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산 형사 베니 시리즈 1
디온 메이어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남아공의 스릴러 작가 디온 메이어와는 지난 해 봄 오리온을 통해 처음 만났습니다.

극심한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경찰 출신의 초보 사립탐정 판 헤이르던을 앞세운 오리온

남아공의 비극적인 역사와 판 헤이르던의 개인사를 잘 조합한 속도감 넘치는 스릴러였다면,

악마의 산은 아동 상대 범죄와 전통 무기를 이용한 연쇄살인이라는 잔혹한 사건과 함께

자의반, 타의반으로 심신이 붕괴된 인물들의 심리를 좀더 강조한 묵직한 작품입니다.

 

악마의 산은 크게 세 인물의 이야기로 정리됩니다.

우선,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가족에게 내쫓긴 후 술독에 빠진 자신과의 전쟁을 벌이며

아동성폭행범만 골라 죽이는 연쇄살인마 체포에 나선 중년 경찰 베니 그리설이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오리온에서 주인공을 돕는 역할로 특별출연(?)한 뒤

후속작인 프로테우스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코사족 출신의 흑인 토벨라 음파이펠리는

좀도둑들에게 ()아들을 잃은 뒤 연쇄살인마로 변신하여 피의 향연을 벌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압적인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던 크리스틴은

불장난 같은 사랑의 결과로 얻은 딸과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며 살아가던 중

악마와도 같은 마약상을 만나면서 파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디온 메이어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을 통해 세 인물의 행로를 찬찬히 보여줍니다.

각각 별개의 것처럼 보이던 세 인물의 이야기는 점점 한 방향으로 수렴되다가

베니 그리설이 개인의 복수로 보이는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을 맡게 되고,

크리스틴과 그녀의 딸이 그 사건에 연루되면서 한길로 모입니다.

중반부에 좀 못 미친 지점까지 세 인물의 과거와 현재가 비교적 밀도 있게 묘사된 탓에

독자에 따라서는 서설이 너무 길고 장황하다라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 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왜 작가가 긴 서설을 택했는지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

 

범인은 초반부터 노출되고, 이야기 역시 충격과 반전보다는 예정된 순리(?)대로 전개되지만

이는 속도보다는 깊이, ‘누가?’보다는 ?’에 초점을 맞춘 작가의 의도 때문입니다.

뛰어난 능력과 발군의 수사력 덕분에 장래가 촉망되던 형사였지만

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하는 스트레스로 인해 알코올중독에 빠진 베니 그리설은

가장이자 중년남자로 살아가야 하는 개인의 고민은 물론

남아공에서 백인 경찰로 살아가야 하는 스트레스까지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또 한때 비밀 암살요원으로 암약했던 토벨라는 비극적인 사고로 ()아들을 잃으면서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복수를 위해 또다시 손에 피를 묻히기로 결심하지만

복수가 거듭될수록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고뇌와 갈등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항적인 소녀 크리스틴이 생계를 위해 콜걸로 변신하는 과정과

악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모습은 빈부, 마약, 성매매 등

남아공에 만연한 사회적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대했던 것만큼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사적 복수의 문제역시 중요한 테마입니다.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야기한 사적 복수에 대해

디온 메이어는 어느 한쪽의 주장보다는 찬반론을 공정하게 배분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경찰 내에서조차 사적 복수를 감행하는 연쇄살인마를 놓고 지지와 증오로 갈리는 장면이나

사적 복수에 나선 토벨라가 매번 과거의 살인기계답지 못한 소심함과 갈등을 겪는 장면,

또 사적 복수에 반대하던 베니 그리설이 정작 자신의 문제가 됐을 때 겪는 혼란 등을 통해

디온 메이어는 독자 개개인의 판단을 묻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테마가 좀더 크게 다뤄지기를 바랐지만,

디온 메이어가 보여준 색다른 엔딩 덕분에 그나마 아쉬움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스릴러로서의 미덕과 매력을 모두 겸비했으면서도

악마의 산은 가해자와 피해자, 경찰과 범인, 남과 여 등 다양한 개개인의 심리는 물론

남아공 특유의 사회적 이슈들까지 깊이 있게 다룬 작품입니다.

앞서 읽은 오리온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러고 보면 디온 메이어는 단순한 이야기꾼 이상의 필력을 지닌 작가임이 분명한 듯 합니다.

 

주인공 베니 그리설이 알코올중독의 진창에서 제대로 빠져나왔는지 분명히 그려지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 시리즈 첫 편인 것을 감안하면 이후에는 좀더 사건에 매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후속작인 ‘13시간에서의 베니 그리설의 활약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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