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미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물증 부족과 강압수사를 이유로 일가족 살해용의자 다케우치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사오는

재판관을 그만두고 대학 강단에서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옆집에 다케우치가 이사를 오면서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가족들이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다케우치에게 호감을 표하지만

이사오의 며느리 유키미만이 그의 과도한 친절과 기이한 행동을 의심합니다.

과거 일가족 살해사건의 유족이 유키미에게 접근하여 다케우치의 위험을 경고하자,

유키미는 다케우치와의 정면대결을 통해 그의 수상한 행적을 따져 묻지만,

다케우치는 명쾌한 언변을 앞세워 오히려 오히려 유키미를 곤란에 빠뜨립니다.

애써 다케우치를 외면하던 이사오는 유키미로부터 최근 벌어진 기이한 일에 대해 들은데다

의문의 침입자에게 아내가 폭행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어쩌면 자신이 내린 무죄선고가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 ● ●

 

검찰 측 죄인범인에게 고한다에 이어 세 번째 만난 시즈쿠이 슈스케의 작품입니다.

앞선 작품들이 검사와 형사 주인공을 앞세워 정의와 진실에 대해 다룬 정통 미스터리라면,

불티는 한 소시오패스에 의해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전직 재판관의 가족의 비극을 다룬

소름끼치는 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물론 시즈쿠이 슈스케답게 전직 재판관 캐릭터를 앞세워

사형제도라든가 피고의 일생을 재단해야 하는 재판관의 고뇌를 다루기도 하지만

그 부분은 어느 정도는 양념 수준에서만 다뤄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검찰 측 죄인을 읽고 썼던 서평을 찾아보니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작가는 굳이 반전의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돌직구처럼 처음부터 독자에게 모든 패를 내보인 채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엄청난 에너지와 가속의 힘을 지닙니다.

 

불티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소소한 반전이나 의외의 정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독자를 위한 작가의 최소한의 배려(?)일 뿐 이야기의 대세에 변화를 주진 못합니다.

오히려 작가는 기분 나쁠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끈적끈적한 묘사를 통해

한 가족에게 닥칠 끝 모를 재앙을 오직 한 방향으로 그려나갑니다.

 

사실, 초반부는 드라마 연속극처럼 문제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집안일이라면 아내에게 모든 걸 떠맡기고 남 일처럼 방관하는 전직 재판관,

치매에 걸려 간병을 받으면서도 고마운 줄 몰라하는 독살스런 노모,

간병과 가정 일에 시달린 끝에 과호흡증까지 겪는 아내,

서른이 넘었지만 여전히 자기 앞가림도 못하다가 뒤늦게 공부에 뛰어든 아들,

그나마 현명하고 이성적이지만 육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며느리 등

이사오의 집안은 겉으론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은 이런저런 풍파를 겪고 있기도 합니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족 캐릭터와 집안 분위기가 묘사되던 끝에

일가족 살해용의자였지만 이사오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 다케우치가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독자들은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왜 하필 이사오의 옆집으로 이사를 온 것일까? 이사오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하려는 것인가?

검사라면 모를까,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관의 옆집으로 이사 온 저의는 무엇인가?

혹시... 그는 유죄였던 것인가?

 

전작들에 비하면 불티는 만연체의 느낌이 강한 작품입니다.

무엇이 정의인가를 놓고 선후배 검사 간의 정면충돌을 그린 검찰 측 죄인이나

다양한 경찰캐릭터와 함께 공개수사의 긴장감이 느껴졌던 범인에게 고한다에 비하면

불티는 빠른 전개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좀 답답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 탓에, 이 작품에 붙은 철야책이라는 별명에 동의하지 못할 독자도 있겠지만,

실제로 첫 페이지를 열게 되면 웬만해선 중간에 접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탄탄하고, 이야기 역시 느리긴 해도 정교하고 밀도가 높아서

이 다음 페이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래서 여기까지만 읽고 내일 읽어야지라는 생각을 좀처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작들처럼 검사나 형사가 등장하는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한 탓에

초반부의 문제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에서 살짝 멈칫하긴 했지만,

탄력이 붙으면서 스릴러의 맛이 제대로 나기 시작한 지점부터는

전작들 못잖은 재미와 긴장감을 맛보면서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못 읽은 시즈쿠이 슈스케의 국내 출간 작품은

그가 최초로 쓴 연애소설 클로즈드 노트인데, 솔직히 거기까지 읽을 자신은 없고,

그저 그의 정통 미스터리가 빠른 시간 안에 새로 출간되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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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놓아줄게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서정아 옮김 / 나무의철학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줄거리 소개하기가 참 어려운 작품입니다.

무엇을 언급해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5살 소년 제이콥의 뺑소니 사망사고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인데,

브리스톨 경찰청 범죄수사과 레이 스티븐스 경위와 케이트 형사의 집요한 수사가 한 축이고,

뺑소니 사고와 관련된 여성조각가 제나 그레이가 외진 해변마을로 몸을 숨긴 뒤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가 한 축입니다.

그리고, 1년 넘게 공들여온 레이와 케이트의 수사가 성과를 올린 이후의 이야기와

제나 그레이가 지우려 했던 과거사 및 뺑소니 사고의 진실 이야기가 중반 이후를 장식합니다.

 

500페이지의 적잖은 분량이지만 사건과 진실의 규모는 스릴러 치곤 소소한 편입니다.

충격적인 사건은 때로 단숨에 일어나지만, 그에 따르는 파멸은 느리고 착실하게,

게다가 예기치 못했던 형태로 인생을 죄어오는 것이다.”라는

알라딘 소설 MD 최원호님의 서평대로, 이야기는 느리고 착실하게전개됩니다.

특히 서론에 해당하는 1부는 무기력한 경찰의 수사와 제나 그레이의 끝없는 절망에 대해

너무나도 느리고 착실하게진행된 탓에 꽤나 지루하게 읽힙니다.

작가가 각 인물의 디테일에 힘을 줘도 너무 준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인데,

가령, 경찰 주인공인 레이 경위의 불행한 가족사 같은 에피소드는

본 이야기와 잘 섞이지 못하는데 왜 굳이 집어넣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부 마지막 페이지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가볍게한 방 때려준 작가는

2부에서부터 제법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미친 듯이(?) 가속을 붙입니다.

 

지루한 1부를 넘기기만 하면 마지막 페이지까지는 단숨에 달려갈 수 있지만,

너를 놓아줄게의 아쉬운 점은 초반의 지루함이 아니라

납득하기 어려운 반전과 이해할 수 없는 몇몇 인물들의 행태에 있습니다.

경찰은 당연히 조사했어야 할 내용을 조사하지 않아서 스스로 사건을 위험하게 만들었고,

주요인물인 그()는 얼마든지 자신이 빠진 늪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도움과 조언을 청하지 않은 채 무기력하고 파멸적인 삶을 자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들이 개연성만 갖췄다면 서사를 떠받치는 든든한 출발점 또는 변곡점이 됐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라는 반문만 자아내는 억지스러운 설정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드러나는 진실, , 많은 이들이 엮인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장황한 묘사는

왠지 불가피하고 운명적이란 느낌보다는 작가의 변명이나 핑계처럼 읽힙니다.

 

알라딘 서평 가운데 어느 분께서 속 터지고 이해 안 되는 점이라며

이 작품의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한 글이 있는데,

꽤 센 스포일러라 이 작품을 안 읽은 독자라면 절대 미리 읽어선 안 되는 내용이지만,

다 읽은 제 입장에서는 100%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분명 디테일에 능하고, 독자를 휘어잡는 필력은 대단한 작가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토대와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비유하자면, 맨 아래 벽돌 하나만 빼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이야기랄까요?

 

혹평에 가까운 서평을 썼지만, 그렇다고 다시 안 볼 작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맨 아래 벽돌의 오류만 제외하면 탄탄한 필력이 엿보이는 매력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올해 출간된 작가의 두 번째 작품 나는 너를 본다에서는

이런저런 아쉬움들 대신 작가의 진짜 필력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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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남자
박성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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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실패로 빚더미에 오른 채 고시원을 전전하던 최대국은 어느 날 한 남자의 방문을 받는다.

남자는 최대국의 아버지인 최희도가 총에 맞아 중태라는 소식과 함께,

아버지의 수첩을 찾아주는 조건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제시한다.

아버지와 의절한 상태였지만 보상금에 욕심이 났던 최대국은 덜컥 제의를 수락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은 아들 최대국의 시점과 젊은 시절의 아버지 최희도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며,

아들과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과거사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한편,

이를 통해 간첩, 안기부, 요정정치, 납북사건 등

6~70년대 한국 사회의 굵직한 사건을 절묘하게 작품에 녹여낸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낯선 이름의 작가라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니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주로 부모와 자식. 그리고 가족이란 관계가

서로에게 구원인가, 원죄인가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담아내려 노력해 왔다.”

그래서 현대를 배경으로 아들 최대국의 시점에서 전개된 첫 챕터와

6~70년대를 무대로 아버지 최희도의 시점에서 전개된 두 번째 챕터를 읽고는

오랜 세월에 걸친 부자간의 갈등을 미스터리 기법으로 푼 작품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초반부, 정확히는 46페이지에서 남조선이라는 단어를 발견하는 순간,

갑자기 두 개의 모순되는 느낌이 확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2017년에 간첩 이야기라니, 하는 당혹감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특별한 이유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대로 이 작품은 고정간첩, 중앙정보부, 요정정치, 납북사건 등

옛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극에 어울리는 올드한 소재들로 구성돼있습니다.

캐릭터나 이야기 자체도 그런 올드함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 작품입니다.

그런데도, 첫 페이지를 펼친 뒤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해버렸는데,

그것은 올드하지만 탄탄한 서사, 앞뒤가 빈틈없이 맞아 들어가는 정교한 구성,

그리고 상투적이라 해도 역시 재미있게 읽히는 스파이물의 미덕들 덕분입니다.

 

또한 가족의 문제에 천착해왔다는 작가의 전공이 작품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어서

이야기의 묵직함을 더한 것도 재미의 한 요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다 드러낼 수 없는 진실과 상처가 있기 마련이고,

자식은 그런 부모의 음지와 이면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난 외연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반항합니다.

그런 점에서만 보면 흙수저로 태어나 비참한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아들 최대국이

자신에게 아무 것도 물려준 것이 없는 냉전시대의 산물인 아버지 최희도와 겪는 갈등은

여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자주 봐왔던 익숙한 부자의 갈등일 뿐이지만,

3의 남자는 거기에 덧붙여 아버지의 비밀을 탐색해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장착함으로써

가족의 문제와 시대의 문제와 미스터리를 정교하게 맞붙인 작품입니다.

 

아버지의 과거는 벗기면 벗길수록 더 복잡한 미로를 보여줄 뿐이었고,

아버지의 비밀창고 속에 소장됐던 물건들은 아버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의 LP, 오래 전 판매됐던 담배 은하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젊은 여인의 사진 등...

수첩의 행방은 묘연했고, 탐색의 단서는 너무나도 모호했지만,

최대국은 오직 의문의 사내가 제시한 거액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수첩 찾기에 나섭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위기가 연이어 그에게 닥칩니다.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의 흔적을 찾는 여정이 이렇게 위험한 것인지 최대국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최대국은 문득 아버지가 새겨놓은 한마디를 기억해냅니다.

모르는 사람이 너를 찾아와 내 이름을 대면, 그대로 도망가라.”

그리고 죽음의 위기를 몇 차례 넘긴 후에야 아버지가 남긴 한마디의 진실을 알아냅니다.

 

소설 속 아버지 최희도가 겪은 파란만장한 삶은 허구이지만 허구처럼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 무렵 대한민국 어딘가에는 실제 최희도 같은 인물이 여럿 존재했을 것만 같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 김해경, 그의 절친 김환, 그의 멘토 강춘식, 그의 숙적 서중태 등도

시한폭탄 같던 그 시대 어딘가에 분명 실존했을 것만 같은 인물들입니다.

물론, 6~70년대는 너무나 먼 시대이고, ‘간첩이란 단어 자체가 발산하는 긴장감이나 위기감은

아무리 미사일 문제로 시끌시끌한 2017년의 대한민국이라 하더라도 생경하게 다가옵니다.

적어도 1987년의 KAL기 폭파사건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독자라면 모를까,

그 아래의 세대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나름의 친절한 방식으로 그 시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쓴 것은 물론,

혹시 그 시대를 모르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비극적인 가족사와 팽팽한 스파이물의 미덕을 잘 섞어놓았습니다.

 

46페이지에서 본 남조선이라는 단어가 준 당혹감과 호기심이라는 모순된 감정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됐고,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특별한 이유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첨단 스파이물에 익숙한 독자라면 아날로그 수준의 스파이놀이가 아쉽겠지만,

그 점만 제외한다면 3의 남자는 꽤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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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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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살자의 이마에 두 발의 총알자국을 남겨놓는 희대의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패닉에 빠진 검찰과 경찰이 전혀 감도 못 잡고 있는 사이,

한 인터넷 카페에 살해된 자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와 함께

그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해도 마땅한 인물들이었다는 기막힌 사연들이 게시됩니다.

살해된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유무형의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던 자들이고,

그 폭력의 희생자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 속에서 살아가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카페의 운영자 저스티스맨은 추정또는 각색이라고 전제했지만,

마치 직접 살인을 저지른 킬러의 고백 기록처럼 너무나 완벽하고 사실적인 스토리에

카페 회원들은 저스티스맨=킬러라고 의심하면서도 그의 정의구현에 열광합니다.

 

● ● ●

 

어딘가 복수와 응징의 냄새가 느껴지는 총기에 의한 연쇄살인,

연쇄살인의 정확한 판세를 읽어내는 인터넷 카페 운영자 저스티스맨의 가공할 추리,

저스티스맨에게 열광하며 희대의 연쇄살인마 킬러를 숭배하는 익명의 네티즌들의 광기,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릴 것 없이 사회 전체에 만연한 잔혹한 폭력에 대한 고발 등

저스티스맨은 다루는 내용이나 그것을 풀어가는 형식 모두 독특하고 도발적인 작품입니다.

 

피살자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 연관된 인물들인지,

그들이 살해되기 전 어떤 악행을 저질렀고,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했는지 등

저스티스맨이 올린 연쇄살인의 전말을 읽으면서 독자는 계속 위화감을 갖게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디테일을 알고 있는 것일까?

정말 그가 범인일까? 아니면 범인과 특별한 관계이거나 아니면 공범일까?

독자 역시 소설 속 카페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저스티스맨을 의심할 수밖에 없지만,

작가가 그렇게 선선히 미스터리의 열쇠를 줄 리는 없으니,

분명 후반부에 가서 엄청난 반전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 죽어 마땅한 인물들을 상대로 한 냉정하고 빈틈없는 사적 복수는

일반적인 감정적 사적 복수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이입을 경험하게 만드는데,

덕분에 절대 잡히지 말기를’, ‘마지막 장에서도 킬러가 무사하기를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작가는 연쇄살인 미스터리 서사 속에 폭력에 대한 꽤 묵직한 담론도 함께 담았습니다.

권력에 의한 폭력, 약자에 대한 쾌락적 폭력, 욕망 분출을 위한 폭력, 학교 폭력 등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연쇄살인의 출발점, 즉 피살자들의 로 설정해놓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킬러를 숭배하며 피살자들을 증오하던 카페 회원들은

댓글로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들끼리 폭력을 주고받게 됩니다.

닉네임 뒤에 숨어 욕설과 비아냥으로 범벅된 언어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현피까지도 서슴지 않는 그들의 온라인 폭력은 사실 피살자들의 와 다를 게 없습니다.

오프라인의 폭력을 증오하면서도 온라인의 폭력을 무감각하게 여기는 그들을 통해,

또 하이에나 무리처럼 집단의 폭력성에 길들여진 그들을 통해

작가는 미세한 입자의 안개처럼 사회 곳곳에 스며든 폭력의 광기를 대놓고 비판합니다.

 

이 지점에서 그럼, 킬러의 연쇄살인은 용서받을 수 있는 폭력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작가는 초반부에 에 대한 킬러의 자기 철학을 장황하게 묘사함으로써,

킬러의 살인과 피살자들의 폭력이 어떻게 다른지 미리 변명 아닌 변명을 풀어놓습니다. ,

 

태초의 정통성을 지닌 악은 인간을 속박과 굴레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강렬한 힘을 지녔는데,

언제부턴가 그것이 비열하게 뒤틀린 모습으로 세상 곳곳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 비열한 악이 바로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끊임없이 자행되는 폭력이다.

하여 킬러는 비열한 악을 응징하고 진짜 악을 실행하는 순간을 자신의 프레임에 담는다.”

(알라딘 책 소개글에서 인용, 수정했습니다)

 

말하자면, 킬러의 순수한 악의또는 악의 정통성

피살자들의 비열하게 뒤틀린 악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그렇기에 킬러의 연쇄살인을 비난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작가의 변명은 약간은 난해하고 과대포장지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킬러는 운명적으로 순수 악을 지니고 태어난 신적 존재도 아니었고,

, 엄청난 내공을 지닌 판타지 서사 속의 영웅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비열하게 뒤틀린 악에게 분노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인데,

작가가 지나치게 신비하고 화려한 외피를 입힌 셈이랄까요?

 

폭력에 대한 약간의 과한 주제의식과 막판에 힘이 좀 빠진 점만 제외한다면,

저스티스맨은 지금껏 맛보지 못한 색다른 미스터리의 성찬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적 복수를 담고 있어서 더 매력적으로 읽혔고,

두어 번쯤 되읽어야 그 의미를 음미할 수 있는 화려한 수사와 문장들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무튼...

도선우라는 대단한 이야기꾼을 발견한 반가움과 함께 후속작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저스티스맨보다 불과 몇 달 앞서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스파링도 궁금하고,

그가 앞으로 내놓을 미스터리는 어떤 새로움을 선사할지도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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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먼트 - 복수를 집행하는 심판자들, 제33회 소설추리 신인상 수상작
고바야시 유카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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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 범죄가 날로 급증해 가는 일본에서 복수법이 제정된다.

재판에서 이 법의 적용을 인정받으면, 피해자 또는 그에 준하는 사람은

종래의 법에 따른 형벌이나 복수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 복수법을 선택한 사람은 자기 손으로 형벌을 집행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도리타니 아야노는 복수집행자를 보호하고, 집행하는 현장을 감찰하고,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맡은 복수감찰관이다.

어느 쪽에도 감정을 이입해서도 안 되고, 집행에 영향을 주는 판단을 해서도 안 되지만,

도리타니는 맡은 사건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정답 없는 자문 복수법은 최선인가? 올바른가?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과연 피해자와 유족을 치유할 수 있는가?

오히려 집행자를 평생 고통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닌가? - 때문에 혼란스러울 뿐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 일부가 포함된 줄거리입니다)

 

● ● ●

 

개인적으로 사적 복수라는 주제를 무척 좋아해서 관심을 가진 작품입니다.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사적 복수를 다룬 작품이 많아서

과연 어떻게 풀어갔을까 궁금했는데, 작가는 복수법이라는 신무기(?)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사적 제재를 허용한 복수법 자체보다 더 흥미를 끈 것은

피해자 또는 그에 준하는 인물이 자기 손으로 직접’,

그것도 피해자가 당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실행해야 한다는 설정입니다.

말하자면 흉기로 죽였으면 흉기로, 굶겨 죽였으면 굶겨서,

생매장 시켰으면 생매장으로 직접 가해자를 응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적 복수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고통스런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살인자가 된다는 것은 은밀한 사적 복수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복수를 마친 자들 가운데 일부는 피해자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갚았다고 기뻐하는 반면,

일부는 스스로 살인자가 됐다는 악몽에 시달리며 복수를 후회하기도 합니다.

복수법 반대 운동을 하다가도 정작 자신이 피해자가 되자 복수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복수법에 찬성하다가도 막상 살인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고민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법부 안에서도 강력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찬성론자가 있는 반면,

범인과 피해자의 인권을 말살한다는 반대론자도 있습니다.

이렇듯 복수법은 정의라고도 패륜이라고도 할 수 없는 딜레마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화자(話者) 겸 주인공으로 복수감찰관 도리타니를 내세웠습니다.

그녀는 복수법을 선택한 실행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복수의 전 과정, 합법적인 살인을 감찰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개인적 신념과 무관하게 정당한 법 집행을 수호해야 하는 공무원이지만,

매번 복수가 실행되는 현장을 지켜보는 것은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작가는 그런 도리타니를 앞세워 복수법의 다양한 딜레마에 대해 풀어놓습니다.

복수는 과연 최선인가? 복수는 과연 피해자와 유족을 치유할 수 있는가?

제도적 사형과는 명백히 차원이 다른 개인에 의한 합법적인 살인은 용인될 수 있는가?

복수를 실행한 자들이 평생 악몽으로 간직해야 하는 살인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만족감이 높았던 작품을 꼽자면,

아들의 복수를 실행하는 아버지의 고뇌를 다룬 사이렌

묻지마 살인극의 피해자들이 복수법 실행을 놓고 갈등하는 앵커입니다.

그 외의 작품들 모두 정답 없는 딜레마를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라

독자 입장에서는 내내 긴장감을 갖고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작위적인 느낌이 강한 스토리 때문에

기발한 발상과 특별한 소재의 힘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몇몇 수록작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범인과 피해자의 감정을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마치 독자에게 훈계교훈을 주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순전히 반전을 위해 사건이나 캐릭터를 비현실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진작 법정에서 드러났어야 할 사건의 진상

복수법 실행 현장에서 느닷없이 폭로되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입니다.

명백히 주제를 위해 스토리나 캐릭터가 희생(?)된 셈입니다.

 

도리타니라는 복수감찰관을 관찰자로 설정한 것 역시 역효과를 냈다는 생각인데,

작가가 그녀의 감정이나 갈등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표현한 탓에

독자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원천봉쇄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를 복수법의 지독한 찬성론자나 반대론자로 그렸다면

독자 입장에서 사적 제재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요약하자면,

무척 흥미로운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제의식과 감정의 과잉, 너무 말이 많았던 화자,

꽤 묵직한 주제지만 그것을 담아내기엔 좀 아쉬웠던 단편의 한계 때문에

이야기의 확장성이 살지 못한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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