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미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물증 부족과 강압수사를 이유로 일가족 살해용의자 다케우치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사오는

재판관을 그만두고 대학 강단에서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옆집에 다케우치가 이사를 오면서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가족들이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다케우치에게 호감을 표하지만

이사오의 며느리 유키미만이 그의 과도한 친절과 기이한 행동을 의심합니다.

과거 일가족 살해사건의 유족이 유키미에게 접근하여 다케우치의 위험을 경고하자,

유키미는 다케우치와의 정면대결을 통해 그의 수상한 행적을 따져 묻지만,

다케우치는 명쾌한 언변을 앞세워 오히려 오히려 유키미를 곤란에 빠뜨립니다.

애써 다케우치를 외면하던 이사오는 유키미로부터 최근 벌어진 기이한 일에 대해 들은데다

의문의 침입자에게 아내가 폭행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어쩌면 자신이 내린 무죄선고가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 ● ●

 

검찰 측 죄인범인에게 고한다에 이어 세 번째 만난 시즈쿠이 슈스케의 작품입니다.

앞선 작품들이 검사와 형사 주인공을 앞세워 정의와 진실에 대해 다룬 정통 미스터리라면,

불티는 한 소시오패스에 의해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전직 재판관의 가족의 비극을 다룬

소름끼치는 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물론 시즈쿠이 슈스케답게 전직 재판관 캐릭터를 앞세워

사형제도라든가 피고의 일생을 재단해야 하는 재판관의 고뇌를 다루기도 하지만

그 부분은 어느 정도는 양념 수준에서만 다뤄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검찰 측 죄인을 읽고 썼던 서평을 찾아보니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작가는 굳이 반전의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돌직구처럼 처음부터 독자에게 모든 패를 내보인 채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엄청난 에너지와 가속의 힘을 지닙니다.

 

불티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소소한 반전이나 의외의 정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독자를 위한 작가의 최소한의 배려(?)일 뿐 이야기의 대세에 변화를 주진 못합니다.

오히려 작가는 기분 나쁠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끈적끈적한 묘사를 통해

한 가족에게 닥칠 끝 모를 재앙을 오직 한 방향으로 그려나갑니다.

 

사실, 초반부는 드라마 연속극처럼 문제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집안일이라면 아내에게 모든 걸 떠맡기고 남 일처럼 방관하는 전직 재판관,

치매에 걸려 간병을 받으면서도 고마운 줄 몰라하는 독살스런 노모,

간병과 가정 일에 시달린 끝에 과호흡증까지 겪는 아내,

서른이 넘었지만 여전히 자기 앞가림도 못하다가 뒤늦게 공부에 뛰어든 아들,

그나마 현명하고 이성적이지만 육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며느리 등

이사오의 집안은 겉으론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은 이런저런 풍파를 겪고 있기도 합니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족 캐릭터와 집안 분위기가 묘사되던 끝에

일가족 살해용의자였지만 이사오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 다케우치가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독자들은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왜 하필 이사오의 옆집으로 이사를 온 것일까? 이사오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하려는 것인가?

검사라면 모를까,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관의 옆집으로 이사 온 저의는 무엇인가?

혹시... 그는 유죄였던 것인가?

 

전작들에 비하면 불티는 만연체의 느낌이 강한 작품입니다.

무엇이 정의인가를 놓고 선후배 검사 간의 정면충돌을 그린 검찰 측 죄인이나

다양한 경찰캐릭터와 함께 공개수사의 긴장감이 느껴졌던 범인에게 고한다에 비하면

불티는 빠른 전개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좀 답답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 탓에, 이 작품에 붙은 철야책이라는 별명에 동의하지 못할 독자도 있겠지만,

실제로 첫 페이지를 열게 되면 웬만해선 중간에 접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탄탄하고, 이야기 역시 느리긴 해도 정교하고 밀도가 높아서

이 다음 페이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래서 여기까지만 읽고 내일 읽어야지라는 생각을 좀처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작들처럼 검사나 형사가 등장하는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한 탓에

초반부의 문제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에서 살짝 멈칫하긴 했지만,

탄력이 붙으면서 스릴러의 맛이 제대로 나기 시작한 지점부터는

전작들 못잖은 재미와 긴장감을 맛보면서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못 읽은 시즈쿠이 슈스케의 국내 출간 작품은

그가 최초로 쓴 연애소설 클로즈드 노트인데, 솔직히 거기까지 읽을 자신은 없고,

그저 그의 정통 미스터리가 빠른 시간 안에 새로 출간되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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