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었던 소녀 스토리콜렉터 41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임상심리학자 조 올로클린은 전작인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 자신이 관여한 사건으로 인해 현재 가족과 별거 중입니다. 파킨슨병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조를 사랑했던 아내 줄리안이지만 가족의 목숨까지 경각에 빠뜨린 그의 오지랖 넓은 정의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조는 어떻게든 가족들과 재결합하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지만, 또다시 치명적인 사건이 운명처럼 조를 찾아옵니다. 조의 큰딸 찰리의 절친인 시에나가 전직 경찰인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심리적 불안 상태에 빠진 시에나를 상담한 조는 경찰의 주장과 달리 그녀가 범인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 누군가 시에나를 조종하여 그녀의 몸과 마음을 망쳤으며, 바로 그 누군가가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믿습니다.

 

내 것이었던 소녀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2005년에 출간된 용의자1, 미출간작인 ‘The Drowning Man’2, ‘산산이 부서진 남자3편입니다. 마이클 로보텀과 처음 만난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는 크게 못 느꼈던 점인데, 이번 작품을 통해 그의 글빨이 대단하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의 위기와 지독한 심리전 등 피와 살이 튀는 잔혹한 스릴러 이상의 다양한 코드들을 너무나도 잘 버무려 놓았습니다. 비유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적절하고, 유머는 촌철살인에 가깝습니다. 캐릭터도, 구성도, 사건의 전개도 매력적이고 절묘합니다. 딱 한 가지,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사건들을 한 줄의 실에 꿰기 위해 이야기 막판에 약간의 무리수를 둔 점은 다분히 작위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었던 소녀는 전작보다 확실히 진화한 작품임에 분명했습니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가 여타 스릴러 시리즈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임상심리학자라는 그의 직업에 있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의 서평에서 범인은 사람의 마음을 부수는 반면, 조는 부서진 사람의 마음을 이어 붙여 온기가 되돌아오게끔 도와줍니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내 것이었던 소녀에도 역시 누군가의 마음을 움켜쥔 채 마음껏 조종하며 유린하는 희대의 악마가 등장하고, 조는 그의 심리를 파악하여 과거와 현재의 행동의 양태를 밝혀냅니다.

물리적 수사만으론 밝혀내기 힘든 범인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과 행동의 양식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희생자들의 무너진 마음이 재건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때론 그런 과정들이 빠르고 독한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마이클 로보텀은 사건과 심리를 적절히 안배하여 그런 지루함을 사전에 차단해놓습니다.

 

가족의 문제역시 이 시리즈에서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인데, 조는 매력적인 사건 해결사지만 동시에 가족을 잃은 가장, 큰딸에게 단절감을 느끼는 아버지, 그리고 파킨슨병과 중년의 위기로 심신을 다친 무력한 남자이기도 합니다. 마이클 로보텀은 단순히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조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와 솔직하게 대면하게 함으로써, 또 자신 때문에 벌어진 아내와 딸과의 간극을 통렬히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공감과 연민을 이끌어냅니다. 어쩌면 스릴러 자체보다 조의 인간적인 갈등에 더 매력을 느끼는 독자가 많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두 개의 사건을 무리하게 연결시킨 부분은 앞서 얘기한대로 이 작품의 유일한 아쉬움입니다. 아무래도 단선적인 스토리를 극복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이는데,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도 이런 작위성이 살짝 엿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로보텀의 신작들이 계속 기대되는 이유는 매력적인 글빨과 너무나도 인간적인 조의 캐릭터, 그리고 개성 강한 그의 도우미들 여경감 베로니카와 퇴직 경찰 빈센트 때문입니다. 절판됐거나 아직 소개되지 않은 시리즈 첫 두 편은 물론 해외에서 출간된 신작들도 빠른 시일 안에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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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럭
야쿠마루 가쿠 지음, 민경욱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5년 전쯤 천사의 나이프를 통해서였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읽고 소년범죄에 관심이 있어 찾아본 작품이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차분한 문장 속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심리를 잘 그려냈다는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건을 풀어가는 솜씨 역시 현란하진 않지만 무척 리얼했던 것 같구요.

 

하드 럭은 야쿠마루 가쿠와 두 번째로 만난 작품인데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받은 인상은 천사의 나이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실감 넘치는 사회파 스타일의 소재,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 주인공의 상황,

정통 미스터리이면서 사건 못잖게 인물들의 심리를 지켜보게 만드는 서사의 힘 등

미스터리에 문외한이라도 한번 잡으면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하는 필력을 갖춘 작품입니다.

 

● ● ●

 

주인공 아이자와 진은 그야말로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절망적인 청춘입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 한탕을 위해 일면식도 없는 자들을 동료 삼아 범죄를 기획합니다.

하지만 거사(?) 당일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맙니다.

실명도 모르던 동료들은 모두 현장에서 사라졌고,

눈앞에서는 세 구의 시신과 함께 저택이 불타오릅니다.

누군가 자신들의 계획에 끼어들어 모든 것을 망쳐놓은 것입니다.

유일하게 실명과 얼굴이 노출된 자신은 살인강도에 방화범으로 몰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아이자와 진은 경찰에 쫓기게 되지만, 끝까지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 ● ●

 

전형적인 사기부터 음험한 범죄중개, 개인정보 매매 등 다양한 범죄가 등장하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그 현상 자체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물론 나름 빈부의 문제, 가족의 문제 등 일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긴 하지만,

그것을 교훈적이거나 선언적인 투로 강요하진 않습니다.

즉 사회적인 병폐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범죄 등 구조적인 문제를 강조하기보다는

철저하게 개인 하나하나의 행동과 심리와 동기에 천착하면서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그래서인지 (경찰 외에) 선한 인물이라곤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악인들마저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묘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한때는 선한 시민이자 억울한 피해자였지만

결국엔 남의 돈을 탐낸 명백한 범죄자로 전락하는 주인공의 삶을 지켜보면서

구조의 문제개인의 문제라는 두 가지 차원의 담론을 혼돈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지만 결국 탈출구는 범죄밖에 없었다는 참혹한 구조적현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치면서 사건의 진실을 캐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개인의상황이

정교하게 직조되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발 잡히지 말고 진범을 찾아내줘!”라고 응원하다가도,

, 이 친구는 어쨌든 범죄를 저질렀잖아?’라는 자문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나머지 한 축으로 등장하는 경찰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좀 심심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애초부터 주인공의 진실 찾기를 위한 조연으로 설정된 바,

그 나름대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점에서는 크게 일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분량 속에 현실적인 소재와 미스터리 구성을 잘 버무린 하드 럭

재미와 함께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입니다.

좀더 현란한 문장과 자극적인 설정을 갖고 왔다면

야쿠마루 가쿠는 진작에 더 큰 이름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담담한 느낌이 들면서도 알차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필력은

오히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악당어둠 아래등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작품들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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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7 7 시리즈
케리 드루어리 지음, 정아영 옮김 / 다른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법정에서 피고인을 재판하는 사법 제도가 폐지되고, 국민이 직접 재판하는 제도가 도입된다.

특히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은 7일 동안 TV 뉴스쇼에 신상이 공개되고,

시청자들은 전화, 문자, 인터넷을 이용해 무죄 혹은 유죄에 투표한다.

그리고 7일째 날 최종 집계 결과 유죄가 나오면 즉시 사형을 집행한다.

빈민가 출신의 열여섯 살 소녀 마사 허니듀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던

유명인 잭슨 페이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1번 수용실에 수감된다.

마사는 최초의 10대 여성 수감자, 투표가 이루어지는 7일 동안

매일 수용실을 옮기며 전기의자가 있는 7번 수용실로 향한다.

마사는 자신이 잭슨 페이지를 죽였다고 자백하여 사실상 사형이 확실시되지만,

마사의 상담을 맡은 이브 스탠턴은 마사가 뭔가 감추고 있음을 직감하고 비밀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브는 소름끼치는 음모를 마주하게 된다.

(출판사 줄거리를 일부 수정하여 인용하였습니다)

 

● ● ●

 

중세의 마녀사냥 이래 대중의 광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공할 독성을 지녀왔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터넷이나 미디어의 힘과 뒤섞여 거친 화학반응을 일으킬 경우

대중의 광기는 그 어떤 합리적 논리와 이성적 판단까지도 마녀로 몰아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7’은 그 광기가 사법의 영역까지 장악한 우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습니다.

법정은 문을 닫았고, 법조인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목격자도, 증거도 필요 없고 단지 대중의 증오심만으로 인명을 빼앗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도발적인 영상과 멘트로 용의자의 흉포함을 강조하고,

대중은 비디오게임처럼 미친 듯 유료투표를 하며 무자비한 사형집행을 갈망합니다.

 

정치권력은 이런 사법제도를 통해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를 능가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대중은 누군가의 죽음을 갈망하면서 희열을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이 그 쇼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와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반하는 말과 행동은 금지되며, 독재자에게는 무한한 애정만을 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언제든 사형당할 확률이 99%’1번 수용실로 끌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6살의 소녀 마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체제를 붕괴시키기로 마음먹습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스스로 사형수가 되는 길이었다는 점입니다.

독자는 체제에 대한 정면 공격이 아니라 스스로 사형수가 되는 것

어떻게 이 견고한 디스토피아를 무너뜨리게 될까 궁금히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작가는 수용실에 갇힌 마사의 최후의 1주일과 살인이 일어나기 전 과거의 사건들을

주요 인물들의 관점을 통해 교차 편집하듯 보여줍니다.

그를 통해 마사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조금씩 흘리는 것과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사법제도를 둘러싼 다양한 개인/집단 간의 극단적 갈등을 세세히 묘사합니다.

 

새롭고 독특한 소재인데다, 선명한 스토리 때문에 페이지는 쉽게 넘어갑니다.

우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기 위해 현학적인 문장들이나 모호한 철학을 동원하지도 않습니다.

사형수가 된 마사, 그녀를 도와주려는 상담사 이브, 직업을 잃은 전직 대법관,

피에 굶주린 듯한 쇼의 진행자 등 다채롭고 호기심 넘치는 캐릭터들도 쉽고 매력 있습니다.

적절한 미스터리와 반전, 교훈적이지도 이분법적이지도 않은 엔딩 역시 괜찮은 미덕입니다.

 

다만, 이런 심플함7’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기도 합니다.

7’이 그린 디스토피아는 조금은 과장되거나 단순하게 도식화된 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 오게 된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보니 사실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마사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미디어나 대중의 광기 역시 쉽게 공감하기 어렵게 됩니다.

디스토피아 이야기가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안 살아봤지만 직접 살아본 것처럼 생생히 느껴지는 어떤 세상에 대한 공포의 공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좀더 깊고 세세한 설명이 있었다면,

그 세상에 만연한 대중의 광기가 내뿜는 공포에 대해 좀더 독자의 공감을 끌어냈더라면

위에서 언급한 아쉬움들이 많이 덜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견고한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주인공이 10대이다 보니

사건의 규모나 극성(劇性)은 물론 철학적인 깊이가 얕아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한계는 후반부에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기 전까지 내내 느껴지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또래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던 헝거 게임이나 배틀 로열처럼

좀더 독한 설정이 첨가됐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랬다면 재미와 함께 철학적인 의미도 획득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물론 이 작품을 쓴 의도와는 거리가 먼 얘기일 수도 있지만요..)

 

7’의 뒷이야기를 다룬 데이 7’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후속작에서는 좀더 피부에 와 닿는 디스토피아의 진면목이 그려지기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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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우 - 비밀을 삼킨 여인
피오나 바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레드박스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4년 전 유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던 글렌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그의 아내 진은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그녀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희생자일까?

수많은 언론사의 제의를 뿌리치며 침묵을 지키던 진이

어느 날 베테랑 여기자 케이트의 독점 인터뷰에 응하면서

베일에 싸여 있던 남편과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출판사 소개글 인용)

 

● ● ●

 

최근 들어 가족에게 닥친 비극 또는 부부간의 심연처럼 깊은 갈등을 다룬 작품들은

예외 없이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나 폴라 호킨스의 걸 온 더 트레인를 언급하며

독자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어필하곤 합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스티븐 킹은 “‘나를 찾아줘걸 온 더 트레인을 좋아한다면

이 책도 읽고 싶을 것이다.”라는 추천사를 썼습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나를 찾아줘를 빗대어 홍보한 작품 가운데

100% 공감할 수 있었던 작품은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홍보글 때문에 나를 찾아줘의 판매고만 더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위도우, 비밀을 삼킨 여인나를 찾아줘를 홍보 포인트로 삼은 작품 가운데

그래도 만족도가 꽤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반전이나 충격은 그리 센 작품은 아닙니다.

진실 자체보다 그것이 드러나는 과정, 즉 심리적인 묘사에 주력한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마지막 장까지 매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구성의 힘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봅니다.

 

우선, 네 명의 화자가 등장합니다.

유괴 용의자 글렌의 아내 진, 담당 형사 밥 스파크스, 베테랑 여기자 케이트 워터스,

그리고 유괴된 3살 소녀의 엄마 던이 그들입니다.

이들의 시선을 통해 독자는 동일한 사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네 화자의 치열한 공격과 수비는 얼핏 단순해 보이는 유괴사건의 진상을

점점 더 모호하고 복잡하게 만들어갑니다.

 

이외에도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교묘히 교차시킴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사건이 일어났던 2006년을 배경으로는 초동 수사과정과 언론의 집요한 취재는 물론

용의자로 지목된 글렌과 아내 진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어 현재 시점인 2009~2010년을 배경으로는 거의 미제에 그칠 뻔 했던 사건이

새로운 단서와 함께 재점화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듯 네 명의 화자, 과거와 현재의 교차 편집은

단순히 복잡하게 꼬아놓았다는 것 이상의 힘을 지니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기자와 경찰의 역할은 전형적인 모습을 보일 뿐이지만

딸을 유괴당한 던과 용의자의 아내로 전락한 진의 심리나 행동의 변화는

이런 구성의 힘 덕분에 훨씬 더 생생하고 긴장감 있게 그려집니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인 진의 캐릭터나 그녀가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실제로 나를 찾아줘걸 온 더 트레인을 연상시킵니다.

 

부제인 비밀을 삼킨 여인은 말할 것도 없고,

훌륭한 아내, 그게 이제 내 역할이다. 남편 곁을 지키는 훌륭한 아내라는 뒷 표지 카피는

언뜻 진을 남편의 공범으로 예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꾸로 혹시 그녀는 희생자인가?’라고 의심케 만드는 카피이기도 합니다.

네 명의 화자, 과거와 현재의 교차라는 구성의 힘은

마지막 장까지 그녀를 가해자와 희생자 중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굳이 이 작품의 아쉬운 점을 꼽자면 분량의 문제입니다.

워낙 어마어마한 분량의 작품이 쏟아지는 요즘이라

겨우(?) 444페이지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중간중간 동어반복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등장하면서 좀 느슨해진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조금만 정리됐더라면 훨씬 더 몰입도도 높아졌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올해의 기자상까지 받았던 기자 출신 작가의 데뷔작이 이 정도라면

이후에도 사실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픽션을 자아내리라 기대해봅니다.

피오나 바턴이라는 이름이 과연 길리언 플린을 넘어설지 궁금해지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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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산 형사 베니 시리즈 1
디온 메이어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남아공의 스릴러 작가 디온 메이어와는 지난 해 봄 오리온을 통해 처음 만났습니다.

극심한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경찰 출신의 초보 사립탐정 판 헤이르던을 앞세운 오리온

남아공의 비극적인 역사와 판 헤이르던의 개인사를 잘 조합한 속도감 넘치는 스릴러였다면,

악마의 산은 아동 상대 범죄와 전통 무기를 이용한 연쇄살인이라는 잔혹한 사건과 함께

자의반, 타의반으로 심신이 붕괴된 인물들의 심리를 좀더 강조한 묵직한 작품입니다.

 

악마의 산은 크게 세 인물의 이야기로 정리됩니다.

우선,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가족에게 내쫓긴 후 술독에 빠진 자신과의 전쟁을 벌이며

아동성폭행범만 골라 죽이는 연쇄살인마 체포에 나선 중년 경찰 베니 그리설이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오리온에서 주인공을 돕는 역할로 특별출연(?)한 뒤

후속작인 프로테우스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코사족 출신의 흑인 토벨라 음파이펠리는

좀도둑들에게 ()아들을 잃은 뒤 연쇄살인마로 변신하여 피의 향연을 벌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압적인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던 크리스틴은

불장난 같은 사랑의 결과로 얻은 딸과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며 살아가던 중

악마와도 같은 마약상을 만나면서 파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디온 메이어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을 통해 세 인물의 행로를 찬찬히 보여줍니다.

각각 별개의 것처럼 보이던 세 인물의 이야기는 점점 한 방향으로 수렴되다가

베니 그리설이 개인의 복수로 보이는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을 맡게 되고,

크리스틴과 그녀의 딸이 그 사건에 연루되면서 한길로 모입니다.

중반부에 좀 못 미친 지점까지 세 인물의 과거와 현재가 비교적 밀도 있게 묘사된 탓에

독자에 따라서는 서설이 너무 길고 장황하다라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 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왜 작가가 긴 서설을 택했는지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

 

범인은 초반부터 노출되고, 이야기 역시 충격과 반전보다는 예정된 순리(?)대로 전개되지만

이는 속도보다는 깊이, ‘누가?’보다는 ?’에 초점을 맞춘 작가의 의도 때문입니다.

뛰어난 능력과 발군의 수사력 덕분에 장래가 촉망되던 형사였지만

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하는 스트레스로 인해 알코올중독에 빠진 베니 그리설은

가장이자 중년남자로 살아가야 하는 개인의 고민은 물론

남아공에서 백인 경찰로 살아가야 하는 스트레스까지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또 한때 비밀 암살요원으로 암약했던 토벨라는 비극적인 사고로 ()아들을 잃으면서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복수를 위해 또다시 손에 피를 묻히기로 결심하지만

복수가 거듭될수록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고뇌와 갈등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항적인 소녀 크리스틴이 생계를 위해 콜걸로 변신하는 과정과

악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모습은 빈부, 마약, 성매매 등

남아공에 만연한 사회적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대했던 것만큼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사적 복수의 문제역시 중요한 테마입니다.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야기한 사적 복수에 대해

디온 메이어는 어느 한쪽의 주장보다는 찬반론을 공정하게 배분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경찰 내에서조차 사적 복수를 감행하는 연쇄살인마를 놓고 지지와 증오로 갈리는 장면이나

사적 복수에 나선 토벨라가 매번 과거의 살인기계답지 못한 소심함과 갈등을 겪는 장면,

또 사적 복수에 반대하던 베니 그리설이 정작 자신의 문제가 됐을 때 겪는 혼란 등을 통해

디온 메이어는 독자 개개인의 판단을 묻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테마가 좀더 크게 다뤄지기를 바랐지만,

디온 메이어가 보여준 색다른 엔딩 덕분에 그나마 아쉬움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스릴러로서의 미덕과 매력을 모두 겸비했으면서도

악마의 산은 가해자와 피해자, 경찰과 범인, 남과 여 등 다양한 개개인의 심리는 물론

남아공 특유의 사회적 이슈들까지 깊이 있게 다룬 작품입니다.

앞서 읽은 오리온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러고 보면 디온 메이어는 단순한 이야기꾼 이상의 필력을 지닌 작가임이 분명한 듯 합니다.

 

주인공 베니 그리설이 알코올중독의 진창에서 제대로 빠져나왔는지 분명히 그려지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 시리즈 첫 편인 것을 감안하면 이후에는 좀더 사건에 매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후속작인 ‘13시간에서의 베니 그리설의 활약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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