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하야시 마리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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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평을 쓰지 않던 10여 년 전에 읽은데다 한두 줄 내외의 짧은 메모 외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작품이지만 당시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언젠가는 꼭 한 번 다시 읽으려고 다짐했던 하야시 마리코의 단편집 '첫날밤'입니다.

다시 읽기 전까지만 해도 수록작 모두 첫날밤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라고 단정했는데, 실은 첫날밤이란 제목은 11편의 수록작 가운데 한 편의 제목일 뿐입니다. 유일하게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던 그 작품의 인상이 너무 강했던 탓에 아마도 이런저런 사연이 깃든 첫날밤에 관한 에피소드를 담은 단편집이라 지레 여겼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 불륜에 빠진 중년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꽤 파격적인 내용도 있고 애잔한 이야기도 있는 반면 블랙코미디 풍으로 불륜을 다룬 작품도 포함돼있습니다. 사랑 이야기에 관한 한 정갈하든 격정적이든 해피엔딩이 기약된 전형적 스토리보다는 평범한 인물들이 주고받는 일그러지고 비틀린 감정과 그에 어울리는 씁쓸하거나 비극적인 엔딩에 더 관심이 가는 취향이라 그런지 저에겐 별 다섯 개도 모자랄 정도로 애정 덩어리인 단편집입니다.

 

11편의 수록작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몇 편만 간략히 요약해보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남겼던 불륜이 오랜 시간이 지나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아이러니(‘애완동물가게의 스캔들’), 아슬아슬하게 감춰온 불륜의 비밀이 뜻밖의 반전을 맞이하는 씁쓸한 이야기(‘잘 다녀오셨어요?’), 전쟁미망인인 올케에게 남편을 빌려줘야 했던 시누이의 회한, 그리고 처녀의 몸으로 자궁을 들어내야 하는 40대 딸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아버지의 위험한 결심 등 패륜 혹은 그에 가까운 부도덕한 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어쩐지 짠하고 애틋하게 읽히는 이야기(‘눈 소리’, ‘첫날밤’), 39살에 가슴 설레는 사랑을 다시금 일깨워준 불륜의 행복감에 도취됐다가 갑작스레 비참한 현실로 내동댕이쳐지는 평범한 주부의 이야기(‘봄 바다로’) 등입니다.

 

292페이지에 수록된 단편이 11편이니 평균 3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에 불과하지만 간결하고 선명한 감정 묘사와 공감률 100%의 캐릭터 덕분에 이야기의 밀도는 어지간한 장편보다 높고 농밀합니다. 특히 거의 모든 수록작에서 다루고 있는 다채로운 색깔의 불륜의 향연은 그만큼 여러 가지 감정과 여운을 만끽하게 하는데, 지극히 통속적이고 때론 불쾌감을 자아내는 이야기들이긴 해도 오히려 선남선녀의 뻔한 해피엔딩 멜로보다 더 현실감 있고 깊이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저와 비슷한 취향을 가졌거나 그런 쪽으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추천하고 싶은 하야시 마리코의 '첫날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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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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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배크만은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입니다. , 지금까지 그의 대표작인 오베라는 남자(역시 못 읽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요나스 요나손)의 작가가 다른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한때 장안의 화제였던 두 작품은 표지는 물론 번역 제목의 뉘앙스까지 엇비슷해서 당연히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그 후로 연이어 출간된 닮은꼴 표지에 비슷한 뉘앙스의 제목들은 잘 해야 자기복제품이거나 아니면 인기에 편승한 모방작들이라는 근거 없는 의심 속에 관심 밖으로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다산책방의 서평단 덕분에 뒤늦게 만나게 됐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편중된 저의 취향이 프레드릭 배크만을 잘 소화해낼 수 있을까, 기대와 우려가 반반이었던 게 사실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는 더 많이 했어도 괜찮았고 우려는 말 그대로 기우일 뿐이었습니다.

 

새해를 이틀 앞둔 작고 평화로운 소도시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하나는 무장 은행강도 사건이고 또 하나는 오픈하우스(구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주택이나 아파트를 둘러볼 수 있게 공개하는 것)에서 벌어진 인질극입니다. 그런데 두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정체는 당장 내야 할 한 달치 월세가 필요했던 겁 많고 소심한 인물로, 하필 쳐들어갔던 곳이 현금 없이 운영되는 은행이라 강도질에 실패한 뒤 엉겁결에 오픈하우스 중인 아파트로 도망쳤다가 자기도 모르게 인질범이 되고 만 것입니다.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든 채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인질범과 하나같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드센 인질들의 만 하루의 동거는 과연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요?

 

이 작품을 최대한 압축해서 요약한다면 웃픈 인질극’, 즉 언뜻 보면 웃기는데 곰곰이 씹어볼수록 슬퍼지는 인질극쯤 될 겁니다. 어설픈 범인과 범인에겐 별 관심도 없는 인질들에, ‘덤 앤 더머를 연상시키는 부자(父子) 경찰의 좌충우돌 수사 등 해프닝에 충실한 지독한 소동극 설정이 초반부 내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속사포 같은 재미난 만담 혹은 능구렁이 변사(辯士)의 요란한 원맨쇼 같던 초반부를 지나 범인-인질들-부자 경찰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씩 소개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그 톤을 확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그 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변화무쌍하게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이건 은행 강도, 아파트 오픈하우스, 인질극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보다는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수도 있다.” (p151)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작가가 의도했던 장르는 무려 세 가지였다고 합니다. ‘불안에 시달리며 버티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코미디’, ‘밀실 미스터리가 그것인데, 도무지 섞이지 못할 것 같은 세 장르는 웃픈 인질극을 통해 웃음, 한숨, 안타까움, 반전, 감동 등 팔색조 같은 느낌을 발산합니다. 인물과 이야기도 많은데 장르마저 다양하다 보니 마치 회전무대를 통해 순식간에 시공간을 바꿔버리는 템포 빠른 연극무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큰 그림,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기만의 불안에 휩싸였던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교감하고 위로를 주고받으며 자신을 치유하고 용서하는 이야기를 상투적이거나 진부한 방식이 아닌, ‘웃픈 인질극으로 풀어냅니다.

 

칼에 맞지 않게 하느님이 보호해주지는 않으시지. 그래서 하느님이 다른 사람들을 주신 거야. 서로 보호하면서 살 수 있게.” (p301)

 

부자 경찰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남긴 단순하면서도 깊은 함의를 담은 이 한마디는 웃픈 인질극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절묘한 표현입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평생을 안고 온 뿌리 깊은 불안이 단 하루의 인질극의 인연으로 해소된다는 건 픽션에서나 가능한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불안한 사람들은 독자로 하여금 어쩌면 그런 기적이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할지 모른다는, 다소 무모하면서도 욕심내고 싶은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등장인물 모두 내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며, (클라이맥스는 다소 동화 같긴 해도) 그들이 해피엔딩을 이끌어내는 방식 역시 특별한 마법이 아니라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조금씩, 천천히 마음을 열고 말을 건네는 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프레드릭 배크만이 건네는 위로는 남다르면서도 더없이 따뜻하다. 왜냐하면 그가 위로를 건네는 방식은 세상에 당신 말고도 수많은 바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이 작품의 진정한 미덕을 단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눈가가 뜨근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박한 기쁨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그동안 관심 밖에 둔 채 외면했던 프레드릭 배크만의 작품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다시 그의 작품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날카로움에 질릴 때쯤 가장 먼저 떠오를 작가 중 한 명이 프레드릭 배크만이 될 것임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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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차일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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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다운 리버’, ‘아이언 하우스’, ‘구원의 길등을 읽었지만 정작 존 하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라스트 차일드는 매번 읽어야지 하면서도 왠지 감당하기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일 것 같아 계속 뒤로 미뤄온 작품입니다. (가해자든 희생자든) 어린 소년이나 소녀의 비극이 가슴 한쪽에 무겁고 날카로운 바위를 끝없이 얹어놓는존 하트 특유의 문장들로 그려진다면 앞서 읽은 작품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씁쓸한 여운을 남길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13살 소년 조니 메리멈의 세상은 1년 전 쌍둥이 여동생 앨리사가 유괴된 이후로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죄책감과 절망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사악한 부자에게 짓밟힌 끝에 약물중독자로 전락했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조니에게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조니의 목전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한 낯선 남자가 유괴된 여자아이를 찾았어.”라는 유언 같은 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마을에서 앨리사 또래의 소녀가 또다시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조니는 그동안 자신이 주시해온 인근의 범죄자들의 동태를 직접 살펴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끔찍한 상황과 마주치게 됩니다.

 

사라진 여동생을 찾기 위한 조니의 여정은 성인조차 감당하기 쉽지 않은 위기와 공포로 가득합니다. 경찰마저 손을 놓은 상태에서 그동안 조니는 지도 한 장에 의지하여 인근의 주민들을 탐문해온 건 물론 위험천만한 성 범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잠복까지 감행하며 조사해왔습니다. 그런 조니에게 유괴된 여자아이를 찾았어.”라는 낯선 남자의 한마디는 거대한 희망 그 자체였고 그 뒤로 조니의 행보는 경찰과 언론마저 놀라게 할 만큼 거침없이 전개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고 조니의 위기는 갈수록 임계점에 육박합니다. 더구나 어머니를 파멸로 몰아넣은 사악한 부자까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라 조니는 그야말로 몸과 마음 모두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앨리사의 유괴가 붕괴시킨 또 하나의 가족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찰 가운데 유일하게 앨리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는 수사반장 헌트의 가족입니다. 앨리사 사건에 대한 그의 과도한 집착은 아내를 떠나게 만든데 이어 아들에겐 치유되기 어려운 증오심만 심어놓았습니다. 서장마저 노골적으로 해고를 운운하며 앨리사 사건에 대한 헌트의 집착을 저지하려 하는데, 문제는 이런 헌트의 노력이 좀처럼 조니에게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13살이란 나이보다는 악()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나머지 조니에겐 누군가의 진심을 알아챌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악()은 앨리사를 유괴한 범인만이 아닙니다. 조니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끔찍한 폭력과 살인이 펼쳐지고 과거의 참극들이 세상에 폭로됩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악 그 자체인 인간의 이기심과 사악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13살 소년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인 셈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작품 후반부에 거듭 등장하는 악은 인간의 마음에서 자라난 암과 같아.”라는 대사는 조니가 마주친 악의 실체를 한마디로 잘 압축한 문장이란 생각입니다. 제멋대로 자라나 사방에 죽음의 씨앗을 뿌려대지만 도무지 뿌리까지 잘라낼 수 없는 그 암적 존재 앞에서 인간이란 그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메시지라고 할까요?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은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캐릭터인 탈옥수 레위 프리맨틀과 그가 조니와 맺는 다분히 신의 영역에 가까운 관계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사악한 까마귀를 두려워하는 레위는 호러 스릴러에나 어울릴 것 같은 캐릭터지만 작가는 그를 현실의 사건 한복판에 배치시키고 조니와 거듭 만나게 만듭니다. 그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둘의 만남은 앨리사 찾기라는 메인 사건과는 무관한 별개의 에피소드처럼 시작되지만 뒤로 갈수록 진실을 향한 유일한 열쇠처럼 그려지기도 합니다. 물론 거기엔 또 다른 복선이 깔려있고 예상 못한 반전이 설치돼있긴 하지만, 취향에 따라 읽는 중에도 또 다 읽은 뒤에도 계속 고개를 갸웃거릴 독자가 적잖을 것으로 보입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에 등장인물도 많아서 일일이 소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작품이지만 두툼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을 만큼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독자마다 평가가 다소 극단적으로 갈리긴 해도 존 하트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만의 매력을 충분히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으로부터 10년이 흘러 23살의 청년이 된 조니의 이야기를 다룬 허쉬가 한국에도 얼마 전(20214)에 출간됐는데, 그동안 책장에 오래 방치했던 라스트 차일드를 서둘러 읽은 건 실은 허쉬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존 하트의 작품은 연이어 읽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지만, 성인조차 쉽게 떨쳐내지 못할 트라우마를 겪은 13살 조니가 어떻게 성장해있을지, 또 이번에는 그에게 어떤 불행과 비극이 찾아들지 다분히 우려 섞인 기대감이 드는 것은 역시 피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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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봄 가노 라이타 시리즈 1
후루타 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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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흥미로운 캐릭터의 주인공이 이끄는 미스터리 연작단편집입니다. 지금은 가미쿠라 역 앞 파출소의 다소 실없고 친절하고 수더분한 40대 순경 아저씨지만 실은 자백 전문 가노라는 별명으로 가나가와 현경 수사1과에서 맹활약하던 가노 라이타가 그 주인공인데, 그는 별명대로 단서나 증거보다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용의자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거나 자백하게 하는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용의자 대부분은 가노의 허허실실 작전에 휘말려 자기도 모르게 진실과 거짓을 반복하다가 어느새 깊은 함정에 빠져버린 자신을 깨닫곤 크게 당황합니다. 가노는 용의자의 표정 하나, 땀방울 하나를 통해 진술의 허점을 파악하면서 조금씩 코너로 몰아가다가 결정적인 한 방으로 그()를 무너뜨립니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이렇다 보니 수록작 모두 처음부터 범인이 공개되는 것은 물론 시점 자체도 범인 입장에서 전개되고 마지막 마무리 정도만 가노가 맡는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이른바 도치서술 추리, 도서(倒敍)추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형식은 사실 작가에겐 무척이나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주인공이 워낙 뛰어나야 하는 것은 물론 이미 독자가 범인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막판을 장식할 또 하나의 반전까지 마련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당신은 반드시 다섯 번 속게 된다!”는 홍보카피는 이 작품이 도서추리의 모든 난관을 극복한 매력적인 미스터리라는 점을 대놓고 자랑하는 셈인데, 개인적으론 다섯 편의 수록작 중 두 편만큼은 확실히 이 홍보카피에 어울리는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스스로 소아성애자라는 강박에 휩싸인 청년이 실제로 소녀를 납치-감금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곤란에 빠진 뒤 가노에게 진상을 들키고 마는 첫 수록작 봉인된 빨강과 젊은 날의 상처 때문에 평생 외롭게 살면서 보이스 피싱과 노인 상대 사기행각을 벌여온 60대 여성이 끝내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하는 표제작 거짓의 봄은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었는데, 우연히도 작가들스스로 꼽은 최고의 작품이기도 해서 많은 독자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호평에 비해 평점이 좀 야박한 건 나머지 수록작들이 다소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수록작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위에서 작가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후루타 덴80년대 생 여성 콤비 작가 하기노 에이와 아유카와 소의 공동 필명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플롯과 집필을 분담하고 있다는데 작가 소개글을 보니 이미 2014년부터 화제작을 내온 터라 2021년에 와서야 한국에 처음 소개된 사실이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는 띠지 카피를 봤을 때는 콤비 작가라는 점보다 노회한 베테랑이 먼저 떠올라 내가 모르는 엘러리 퀸 급 작가가 있었나?”라는 의문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한때 자백 전문 가노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용의자 심문의 달인이었던 가노 라이타가 왜 역전 파출소의 사람 좋아 보이는 허허실실 순경 아저씨가 됐는지는 마지막 두 수록작에서 연이어 밝혀지는데, 그런 덕분에 가노의 활약을 계속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도 일본에서 아침과 저녁의 범죄라는 후속작이 연재 중이라는데 더 기대가 되는 건 장편이란 점입니다. 이 작품의 경우 아무래도 단편집인데다 범인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분량이 더 많다 보니 가노의 활약상이 덜 보인 게 아쉬웠는데, 장편이라면 그런 아쉬움을 모두 잊게 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의 연재가 마무리 되는대로 한국에도 바로 후속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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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소메이 다메히토 지음, 정혜원 옮김 / 몽실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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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부부와 두 살배기 아이까지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가부라기 게이치가 구치소에서 탈옥한 뉴스는 일본 전역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범행 당시 18세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잔인한 수법과 영아까지 살해한 엽기성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가부라기는 최후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매우 지능적이고 계획적인 방법으로 탈옥을 감행했습니다. 이후 1년 반 가까이 가부라기는 자신이 탈옥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외모와 이름을 바꿔가며 곳곳에 출몰합니다. 과연 그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요?

 

탈옥 후 가부라기는 공사장 인부, 미디어회사의 재택 기자, 전통여관 상주 알바, 빵 공장 파트타이머, 그리고 노인 개호시설 파트타이머로 변신하며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습니다. 비교적 초반부에 그가 모종의 목적을 갖고 누군가의 소재와 근황을 알아내려 한다는 게 밝혀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부라기가 신분을 감춘 스파이같은 행보를 보이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탈옥한 도망자답게 사람들 눈에 덜 띄는 장소로 숨어들어 은둔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습니다.

 

가부라기와 인연을 맺은 인물들은 하나 같이 마음에 구멍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향에서 쫓겨나 공사장 인부가 된 청년, 오랜 불륜의 상처에 아파하는 30대 커리어 우먼, 성추행범이란 누명을 쓴 끝에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변호사, 가족에게 끊임없이 상처받아온 중년의 주부, 그리고 첫 사회진출에서 쓴맛을 본 뒤 노인 요양보호사가 된 19살 여성이 그들입니다.

각 챕터마다 소()주인공 역할을 맡은 그들은 처음엔 정체가 애매한 가부라기에게 위화감을 느끼지만, 얼마 안 가 자신들의 마음에 난 구멍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위로해주는 그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짧은 만남의 끝무렵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어쩌면 그가 일가족을 살해한 18세 살인귀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들을 직간접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의문을 품습니다.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피 중인 그를 만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온화한 인간성에 매료된다. 마음의 상처가 가벼워지고 어떻게든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 왜일까? 이 모든 게 가면의 괴물일까? 그는 왜 탈옥했을까? 아니 애초에 왜 사람을 죽였을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출판사 소개글에 실린 위의 카피를 보면 가부라기의 캐릭터는 물론 그의 탈옥의 목적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역시 출판사 소개글대로) 사건 당시 일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인물이 현재 노인 개호시설에 머무르고 있으며 가부라기가 사쿠라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의 파트타이머가 됐다는 점은 이 작품의 주제가 원죄(冤罪)’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가부라기가 어떻게 자신의 원죄를 입증하는가?”라는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1년 반에 걸친 지난하고 고통스런 도주극 속에 그려진 휴먼드라마에 더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탈옥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신분을 숨기고 경찰의 추적을 피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만남이긴 했지만 가부라기는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뒤늦게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의 진심을 다한 태도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풀리지 않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 작품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잔혹무도한 18세 사형수의 탈옥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정갈하고 정성이 깃든 문장들과 인물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작가의 진심, 그리고 결코 요란하지 않게, 오히려 담담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가부라기의 정체와 목적을 그려낸 점이 인상 깊게 남은 작품입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가부라기가 만난 다섯 명의 소()주인공들의 개인사가 너무 장황하고 세밀하게 그려지다 보니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분량(632p)이 과도했다는 점인데, 가부라기와의 인연을 강조하기 위한 작가 나름의 설계라고는 해도 조금만 슬림하게 정리됐다면 모든 면에서 알찬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소메이 다메히토는 한국에 처음 소개된 작가인데다 문장과 구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궁금증이 더 일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그의 데뷔작이자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우수상 작품인 나쁜 여름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졌습니다. , 이 작품을 계기로 그의 다른 작품들이 한국 독자들에게 더 소개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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