇄된 페이지 너머에서 새롭게 시작될, 하지만 결코 순탄하지 않을, 아니, 오히려 행복과 불행, 믿음과 불신이 불안하게 공존할 그들의 남은 삶을 그저 안쓰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수는 사람의 영역이고, 용서는 신의 영역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첫 페이지의 제사(題詞)로 선택한 작가의 의도가 비로소 확 와 닿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종류의 감정이나 상황을 다룬 작품이든 중심 테마에 가족의~’ 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선입관이 떠오르게 되는데, 하나는 좀 뻔하고 지루하지 않을까?’라는 우려이고, 또 하나는 현실적이고, 묵직하고, 그래서 후유증이 길게 남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허즈번드 시크릿은 첫 선입관 때문에 잠시 선택을 미뤘다가 결국 읽고 나서 두 번째 선입관이 맞아든 것을 경험한 특별한 작품입니다. 가족에게 가해진 온갖 끔찍한 상처들을 들여다본 탓에 마음은 무겁지만, 농밀한 묘사와 짜임새 있는 구성 덕분에 빠른 속도로 재미있게 읽은 것도 사실입니다.

 

리안 모리아티가 자주 만나기 힘든 호주 작가이기도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력을 보고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가 그녀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그 역시 판타지적 재미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 결혼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작품이라는 걸 보면 아마도 허즈번드 시크릿과는 동전의 양면 같은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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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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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0년에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세 번째 장편입니다. 작년에 읽은 그녀의 첫 장편 퍼펙트 블루와 마찬가지로 신인 시절의 풋풋함과 초기작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본격적인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은 참혹하고 수사는 난항을 겪지만 사이즈로 보면 큰 규모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연쇄토막살인, 소년범의 양형 문제, 개인의 복수 등 다양한 코드들이 녹아있고, 보조축이긴 하지만 1945년 도쿄 대공습의 트라우마도 바탕에 깔려있어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읽을거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도 이 작품을 초기 대표작이자, 미야베 월드의 원형이라고 언급했는데, 독자에 따라 초기 대표작이라는 표현에는 찬반이 갈릴 수도 있지만, 미미 여사의 팬이라면 미야베 월드의 원형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동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관한 소개글을 인용해보면...

 

“(이야기의 주 무대인 도쿄 시타마치는)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얼간이와 같은 시대소설의 무대이자 이유솔로몬의 위증의 사건 현장이다. 또한 중학생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스토리는 솔로몬의 위증을 떠올리게 만들며, 토막 살인을 저지르며 경찰을 농락하는 범인들의 행각에서는 모방범이 생각난다. 그리고 가모우 저택 사건에서 비극적으로 묘사되는 1945년 도쿄 대공습은 형사의 아이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도쿄 시타마치의 경우 미미 여사 본인이 나고 자란 곳이면서 동시에 도쿄의 두 얼굴 - 현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여러 작품 속에 주 무대로 등장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좀더 맛깔나고 색다른 책읽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미미 여사 특유의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 덕분에 형사의 아이는 참혹한 사건을 다루는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편의 따뜻한 가족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엄하면서도 믿음과 애정을 감추지 않는 형사 아버지 미치오와 손자를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13세 소년에게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가정부 하나는 삶의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가족이자 미스터리를 함께 풀어가는 어른으로서 13세 소년 준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인물들입니다.

 

다만, 거장이 된 미미 여사의 대표작들을 떠올리며 큰 기대를 가진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심심한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연이어 발견되는 토막 난 사체들의 미스터리는 흥미를 유발시키는 요소지만, 사건의 계기와 진상, 그리고 그것들이 밝혀지는 과정은 나이브하면서도 비약에 의존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형사의 아이, 즉 형사를 아버지로 둔 13살 소년이 이야기를 이끄는데다, 결정적인 단서들이 획득되는 과정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행운과 우연에 기댄 경우가 많고, 막판에 설명되는 사건의 전모는 다소 모호한 구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들 때문인지, “여기서 미유베 미유키의 모든 전설이 시작되었다는 소개글은 조금은 과장된 듯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형사의 아이는 여러 면에서 미미 여사 본인의 프리퀄 같은 작품인 것이 분명하고, 그런 의미에서 거장의 초기작을 뒤늦게 읽으면서 그녀의 작품 세계가 구축되어 온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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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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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브레스트네메시스에 이은 오슬로 3부작의 마침표를 찍는 작품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엘렌 3부작, 또는 프린스 3부작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해리의 동료였던 엘렌의 피살 사건과 무자비한 살인범 프린스를 쫓는 이야기가

주축 스토리 - 악마의 별을 닮은 붉은 다이아몬드가 개입된 연쇄살인사건 에 못잖게

중요하고 무게감 있게 다뤄지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엘렌 사건으로 인해 거의 폐인이 된 해리의 참담한 모습과

그로 인해 파국에 이른 연인 라켈과의 관계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서사는 언뜻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몸통처럼 엮여 있는데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경찰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는 엉망진창의 해리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난제들입니다.

 

● ● ●

 

알코올중독, 무단결근, 명령 불복종 등 무수한 사유로 해고 직전에 이른 해리 홀레는

차세대 경찰 리더인 톰 볼레르와 함께 기이한 여성 연쇄살인사건에 투입됩니다.

깨끗한 한 발의 총상, 잘린 손가락, 현장에 남겨진 붉은 다이아몬드,

그리고 연쇄살인의 특징인 성폭행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사체 등

사건은 아무런 단서도, 동기도 드러내지 않은 채

해리와 볼레르를 비롯한 경찰에게 미궁만 산더미처럼 남겨놓습니다.

 

가까스로 범인의 의도를 파악하고,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는데 성공하지만,

사건은 해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오히려 해리는 경찰의 추격을 받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해리는 이번 연쇄살인사건의 큰 그림 속에

엘렌 살해범 프린스의 흔적이 어른거리는 것을 알아내게 됩니다.

 

● ● ●

 

그동안 읽은 해리 홀레 시리즈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데빌스 스타입니다.

분명 사건이 있고, 그것을 파헤치는 스릴러의 기본 서사를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요 네스뵈 스스로도 해리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언급했듯이

알코올에 찌들고,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할 정도로 폐인이 된

해리의 삶의 밑바닥을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눈앞의 범인은 잡지 못하고, 조직과 연인에게 버림받은 채

과도한 알코올과 치사량의 수면제에 의존하는 해리의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 마치 그의 고통이 전염돼오는 듯한 느낌까지 전해줍니다.

 

그래서인지 해리가 정면으로 마주친 연쇄살인사건은

두툼한 분량이나 난해한 해결과정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입니다.

물론 사랑과 질투,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이 바탕에 깔려있고,

신비한 악마의 기운, 파헤칠수록 꼬일 뿐인 복잡한 암호가 개입돼있으며,

동기와 단서는 실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기이한 연쇄살인 설정 덕분에

이야기는 한치 앞도 예상 못할 정도로 긴장감 있게 전개됩니다.

의외의 범인, 의외의 동기, 의외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데,

요 네스뵈는 거기에 덧붙여 이 사건의 진상 속에 해리의 절실한 숙제,

즉 엘렌 살해사건의 실마리를 얹어놓음으로써 후반부의 폭발적인 전개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데빌스 스타의 아쉬운 점을 한 가지만 꼽자면 과다하게 제공되는 정보입니다.

요 네스뵈는 단역부터 조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인물들에 대해

인구사회학적(?) 정보와 과거사를 꼼꼼할 정도로 설명하고 있는데,

간혹 없어도 무방하거나 이야기의 핵심에서 벗어난 과다한 정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또한,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비교설명이라든가, 암호해독에 관한 설명,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붉은 다이아몬드와 관련된 악령의 상징에 관한 설명 등도

적절한 분량 이상으로 할애되고 있어 약간은 지루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은 요 네스뵈 스스로 진짜 스릴러를 쓰고 싶었다.”고 공언했던 네메시스

빈틈없는 구성과 속도감, 긴장감으로 중무장한 진짜 스릴러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데빌스 스타가 받는 불이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렌 살해사건을 마무리 짓고 조직과 연인의 품으로 돌아간 해리 홀레의 다음 행보는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리디머(The Redeemer)’를 거쳐 스노우맨에 이릅니다.

그 이후 다시 망가진 해리가 경찰을 떠났다가 복귀하여 겪는 사건이 레오파드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실제로 해리 홀레 같은 진폭이 큰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불행이나 저주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레드브레스트부터 시작되어 해리 홀레의 어깨를 짓누르던 짐들은 사라졌지만,

스노우맨과 마주치기 전 그가 리디머에서 겪게 되는 고난은

어떤 색깔, 어떤 모양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레드브레스트이전 작품인 바퀴벌레(Cockroaches)’도 아직 미출간 상태지만,

개인적으로는 리디머가 빠른 시일 안에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족으로...

바로 데빌스 스타를 읽어도 맥락 따라잡기엔 큰 문제가 없지만,

아직 레드브레스트네메시스를 읽지 않은 독자라면

해리의 사연이나 감정, 엘렌 사건의 전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데빌스 스타전에 두 작품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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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콜렉터 30
아르노 슈트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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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관에 갇힌 채 생매장된 여자들의 시신이 잇달아 발견됩니다. 첫 피해자 잉에의 가족들은 의심받기에 충분한 여지들을 갖고 있지만 동기가 불분명합니다. 수시로 기억이 사라지는 증상을 겪는 에바는 관에 갇힌 채 생매장되는 악몽을 연이어 꾸면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의 다음 희생자가 자신이 아닐까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듯한 빈민가의 여인 브리타는 개자식이라는 욕만 내뱉을 뿐 그저 범인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전전긍긍할 따름입니다. 범인으로 보이는 익명의 남자는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채 다음 사냥감인 파렴치한 년을 찾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는 사이코패스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폭력성과 이혼의 상처를 지닌 형사 베른트가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띠 동갑 이상의 차이가 나는 여형사 유타와 분투합니다.

 


사건의 외양은 끔찍하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베른트를 비롯한 쾰른 경찰서 강력계의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 역시 딱히 누가 범인일까, 궁금증을 자아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끝까지 불안감과 긴장감을 놓지 못하는데, 그것은 심리 스릴러로 분류되는 이 작품만의 고유한 특징 때문입니다. 베른트 형사를 제외하고 모두 3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이끄는데, 작가는 사건 자체보다 이들이 겪는 극단적인 감정들, 즉 공포, 분노, 불안, 긴장을 묘사하는데 훨씬 더 많은 분량과 공을 들입니다.

 

뉴스 속 희생자들처럼 관에 갇혀 생매장되는 악몽에 시달리던 에바는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면서 두려움의 날들을 보냅니다. 집안 곳곳에서 감지되는 낯선 기운은 그녀를 살얼음 같은 공포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빈민가 아파트에 사는 거리의 여자 브리타는 뉴스를 보자마자 범인을 눈치챕니다. 그 사건 탓에 어릴 적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된 브리타는 범인을 증오하면서도 그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전율합니다. 전대미문의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익명의 남자는 고통을 통해 파렴치함과 더러움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이코패스로, 궁극의 사냥감을 향한 자신의 분노를 쉴 새 없이 자가발전 시킵니다.

 

세 인물이 내뿜는 극단적인 감정들은 정적이면서도 끊임없이 독자의 불안감을 증식시키고, 도대체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감정들을 갖게 한 것인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단서는 랜덤하게 던져지고, 세 인물의 과거와 현재는 쉽사리 접점을 찾기 힘들어 보입니다. 이런 심리 스릴러는 자칫하면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현에 천착한 나머지 서사의 맥을 놓치거나 뜬구름 잡는 만연체의 지루함만 남길 수도 있지만, 작가는 사건과 심리를 정교하게 직조함으로써 제법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듭니다.

 

거의 후반부가 다 되도록 ?”라는 질문에 전혀 대답하지 않던 작가는 느닷없이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며 모든 비밀을 폭로합니다. 독자의 반응은 대체로 잠시 말문이 막히거나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게 될 것이 분명한데, 사실 작가의 한 방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만 작가가 날린 마지막 결정타는 끝내주는 반전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그보다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참혹한 진실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플래시처럼 터지면서 온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동시에, 어딘가 정말 그들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그들이 겪은 오랜 고통은 누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걸까?, 라는 공허한 질문들이 입가에 맴도는 것을 느끼면서 마지막 장을 덮게 됩니다. 그리고 맨 앞으로 돌아가 처음엔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었던 첫 페이지의 제사(題詞)를 다시 한 번 읽으며 작가의 의도에 공감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소름 끼치는 광기의 싹이 잠자고 있다. 자신이 가진 가장 밝은 힘을 모두 쏟아 그것이 깨어나지 않게 노력하라!”

 

일부 아쉬움이 남는 대목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주인공인 형사 베른트의 캐릭터에 관한 것입니다. 아헨에서 쾰른으로 소속을 옮기게 된 그의 어두운 과거가 무척 궁금했는데, 일부 단서만 보였을 뿐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서 아쉬웠고, 전처와 사는 딸에 대한 애정이라든지 사이코패스를 상대하면서 느끼는 중압감에 대한 묘사는 조금은 뜬금없거나 억지스러워 보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서사와 문장 모두 가볍거나 깊이가 얕아 보이기도 했는데, ‘보다 먼저 국내에 출간된 그의 작품 스크립트를 읽어보면 그것이 작가의 고유한 특징인지 이 작품의 스토리에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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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교실 - 제4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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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착 시리즈로 잘 알려진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지만 그의 주특기인 서술 트릭이 아니라 학교 폭력의 잔인함과 공포, 그리고 20년이 지나 벌어지는 무자비한 복수를 다룬 본격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양념처럼 기괴한 호러 분위기가 살짝 가미되어 있습니다.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이야기는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20년 전인 1973, 아오바가오카 중학교 3학년 A반에서 벌어진 잔혹한 집단 따돌림, 20년이 지나 당시 반장과 부반장에 의해 추진되는 불길한 예감의 동창회, 그리고 동창회를 통해 20년 동안 간직해온 고통을 고스란히 갚아주려는 한 인물의 계획 등 출판사 소개대로 현기증 나는 다중 플롯과 다중 해결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독자가 찾아야 하는 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20년 전 3학년 A반의 집단 따돌림을 주도했던 수수께끼의 인물을 찾아야합니다. 마치 CCTV처럼 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지켜보던 이 인물에게 낙인찍힌 학생과 교사는 그 즉시 반에서 고립됨과 동시에 얼마 못가 자살, 전학, 사직이라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둘째, 20년 만에 열리는 모교에서의 동창회를 이용하여 전원 몰살이라는 극단적인 복수극을 꿈꾸는 인물을 찾아야합니다. 오랜 시간 억지로 봉인했던 아오바가오카 중학교에서의 고통스런 기억이 해제되면서 이 인물은 평생 씻기지 않을 상처를 남긴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할 철저하고 촘촘한 계획을 세워나갑니다.

셋째, 아오바가오카 중학교 학급명부와 살인계획서라는 메모를 소지한 채 교통사고를 당한 후 모든 기억을 잃은 탓에 혼란을 겪는 한 남자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인물도 많고 사건도 여럿이다 보니 독자가 소화해야 할 정보 역시 그만큼 방대하고 복잡해집니다. 또 찾아야 할 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서 한시도 느슨하게 책장을 넘길 수 없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20년 전 아오바가오카 중학교를 지배하고 있던 다분히 호러적인 분위기는 미쓰다 신조나 오노 후유미 풍의 괴담을 연상시켜 더욱 긴장감을 배가시킵니다.

 

사실 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중반쯤에 이르러 엔딩을 예상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까지 오리하라 이치가 설치해놓은 트릭 때문에 파격적인 반전과 연타로 폭로되는 진상들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이 방대한 분량을 빈틈없이 짜낸 작가의 필력에 여러 차례 놀라게 됩니다.

물론, 중간중간 조금은 무리한 설정들과 허술해 보이는 트릭도 눈에 띄긴 하지만, 작품 전체의 미덕을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호러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트릭과 소품들 역시 그 자체의 사실감을 따지기보다는 공포가 지배하던 20년 전의 교실을 묘사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쉽게 읽히지만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오리하라 이치의 문장들과 함께 학교괴담 + 복수극 + 미스터리라는 3종 세트를 한꺼번에 맛보고 싶다면 침묵의 교실이야말로 딱 맞아 떨어지는 텍스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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