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음모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초창기 존 그리샴의 작품에 열광했던 기억 때문인지 여전히 그의 신작 소식이 들리면 여느 작가의 작품보다 귀가 솔깃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에 읽은 그의 작품들이 초기작들에 비해 여러 가지 아쉬움을 남겨주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명성과 필력에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잿빛 음모의 원제는 ‘Gray Mountain’인데 남자주인공인 도노번 그레이의 집안에 대대로 물려 내려온 산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애팔레치아 산맥의 한줄기인 그레이 마운틴은 인근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석탄 재벌의 탐욕과 끔찍한 노천 채굴에 의해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그로 인해 도노번과 제프 형제의 부모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이들 형제 뿐 아니라 놀런드 카운티 일대에는 석탄 재벌들의 횡포로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이 망가진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정재계나 법조계와 공생 관계를 맺은 석탄 재벌들은 그저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온갖 불법을 태연히 자행할 따름입니다.

 

이런 놀런드 카운티에 29살의 무늬만 변호사인 서맨사 코퍼가 흘러들어옵니다. 뉴욕의 초대형 로펌에 몸담았던 서맨사는 금융위기 속에서 해고된 후 의료보험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지못해 자원봉사 자리를 찾던 중 벽지나 다름없는 놀런드 카운티에서 일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소송에 참여한 적도 없거니와 법정 구경조차 한 적 없는 서맨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 변호를 맡아온 매티와 애넷, 그리고 석탄 재벌의 비리에 저항하는 도너번-제프 형제와 만남을 거듭하면서 점차 진짜 변호사로 성장합니다. 때론 석탄 재벌의 하수인들에게 미행과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힘없는 의뢰인들의 비극을 직접 목격하거나 함께 싸우던 동료를 잃기도 하지만, 서맨사는 더 이상 자신이 있을 곳이 뉴욕이 아님을 조금씩 깨달아갑니다.

 


잿빛 음모는 독자들의 기대와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서맨사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된 상대가 석탄 재벌이라기보다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필로폰중독자, 유언장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유족들, 부당한 해고와 착취를 일삼는 소규모 공장 등 무력한 개인들을 못살게 구는 소소한 악당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맨사와 도노번 형제가 온힘을 다해 맞서 싸우는 이 너무 많거나 혹은 구체적이지 않다는 점도 또 한 가지 이유입니다. 석탄 재벌이 주적으로 설정돼있긴 하지만, 선명하고 구체적인 한 명의 악당이 아니라 약간은 집단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이다 보니 서맨사와 그들의 대결 구도나 갈등의 양상은 대체로 두루뭉술하게 묘사될 뿐입니다.

 

이런 특징은 속 시원한 권선징악이라는 일반적인 법정 스릴러의 공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품었던 독자라면 양념이 덜 들어간 심심한 음식을 먹는 기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잿빛 음모의 가장 큰 미덕은 명문대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대형 로펌의 부속품이 되어 그저 고액 연봉의 장밋빛 미래만 바라보며 껍데기만 변호사인 목적 없는 삶을 살던 서맨사 코퍼가 진짜 변호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리얼하게 그려낸 데 있습니다.

 

다소 진부하지 않나, 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는 스토리지만 존 그리샴의 노회한 필력이 빚어낸 맛깔난 문장들은 그런 우려를 충분히 불식시킵니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은 물론 공간적 배경인 놀런드 카운티와 애팔레치아 산맥 일대의 불온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풍광,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사건들과 그에 저항하는 선한 인물들의 노력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는 노장의 오랜 명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마지막 통쾌한 한 방의 부재(不在)는 끝까지 아쉬움이 남았지만, 1년에 한 편 꼴로 작품을 낸다는 그의 후속작에 대한 기대는 아직까지는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