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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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지낸 1주일을 배경으로,

한편으론 프로이트가 직간접적으로 수사에 개입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한편으론 그의 정신분석학에 반발하는 기존 신경학계의 프로이트 죽이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실 속에 허구의 인물과 사건을 그려 넣은 작품은 많이 읽었지만

이처럼 상상력과 리얼리티가 완벽하게 조합된 작품을 만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미국 방문이 유쾌하지 못했다는 프로이트의 회고를 기반으로

작가는 그가 1주일 동안 머물렀던 뉴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를 창작해냈는데,

무엇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성()을 화두로 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학문적, 도덕적인 반발은 물론 인신공격까지 가했던 기존 신경학계의 공세를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풀어낸 점이 압권이었습니다.

 

더불어,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초고층 마천루로 새로 그려지던 1909년의 뉴욕에서

호화 아파트에 살던 젊은 여인이 참혹하게 고문 살해된 채 발견되고,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희생자가 겨우 목숨을 구한 상태로 발견된 사건은

우연한 인연이 겹치면서 프로이트와 이 작품의 주인공 스트래섬 영거 박사를

수사의 중심부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주된 이야기 역시 두 갈래로 진행됩니다.

클라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강연을 하기로 돼있던 프로이트와

그의 저서를 번역하여 출판할 예정이던 외과의사 에이브러햄 브릴에게

의문의 협박장과 실질적인 위협 행위가 연이어 발생합니다.

작가는 협박의 주체로 비밀 결사처럼 보이는 삼두회라는 조직을 초반부터 등장시키지만

이들의 동기와 궁극적인 목적은 작품 전체를 통해 천천히 드러냅니다.

 

오히려 메인이라 할 수 있는 고문살인사건에는 뉴욕의 신참형사 리틀모어가 활약하는데

그야말로 온몸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유들유들함으로 무장한 이 캐릭터는

프로이트의 자문을 받는 스트래섬 영거 박사와 콤비를 이뤄

끔찍한 살인사건의 실체를 밝혀 나갑니다.

리틀모어가 피해자와 용의자에 관한 정통 수사를 벌이는 동안

스트래섬 영거 박사는 두 번째 피해자인 17살 소녀 노라의 상담치료를 통해

사건 당일의 기억과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끌어내면서 진상을 파악합니다.

 

두 사건에 모두 관여하게 된 영거 박사는 원래 셰익스피어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강압으로 의사가 되어 신경학을 전공하다가 프로이트라는 거성을 만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작품 속에 햄릿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 프로이트 식 해석의 논쟁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면서 등장하고, 그것은 사건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됩니다.

아마 프로이트와 햄릿에 관한 충분한 사전 지식을 가진 독자라면

살인의 해석에서 좀더 특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문살인사건의 실체는 반전을 거듭한 끝에 영거박사와 리틀모어에 의해 밝혀지는데,

그 속도감이나 꼬임(?)의 정도가 너무 빠르고 심해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입니다.

독자에 따라 너무 많이 꼬아놓았다고, 그래서 작위적으로 보인다고 불편해할 수도 있는데

저 역시 그렇게 느껴진 부분이 좀 있긴 했습니다.

(어쩌면 속도감에 휘말려 너무 빨리 읽느라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부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이용하여 지어진 살인의 해석

얼굴마담으로 실존인물을 특별 출연시켰던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프로이트를 사건의 중심부에 위치시킴으로써 특별한 재미를 맛보게 해준 작품입니다.

비록 애피타이저 수준이지만 그의 정신분석학의 일면을 복습할 수 있었고,

햄릿에 대한 해석이라든가 사건 피해자의 억압된 기억을 복구하는 장면 등은

대학 시절 처음 프로이트를 대했을 때의 신기함과 놀람을 다시 연상시켜줬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거 박사의 입을 통해 작가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한

180도 다른 해석을 내놓는 대목인데,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스릴러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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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의 문제 진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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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별난 철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특이한 캐릭터 진구가 첫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수학 천재 중학생이었지만 아버지의 의문의 죽음 이후 삶 자체가 제 길을 벗어났고,

시큰둥한 호기심에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복수 전공했지만 그 역시 3년 만에 접었으며,

지금은 딱히 세상사는 목표 같은 것도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 그가 연인인 주해미와 함께 맞닥뜨리는 7편의 사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경찰, 유족, 직장동료로 변신해가며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동시에

아파트 한 채 값의 수입까지 올리는,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표제작 순서의 문제’,

셜록 홈즈처럼 사소한 진술을 들은 것만으로

사건의 전모를 눈앞에서 지켜본 듯 밝혀내는 대모산은 너무 멀다’,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자살로 결론 난 사건을 손바닥 뒤집듯 살인사건으로 변모시키지만,

인간의 너저분한 탐욕에 대해서만은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는 중편 티켓 다방의 죽음’,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위장된 알리바이의 허구를 파헤치는 것과 동시에

도진기 작가의 또 다른 히어로 고진 변호사와의 첫 만남을 그린 단편 뮤즈의 계시’,

그리고 진구와 해미의 프리퀄 격으로 첫 만남 때 마주친 살인사건을 그린 환기통

사이즈는 중단편이지만 각 편마다 뚜렷한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

진구라는 캐릭터와 처음 만나는 독자에겐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작품집입니다.

 

사실 진구는 그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정의감으로 뭉친 명탐정인가 하면, 법을 우습게 여기는 불량시민의 면모도 있고,

세상을 달관한 백수인가 하면, 돈에 관한 한 절대 뒤지지 않는 욕심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출판사의 책소개에 나온 진구에 대한 설명은 100% 공감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도덕과 정의를 위해 재능을 쓰는 여타의 탐정과는 달리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범죄에만 반응하고,

법망의 허점을 찾아내어 이용하는 데 일말의 주저도 없는 진구는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비상한 두뇌와 마비된 모럴(moral)로 범죄의 진실을 파헤치는 그는

가끔은 범죄자만큼이나 악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의 아슬아슬한 이중성을 보완해주는 것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해미의 역할입니다.

때론 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진구에게 있어 그녀는

그가 좋아할만한 사건을 물어다 주는 중요한 사건 브로커(?)이자

대책 없이 게으름을 부리고 싶을 때 정신이 번쩍 나게 해주는 냉수 같은 존재입니다.

진구의 천재성이나 사건의 해결 과정만큼이나 두 사람의 투닥대는 멜로 라인은

진구 시리즈를 읽는 또 다른 재미입니다.

 

냉철하고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하드보일드 명탐정도 좋아하고,

마음껏 천재의 끼를 발휘하는 안하무인 명탐정도 좋아하지만,

그 두 개의 얼굴을 모두 가진듯한, 그래서 더 애정이 가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진구는

앞으로의 성장과 활약상이 더욱 더 기대되는 매력덩어리 캐릭터입니다.

진구 시리즈의 최신작 가족의 탄생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 후속작이 기다려지는 것은 저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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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에게 고한다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0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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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범인과의 대결 구도 못잖게 흥미롭게 설정된 악역 경찰(특히 관료) 캐릭터입니다. 주인공은 범인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도 모자라 공을 빼앗고 과실을 떠넘기는 부패하고 사악한 관료들과 싸우느라 녹초가 되곤 합니다. ‘범인에게 고한다는 거기에 더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까지 얹어줌으로써 주인공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6년 전 벌어진 아동 유괴살해 사건 당시 마키시마는 특유의 감으로 범인을 포착했지만 무능한 관료들의 오판으로 인해 범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실책은 그가 뒤집어썼고 좌천을 피할 길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연이어 발생한 아동 유괴살해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가나가와 현경으로 그가 복귀합니다. 공교롭게도 그를 복귀시킨 본부장은 6년 전 그에게 모든 실책을 떠넘겼던 자입니다. 전대미문의 방식, TV뉴스를 통한 공개수사가 시작되고 마키시마는 배드맨이라 자칭하는 범인과의 소통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시민은 물론 경찰 내부에서조차 무리한 시도라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누군가는 6년 전 사건을 문제 삼아 마키시마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방송출연이 거듭될수록 마키시마는 점점 더 위기에 몰리고 사건해결은 요원해집니다. 결국 악화된 여론과 상부의 압력 때문에 또다시 희생양이 필요해진 본부장은 마키시마에게 1주일의 시한을 못 박습니다.

 


사건 자체는 복잡하거나 어려운 구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범인에게 고한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갇힌 형사, 경찰 내부의 추잡한 알력, TV를 통한 범인과의 접촉 시도, 시청률 경쟁에 나선 방송사의 보도행태 등 다양한 설정을 통해 서사의 폭을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미덕들 덕분에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책장은 술술 잘 넘어갑니다.

 

형식적인 특별함 외에도 범인에게 고한다는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들의 감정을 쉴 새 없이 요동치게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고, 웃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이 도드라진 작품입니다. 최근 읽은 검찰 측 죄인에서도 느낀 점이지만 시즈쿠이 슈스케가 건드리는 감정선은 묵직하면서도 시니컬하고 동시에 어딘가 쓸쓸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가족애라든가 화해와 용서를 다룰 때는 울컥함을 참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 마키시마가 부여받은 극단적인 상황과 감정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입니다. 잡지 못한 범인, 지키지 못한 피해자, 황폐해진 자신으로 인해 그늘이 드리워진 가족 등 마키시마의 삶은 너덜너덜한 누더기에 다름 아닙니다. 터무니없는 마녀사냥 식 비난과 굴욕적인 좌천은 합리적이고 온화했던 그를 변질시켜 증오와 분노를 삶의 동력으로 삼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6년 간 쌓여온 증오와 분노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터뜨려가며 소시오패스 배드맨과의 일전을 불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수사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거리낌 없이 제거하는가 하면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진범을 잡기 위한 에 기꺼이 출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대 초반의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어 아내와 딸, 손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모습이나 절망에 빠진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경찰의 길을 제대로 걷는 동료에게 애정과 믿음을 주는 모습은 그가 아무리 냉소와 비관에 길들여진다 해도 결국엔 자신의 본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마키시마 외에도 선과 악의 진영에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또 어딜 가든 하나쯤은 꼭 있을 법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어서 읽는 내내 생생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특히 고위 관료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포진한 경찰은 경찰캐릭터 백과사전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이나 사실감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다만, 배드맨의 단서를 잡고 체포하는 과정이라든가, 내부유출자를 찍어내는 이야기 등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조금은 덜그럭거리는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그것이 독자를 너무 과대평가한 작가의 불친절함과 설명 부족 탓인지, 너무 빠른 속도로 읽느라 중요한 대목을 놓치고 지나간 독자 탓인지는 확실하진 않습니다. 어쩌면 명쾌하고 선명한 이야기와 빠른 전개를 맛봤던 검찰 측 죄인을 읽은 지 얼마 안 돼서 저도 모르게 두 작품의 서사나 속도감, 밀도 등을 비교한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시즈쿠이 슈스케의 대표작인 두 작품을 연달아 만나게 돼서 반가웠고, 특히 애호 장르인 법정물과 경찰소설이어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범인에게 고한다TV뉴스가 작품 속 중요한 설정이라 영상물로 제작될 여지가 많다고 여러 번 느꼈는데 검색해보니 2007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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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음모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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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존 그리샴의 작품에 열광했던 기억 때문인지 여전히 그의 신작 소식이 들리면 여느 작가의 작품보다 귀가 솔깃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에 읽은 그의 작품들이 초기작들에 비해 여러 가지 아쉬움을 남겨주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명성과 필력에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잿빛 음모의 원제는 ‘Gray Mountain’인데 남자주인공인 도노번 그레이의 집안에 대대로 물려 내려온 산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애팔레치아 산맥의 한줄기인 그레이 마운틴은 인근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석탄 재벌의 탐욕과 끔찍한 노천 채굴에 의해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그로 인해 도노번과 제프 형제의 부모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이들 형제 뿐 아니라 놀런드 카운티 일대에는 석탄 재벌들의 횡포로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이 망가진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정재계나 법조계와 공생 관계를 맺은 석탄 재벌들은 그저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온갖 불법을 태연히 자행할 따름입니다.

 

이런 놀런드 카운티에 29살의 무늬만 변호사인 서맨사 코퍼가 흘러들어옵니다. 뉴욕의 초대형 로펌에 몸담았던 서맨사는 금융위기 속에서 해고된 후 의료보험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지못해 자원봉사 자리를 찾던 중 벽지나 다름없는 놀런드 카운티에서 일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소송에 참여한 적도 없거니와 법정 구경조차 한 적 없는 서맨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 변호를 맡아온 매티와 애넷, 그리고 석탄 재벌의 비리에 저항하는 도너번-제프 형제와 만남을 거듭하면서 점차 진짜 변호사로 성장합니다. 때론 석탄 재벌의 하수인들에게 미행과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힘없는 의뢰인들의 비극을 직접 목격하거나 함께 싸우던 동료를 잃기도 하지만, 서맨사는 더 이상 자신이 있을 곳이 뉴욕이 아님을 조금씩 깨달아갑니다.

 


잿빛 음모는 독자들의 기대와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서맨사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된 상대가 석탄 재벌이라기보다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필로폰중독자, 유언장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유족들, 부당한 해고와 착취를 일삼는 소규모 공장 등 무력한 개인들을 못살게 구는 소소한 악당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맨사와 도노번 형제가 온힘을 다해 맞서 싸우는 이 너무 많거나 혹은 구체적이지 않다는 점도 또 한 가지 이유입니다. 석탄 재벌이 주적으로 설정돼있긴 하지만, 선명하고 구체적인 한 명의 악당이 아니라 약간은 집단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이다 보니 서맨사와 그들의 대결 구도나 갈등의 양상은 대체로 두루뭉술하게 묘사될 뿐입니다.

 

이런 특징은 속 시원한 권선징악이라는 일반적인 법정 스릴러의 공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품었던 독자라면 양념이 덜 들어간 심심한 음식을 먹는 기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잿빛 음모의 가장 큰 미덕은 명문대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대형 로펌의 부속품이 되어 그저 고액 연봉의 장밋빛 미래만 바라보며 껍데기만 변호사인 목적 없는 삶을 살던 서맨사 코퍼가 진짜 변호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리얼하게 그려낸 데 있습니다.

 

다소 진부하지 않나, 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는 스토리지만 존 그리샴의 노회한 필력이 빚어낸 맛깔난 문장들은 그런 우려를 충분히 불식시킵니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은 물론 공간적 배경인 놀런드 카운티와 애팔레치아 산맥 일대의 불온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풍광,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사건들과 그에 저항하는 선한 인물들의 노력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는 노장의 오랜 명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마지막 통쾌한 한 방의 부재(不在)는 끝까지 아쉬움이 남았지만, 1년에 한 편 꼴로 작품을 낸다는 그의 후속작에 대한 기대는 아직까지는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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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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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 강간살인을 저질렀지만 공소시효를 통해 벌을 피했던 자가 강도살인 용의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됩니다. 누군가는 23년 전의 죄를 묻기 위해 그에게 누명을 씌워서라도 강도살인의 진범으로 몰아가기로 작심합니다. 반면 누군가는 그의 과거를 사면해준 공소시효와 그가 저지른 흉악한 범죄에 분노하면서도 그가 이번 강도살인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곤 그의 누명을 벗겨주려고 합니다.

 

흥미로운 건 두 명의 누군가가 모두 유능한 검사들이란 점입니다. 다만, 한 사람은 23년 전의 피해자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검사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검사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정의에 대한 관점도, 수사의 목적도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누구를 응원하고 싶을까요?

 


개인적으론 과거의 죄를 묻기 위해 누명을 씌워서라도 악당을 징벌하려는 검사의 편입니다. 하지만 거기엔 엄청난 딜레마와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명을 씌운다는 행위 자체도 그렇지만, 그로 인해 강도살인의 진범이 법의 심판을 벗어나게 된다는 딜레마도 발생하고, 과연 그런 행위가 과거의 죄를 제대로 심판할 수 있느냐는 갈등도 일어납니다. ‘검찰 측 죄인은 바로 그런 딜레마와 갈등을 정면으로 파고든 걸작입니다.

 

사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도 이 딜레마와 갈등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즈쿠이 슈스케는 오히져 정반대의 길, 그러니까 독자에게 한없이 무거운 감정과 숙제를 내준 채 작품을 마무리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법이 정한 정의와 내가 정한 정의 사이의 간극은 메워질 수 있는가? 법이 포기한 악인에 대한 사적 심판은 과연 정의인가? 체포되지 않았더라도 그만한 시간이면 징벌에 준하는 고통을 충분히 받았다고 규정한 공소시효란 과연 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작가는 굳이 반전의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돌직구처럼 처음부터 독자에게 모든 패를 내보인 채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엄청난 에너지와 가속의 힘을 지닙니다. 그래서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이지만 한나절도 안 돼 끝까지 내달릴 수 있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보면 셀프 스포일러가 적잖이 담겨있습니다. 법정 미스터리나 공소시효, 원죄, 검사들의 세계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작품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운 좋게 시즈쿠이 슈스케의 대표작인 범인에게 고한다를 최근에 손에 넣었는데, ‘검찰 측 죄인을 보고 나니 당장이라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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