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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1990년에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세 번째 장편입니다. 작년에 읽은 그녀의 첫 장편 ‘퍼펙트 블루’와 마찬가지로 신인 시절의 풋풋함과 초기작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본격적인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은 참혹하고 수사는 난항을 겪지만 사이즈로 보면 큰 규모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연쇄토막살인, 소년범의 양형 문제, 개인의 복수 등 다양한 코드들이 녹아있고, 보조축이긴 하지만 1945년 도쿄 대공습의 트라우마도 바탕에 깔려있어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읽을거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도 이 작품을 ‘초기 대표작이자, 미야베 월드의 원형’이라고 언급했는데, 독자에 따라 ‘초기 대표작’이라는 표현에는 찬반이 갈릴 수도 있지만, 미미 여사의 팬이라면 ‘미야베 월드의 원형’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동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관한 소개글을 인용해보면...
“(이야기의 주 무대인 도쿄 시타마치는)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얼간이’와 같은 시대소설의 무대이자 ‘이유’와 ‘솔로몬의 위증’의 사건 현장이다. 또한 중학생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스토리는 ‘솔로몬의 위증’을 떠올리게 만들며, 토막 살인을 저지르며 경찰을 농락하는 범인들의 행각에서는 ‘모방범’이 생각난다. 그리고 ‘가모우 저택 사건’에서 비극적으로 묘사되는 1945년 도쿄 대공습은 ‘형사의 아이’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도쿄 시타마치의 경우 미미 여사 본인이 나고 자란 곳이면서 동시에 도쿄의 두 얼굴 - 현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여러 작품 속에 주 무대로 등장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좀더 맛깔나고 색다른 책읽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미미 여사 특유의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 덕분에 ‘형사의 아이’는 참혹한 사건을 다루는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편의 따뜻한 가족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엄하면서도 믿음과 애정을 감추지 않는 형사 아버지 미치오와 손자를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13세 소년에게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가정부 하나는 삶의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가족이자 미스터리를 함께 풀어가는 어른으로서 13세 소년 준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인물들입니다.
다만, 거장이 된 미미 여사의 대표작들을 떠올리며 큰 기대를 가진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심심한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연이어 발견되는 토막 난 사체들의 미스터리는 흥미를 유발시키는 요소지만, 사건의 계기와 진상, 그리고 그것들이 밝혀지는 과정은 나이브하면서도 비약에 의존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형사의 아이, 즉 형사를 아버지로 둔 13살 소년이 이야기를 이끄는데다, 결정적인 단서들이 획득되는 과정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행운과 우연에 기댄 경우가 많고, 막판에 설명되는 사건의 전모는 다소 모호한 구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들 때문인지, “여기서 미유베 미유키의 모든 전설이 시작되었다”는 소개글은 조금은 과장된 듯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형사의 아이’는 여러 면에서 미미 여사 본인의 프리퀄 같은 작품인 것이 분명하고, 그런 의미에서 거장의 초기작을 뒤늦게 읽으면서 그녀의 작품 세계가 구축되어 온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