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 럭
야쿠마루 가쿠 지음, 민경욱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5년 전쯤 천사의 나이프를 통해서였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읽고 소년범죄에 관심이 있어 찾아본 작품이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차분한 문장 속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심리를 잘 그려냈다는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건을 풀어가는 솜씨 역시 현란하진 않지만 무척 리얼했던 것 같구요.

 

하드 럭은 야쿠마루 가쿠와 두 번째로 만난 작품인데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받은 인상은 천사의 나이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실감 넘치는 사회파 스타일의 소재,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 주인공의 상황,

정통 미스터리이면서 사건 못잖게 인물들의 심리를 지켜보게 만드는 서사의 힘 등

미스터리에 문외한이라도 한번 잡으면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하는 필력을 갖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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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아이자와 진은 그야말로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절망적인 청춘입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 한탕을 위해 일면식도 없는 자들을 동료 삼아 범죄를 기획합니다.

하지만 거사(?) 당일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맙니다.

실명도 모르던 동료들은 모두 현장에서 사라졌고,

눈앞에서는 세 구의 시신과 함께 저택이 불타오릅니다.

누군가 자신들의 계획에 끼어들어 모든 것을 망쳐놓은 것입니다.

유일하게 실명과 얼굴이 노출된 자신은 살인강도에 방화범으로 몰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아이자와 진은 경찰에 쫓기게 되지만, 끝까지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 ● ●

 

전형적인 사기부터 음험한 범죄중개, 개인정보 매매 등 다양한 범죄가 등장하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그 현상 자체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물론 나름 빈부의 문제, 가족의 문제 등 일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긴 하지만,

그것을 교훈적이거나 선언적인 투로 강요하진 않습니다.

즉 사회적인 병폐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범죄 등 구조적인 문제를 강조하기보다는

철저하게 개인 하나하나의 행동과 심리와 동기에 천착하면서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그래서인지 (경찰 외에) 선한 인물이라곤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악인들마저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묘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한때는 선한 시민이자 억울한 피해자였지만

결국엔 남의 돈을 탐낸 명백한 범죄자로 전락하는 주인공의 삶을 지켜보면서

구조의 문제개인의 문제라는 두 가지 차원의 담론을 혼돈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지만 결국 탈출구는 범죄밖에 없었다는 참혹한 구조적현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치면서 사건의 진실을 캐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개인의상황이

정교하게 직조되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발 잡히지 말고 진범을 찾아내줘!”라고 응원하다가도,

, 이 친구는 어쨌든 범죄를 저질렀잖아?’라는 자문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나머지 한 축으로 등장하는 경찰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좀 심심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애초부터 주인공의 진실 찾기를 위한 조연으로 설정된 바,

그 나름대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점에서는 크게 일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분량 속에 현실적인 소재와 미스터리 구성을 잘 버무린 하드 럭

재미와 함께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입니다.

좀더 현란한 문장과 자극적인 설정을 갖고 왔다면

야쿠마루 가쿠는 진작에 더 큰 이름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담담한 느낌이 들면서도 알차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필력은

오히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악당어둠 아래등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작품들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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