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하야시 마리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서평을 쓰지 않던 10여 년 전에 읽은데다 한두 줄 내외의 짧은 메모 외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작품이지만 당시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언젠가는 꼭 한 번 다시 읽으려고 다짐했던 하야시 마리코의 단편집 '첫날밤'입니다.

다시 읽기 전까지만 해도 수록작 모두 첫날밤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라고 단정했는데, 실은 첫날밤이란 제목은 11편의 수록작 가운데 한 편의 제목일 뿐입니다. 유일하게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던 그 작품의 인상이 너무 강했던 탓에 아마도 이런저런 사연이 깃든 첫날밤에 관한 에피소드를 담은 단편집이라 지레 여겼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 불륜에 빠진 중년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꽤 파격적인 내용도 있고 애잔한 이야기도 있는 반면 블랙코미디 풍으로 불륜을 다룬 작품도 포함돼있습니다. 사랑 이야기에 관한 한 정갈하든 격정적이든 해피엔딩이 기약된 전형적 스토리보다는 평범한 인물들이 주고받는 일그러지고 비틀린 감정과 그에 어울리는 씁쓸하거나 비극적인 엔딩에 더 관심이 가는 취향이라 그런지 저에겐 별 다섯 개도 모자랄 정도로 애정 덩어리인 단편집입니다.

 

11편의 수록작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몇 편만 간략히 요약해보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남겼던 불륜이 오랜 시간이 지나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아이러니(‘애완동물가게의 스캔들’), 아슬아슬하게 감춰온 불륜의 비밀이 뜻밖의 반전을 맞이하는 씁쓸한 이야기(‘잘 다녀오셨어요?’), 전쟁미망인인 올케에게 남편을 빌려줘야 했던 시누이의 회한, 그리고 처녀의 몸으로 자궁을 들어내야 하는 40대 딸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아버지의 위험한 결심 등 패륜 혹은 그에 가까운 부도덕한 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어쩐지 짠하고 애틋하게 읽히는 이야기(‘눈 소리’, ‘첫날밤’), 39살에 가슴 설레는 사랑을 다시금 일깨워준 불륜의 행복감에 도취됐다가 갑작스레 비참한 현실로 내동댕이쳐지는 평범한 주부의 이야기(‘봄 바다로’) 등입니다.

 

292페이지에 수록된 단편이 11편이니 평균 3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에 불과하지만 간결하고 선명한 감정 묘사와 공감률 100%의 캐릭터 덕분에 이야기의 밀도는 어지간한 장편보다 높고 농밀합니다. 특히 거의 모든 수록작에서 다루고 있는 다채로운 색깔의 불륜의 향연은 그만큼 여러 가지 감정과 여운을 만끽하게 하는데, 지극히 통속적이고 때론 불쾌감을 자아내는 이야기들이긴 해도 오히려 선남선녀의 뻔한 해피엔딩 멜로보다 더 현실감 있고 깊이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저와 비슷한 취향을 가졌거나 그런 쪽으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추천하고 싶은 하야시 마리코의 '첫날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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