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더스
나가우라 교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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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유능한 회사원이지만 과거 완전범죄로 연쇄살인을 저질렀던 아쿠쓰 기요하루. 그리고, 공범의 유서 때문에 살인용의자로 조사받았지만 결국 혐의를 벗은 뒤 유능한 경찰로 활약 중인 노리모토 아쓰코. 일면식도 없던 두 사람은 어느 날 유즈키 레이미라는 여성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의 진상과 실종된 언니의 행방을 알아내라.”라는 협박에 가까운 지시를 받습니다. 경찰도 찾아내지 못했던 과거 자신들의 살인에 관한 증거를 들이민 레이미의 협박에 두 사람은 도리 없이 파트너가 되어 수사에 나섭니다. 난관 끝에 진실 가까이에 다가가지만,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자신들처럼 살인을 저지르고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작품에는 크게 세 그룹의 머더스’, 즉 살인자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추적해온 부녀자 납치범을 직접 단죄하는 전직 경찰,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망가뜨린 괴물을 완전범죄를 통해 살해한 두 주인공, 자신을 괴롭히는 을 스스로 혹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해하곤 법의 심판을 피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야말로 주인공부터 조연에 이르기까지 온통 살인자 캐릭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표현만 좀 다를 뿐 이들은 같은 종()처럼 보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자신만의 정의에 함몰되어 각자의 집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 그룹의 정의는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누군가의 정의는 개인적인 신념이나 복수심에 근거하지만, 누군가의 정의는 집단적인 광기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은 채 충돌하는데, 이런 설정 덕분에 머더스는 겉으론 살인자들간의 혈투를 그린 액션 스릴러로 보이지만, 실은 정의에 관한 살인자들간의 논쟁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사적 복수를 다룬 장르물을 무척 좋아하지만, ‘머더스는 이야기의 뼈대와 캐릭터가 워낙 특이하게 설계된데다 폭력적인 액션 장면까지 가미돼서 지금껏 읽은 여느 사적 복수 장르물들과 전혀 다른 인상을 줍니다. 어머니의 죽음과 언니의 실종의 진실을 밝히고 사적인 복수를 가하려는 레이미가 무능한 경찰 대신 완전범죄로 사적 복수를 이룬 두 명의 능력자를 고용한다는 설정이나, 그 능력자들이 밝혀낸 진실 뒤에 또 다른 사적 복수 살인자들이 숨어있다는 설정은 다소 인공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나름 참신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요 인물들 모두 을 사적으로 처리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정의와 신념 때문에 불가피하게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다보니 그 누구도 선과 악으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은 이 작품만의 독특한 미덕이기도 합니다. “이 살인자와 저 살인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누구를 선으로, 누구를 악으로 봐야 하는가?”라는 흥미로운 딜레마는 마지막 장까지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두 주인공 기요하루와 아쓰코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너무 쉽게 포착하는 점이나 그들이 상대하게 되는 살인자들의 광기와 신념이 지나치게 인공적인 나머지 현실감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 자신만의 정의에 충실한 세 그룹의 살인자들 사이의 차별화가 조금은 모호해 보인다는 점은 읽는 내내 아쉬움으로 남은 게 사실입니다. 사소한 문제지만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한 기요하루가 이른바 스파이 수준의 재능과 액션 히어로에 버금가는 폭력을 구사하는 장면도 통쾌하긴 해도 위화감이 더 강하게 든 설정이란 생각입니다.

 

나가우라 교의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니 특수기관에서 스파이 훈련을 받은 주인공이 활약하는 리볼버 릴리’, 중국 반환 직전의 홍콩에서 벌어지는 첩보전을 다룬 언더독스등 첩보와 액션이 버무려진 스릴러 작품이 대부분인데, 권총 한 자루 등장하기 어려운 아시아라는 무대를 감안하면 꽤 특이한 장르를 파고드는 작가로 보입니다. 일본에서 대체로 좋은 성적과 평가를 받았다는 출판사 소개대로라면 앞으로 그의 작품을 주목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이 작품의 주인공인 완전범죄 능력자 커플기요하루와 아쓰코 콤비의 활약을 그린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개인적으론 꼭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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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관람차 살림 펀픽션 2
기노시타 한타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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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한 관람차에서 기괴한 인질극이 벌어집니다. 범인은 말단 야쿠자 다이지로. 동행한 30대 여성 니나를 인질로 잡은 그는 관람차를 정지시킨 뒤 그녀의 아버지에게 6억 엔이라는 거금을 요구합니다. 탈출이 불가능한 관람차 주변을 경찰이 둘러싼 가운데 다이지로의 인질극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한편 다이지로의 앞뒤 칸에는 어딘가 수상쩍은 인물들이 타있습니다. 4차원 전업주부 아사코와 가족들, 전설적인 소매치기였던 70대 노인 긴지, 그리고 이별해결사라는 묘한 직업을 가진 미스즈 등이 그들인데, 왠지 평범한 관광객도 아닌 것 같고 눈앞에 닥친 인질극에 대해서도 수상한 태도를 보일 뿐입니다. 과연 이들의 정체는 뭘까요?

 

한국에는 단 네 편의 작품밖에 소개되지 않은 기노시타 한타는 개인적으로 작품의 재미와 완성도에 비해 너무 저평가된, 또 너무 덜 알려진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앞서 읽은 악몽의 엘리베이터삼분의 일’, 그리고 이 작품에 이르기까지 하나 같이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미덕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데, 속사포처럼 빠른 속도감과 롤러코스터 같은 좌충우돌 전개에 코믹과 액션과 감동과 반전까지 골고루 지닌 수작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악몽의 관람차는 치밀하고도 격정적인 복수 코드까지 가미된 덕분에 앞서 읽은 두 작품과는 사뭇 다른 여운과 인상을 남기기도 했는데, “도대체 이렇게 판을 벌려놓고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러지?”라는 의문을 수시로 갖게 만드는 기노시타 한타 특유의 기발한 설정과 캐릭터가 복수라는 진지한 코드와 만나면서 재미 이상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납치 인질극이 시작되기까지의 과정, 관람차에 갇힌 주요 인물들의 과거사, 그리고 인질극의 마무리 등 크게 세 덩어리로 나뉘어져있습니다. 특히 과거사를 다룬 중반쯤에 이르러 범인 다이지로와 인질 니나는 물론 앞뒤 칸에 탄 인물들이 결코 우연히 한날한시에 이 기괴한 상황에 놓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독자는 작가의 교묘하고도 빈틈없는 설계에 여러 번 감탄하게 됩니다. 또 클라이맥스에서 그가 왜 굳이 관람차라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범행을 저질렀는가가 폭로되는 순간 독자는 그저 재미있게만 읽혔던 앞의 내용들을 새삼 다른 감정으로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야말로 재미와 감동과 안타까움이 절묘하게 뒤섞인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라고 할까요?

 

악몽 시리즈는 한국에 출간된 두 작품 외에도 惡夢のクロ-ゼット’(악몽의 벽장), ‘惡夢商店街’(악몽의 상점가), ‘惡夢のギャンブルマンション’(악몽의 도박 맨션), ‘惡夢のドライブ’(악몽의 드라이브) 등이 일본에서 출간됐습니다. 가장 최근에(2014) 한국에 소개된 삼분의 일이 포함된 분수 시리즈역시 삼분의 이’, ‘오분의 일’, ‘칠분의 일등 여러 작품이 있는데, 개인적으론 어느 곳에서든 그의 매력적인 작품들을 출간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노시타 한타의 독특함과 기발함이라면 충분히 한국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한국 소개작 중 아직 못 읽은 그의 작품은 폭주가족 미끄럼대에 오르다만이 남았는데, 이미 절판된 지 오래라서 중고서점을 뒤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었던 그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악몽의 엘리베이터도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빠른 템포와 숨이 찰 정도의 재미난 스릴러를 찾는 독자라면 이번 여름에 기노시타 한타의 작품들과 만나보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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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
마이클 코리타 지음, 최필원 옮김 / 황금시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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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소년 제이스는 우연히 살인현장을 목격한 일로 중요한 증인이 되지만 그와 동시에 잔혹한 킬러인 블랙웰 형제의 타깃이 됩니다. 제이스를 보호하던 민간 경비요원 제이미는 뛰어난 생존기술 교관 이선 서빈에게 제이스를 숨겨달라고 부탁합니다. 거친 산악지대에서 생존 캠프를 운영하는 이선은 아내 앨리슨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제이스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블랙웰 형제는 기어이 제이스의 행방을 알아냈고, 깊은 산속에서 훈련 중이던 이선과 제이스는 그들이 코앞까지 추격해왔음을 알게 됩니다. 험준한 산악, 뇌우와 폭풍, 그리고 거대한 화마까지 덮쳐온 가운데 제이스를 죽이려는 자들과 구출하려는 자들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옮긴이의 말의 첫 줄은 코맥 매카시가 클리프행어를 소설로 쓴다면?”입니다. 비록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유일하게 읽은 코맥 매카시의 작품이지만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비유였습니다. 무엇보다 그 작품에 등장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청부업자 안톤 시거를 연상시키는 살인마 블랙웰 형제가 주인공들 못잖게 눈길을 끌었는데,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 기대될 정도로 소름 돋는 캐릭터였습니다.

또 언제 봤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산악 액션스릴러 영화 클리프행어의 살벌한 긴장감 역시 이 작품에서 제대로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론 거기에다 화재에 관한 영화 중 최고로 꼽을 수 있는 분노의 역류의 매력 역시 이 작품 속에서 울창한 거봉들을 집어삼킨 거대한 화마를 통해 오랜만에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 코리타의 밤을 탐하다오늘 밤 안녕을이 할리우드에 딱 어울리는 엔터테인먼트 액션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제겐 호러와 미스터리가 결합된 초자연 스릴러 작품들인 숨은 강죽음을 보는 눈이 더 깊은 인상을 남긴 탓에 오랜만에 만난 그의 산악+액션+화재+킬러 스릴러는 사뭇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느 쪽이 그의 전공인지 애매해지는 대목이지만 좋게 해석하면 스펙트럼이 무척 넓은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얼개는 단순합니다. 살인을 목격한 14살 소년 제이스를 놓고 그를 죽이려는 무자비한 킬러 형제들과 그를 살리려는 여러 사람들의 긴박한 추격전이 대자연의 재앙을 배경으로 속도감 있게 전개됩니다. 생존기술 캠프를 운영하는 이선 서빈, 그의 아내이자 산악지대 토박이인 앨리슨, 최정예 소방대원이었지만 동료를 잃은 뒤 화재 감시탑 요원이 된 해나 페이버가 제이스를 살리기 위한 고된 여정에 동참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 작품의 제목은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이 아니라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자들이 더 맞는지도 모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20215월 개봉) 속 주인공은 제이스를 찾기 위해 악전고투를 펼치는 생존기술 교관 이선 서빈이 아니라 화재 감시탑 요원이 된 해나 페이버(안젤리나 졸리)란 점입니다. 아무래도 제이스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인물이다 보니 각색 과정에서 소설과는 다른 주인공이 탄생한 것 같은데, 그 때문에라도 영화로 만들어진 이 작품을 꼭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액션 스릴러의 모든 것을 담고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인데, 평점에서 별 1개를 뺀 이유는 막판 반전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언급은 못하지만) 이름까지 바꾸고 험악한 산악 캠프에 몸을 숨긴 제이스를 킬러 형제가 도대체 어떻게 찾아냈는지 계속 궁금했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지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반전이지만 개인적으론 쉽게 죽일 수 있었는데 왜 굳이 이런 골치 아픈 판을 벌인 건가?”라는 의문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못 읽은 탓인지 작가의 설명이 부족했던 탓인지, 아니면 다소 억지스런 반전이었는지는 다 읽고도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막판 반전의 모호함과 아쉬움만 제외한다면 적잖은 분량임에도 한 호흡에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거의 6년 만에 마이클 코리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는데, 아직 출간 안 된 그의 작품이 좀더 한국에 많이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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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기타 사건부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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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미야베 월드 2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16세 소년 기타이치를 선보였습니다. 복어를 먹다가 졸지에 세상을 떠난 오캇피키(하급관리의 지명을 받아 치안업무를 맡던 민간인) 센키치 대장의 막내 수하이며, 대장이 생업으로 삼아 제작하던 문고(두꺼운 종이로 만든 상자)를 멜대에 담아 거리에서 팔던 문고 행상소년입니다.

그동안 미야베 월드 2의 주인공들은 조금씩 성격이 다르긴 해도 나름 특별한 능력이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기타이치는 능력도, 나이도, 카리스마도 심지어 외모조차 다소 부족한 축에 속합니다. 그의 장점이라면 선하고 순수한 정의감 정도라고 할까요?

 

센키치 대장은 기타(이치)의 따뜻한 마음씨, 약자를 돕는 친절한 마음을 칭찬했어. 그건 기타가 타고난 천성이고 버리지 말아야 할 장점이라고.” (p218)

 

착한 주인공임엔 분명하지만 괴담이 가미된 시대물 미스터리를 이끌어갈 카리스마는 확실히 부족합니다. 그래선지 미미 여사는 그의 주변에 여러 능력자들을 배치했습니다. 센키치 대장의 미망인인 마쓰바는 시력을 잃었지만 뛰어난 감각능력과 추리력을 갖춘 최고의 후원자입니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에도의 미스 마플입니다.) 이 시리즈의 명칭을 기타이치&마쓰바 시리즈로 삼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의 활약은 대단합니다.

또 무력을 담당하는 목욕탕 가마 일꾼기타지, 사무라이 신분이지만 못 하는 일이 없는 만능꾼 오우미 신베에, 센키치 대장의 절친으로 호색한이란 것 외엔 모든 게 불분명한 미스터리한 셋집 관리인 도미칸 등 다양한 능력자들이 기타이치를 음으로 양으로 돕고 있어서 마치 에도 어벤저스같은 인상을 풍기는 점은 사뭇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아직 여러 모로 부족하다보니 기타이치가 혼자 힘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에피소드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오캇피키가 되고 싶었던 기타이치는 센키치 대장이 살아 있었다면...”이란 생각을 머릿속에 품은 채 매 상황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성장시킵니다. 동시에 주변의 능력자들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그것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기 위해 성실하고 진지하게 노력합니다. 말하자면 아직은 새싹에 불과한 기타이치가 센키치 대장 못잖은 큰 나무로 성장하는 과정이 괴담이나 사건 못잖게 독자들의 관심거리가 될 거란 뜻입니다.

 

모두 네 편의 중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아무래도 시리즈의 첫 편이다 보니 기타이치와 주변 인물들의 소개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기타이치가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 잡곤 있지만 조력자들 역시 만만치 않은 캐릭터들이라 여러 페이지에 걸친 설명이 필요한 건 사실인데, 덕분에 괴담 미스터리는 상대적으로 심플하거나 덜 복잡하게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또 이전 작품들에 비해 역주(譯註)가 꽤 많이 눈에 띄어서 이 작품을 통해 미야베 월드 2을 처음 접한 독자라면 조금 머리가 아플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직전 작품인 눈물점까지 마스터한 저도 처음 접하는 단어들이 많았는데, ‘초보독자라면 에도시대에 관한 기초 지식을 요약해놓은 역자 후기’(p373~376)를 먼저 읽으면 큰 도움일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새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게 사실인데, “히어로는 없고 입장이 약한 사람들뿐인 이 이야기는 필생의 과업인 미시마야 시리즈와 함께 제가 현역으로 있는 이상 앞으로도 쭉 이어가고 싶습니다.”(p381)라는 미미 여사의 의지를 보곤 이 시리즈에 대한 그녀의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야베 월드 2의 광팬인 저 역시 당연히 기타이치에게 더 애정을 갖고 응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시리즈 오프닝인 이 작품은 다음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베일에 싸인 기타이치 주변의 능력자들의 사연도 궁금하고, 오캇피키의 꿈과 함께 문고상으로 독립하려는 뜻을 굳힌 기타이치가 어떻게 성장해나갈지도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네 편의 수록작을 통해 이미 한 뼘 이상 훅 자란 기타이치가 이후 어떤 사건, 어떤 괴담들과 마주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건 미야베 월드 2의 팬이라면 누구나 갖는 비슷한 심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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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러브레터
야도노 카호루 지음, 김소연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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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미호코의 흔적을 발견한 미즈타니는 흥분과 떨림 속에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냅니다. 30년 전,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신부 미호코는 영원히 종적을 감췄고, 영문도 모른 채 망연자실했던 신랑 미즈타니는 끝내 그녀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날아든 미호코의 답장. 이후 두 사람은 30년 전 대학 연극부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는 미처 털어놓지 못했던 내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메시지가 거듭될수록 상상도 못했던 비밀과 거짓말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30년 전 결혼식 당일에 사라진 신부를 페이스북에서 뒤늦게 발견한 50대 중년남 미즈타니와 지금까지 그날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던 미호코가 주고받는 메시지는 마치 로맨스그레이의 그것처럼 애잔한 온기로 가득합니다. 대학 연극부에서 함께 보냈던 황금의 시간들, 이즈 바닷가에서의 열정적인 키스, 그리고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쉽지 않은 사연 등이 이제는 색이 바랜 오래된 연애편지마냥 두 사람 사이를 오갑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제목이 기묘한 러브레터이고 미스터리 작품이란 걸 감안하면 메시지 속의 따뜻한 애정이 언젠가 기괴하게 급변할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쉽고 단순한 문장들로 이뤄진 그들의 메시지 속 어딘가 트릭이 감춰져 있을 것 같았고, 덕분에 어지간히 난해한 문장들을 읽을 때보다 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작품을 서술트릭이라고 칭한 일본 독자의 서평이 있긴 하지만 몇몇 대목에서 주인공들의 정체와 신분을 희미하게나마 눈치 챌 수 있는 힌트와 트릭이 있을 뿐 딱히 서술트릭으로 분류될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랑, 비밀과 거짓말 때문에 여기저기 생채기만 남은 사랑, 자기애와 이기심에 사로잡힌 일그러진 사랑 등 주인공뿐 아니라 여러 조연들의 다소 극단적인 감정들을 온순한 문장들 속에 교묘하게 감춰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작품은 두어 번에 걸쳐 언급되는 불행의 신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운명이라는 지극히 감성적인 테마가 결혼식 당일 사라진 신부의 미스터리와 엮이면서 미즈타니와 미호코가 주고받는 메시지는 점차 불온한 기운을 띠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드러나는 과거 속 비밀과 거짓말은 격한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다가 30년 전의 진실을 폭로하며 종장을 맞이하게 됩니다.

 

무척 흥미롭게 읽었고 예상했던 것 이상의 엔딩을 즐긴 작품이긴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막강의 반전.”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살짝 과장된 듯 보인 게 사실입니다. 이 카피 때문에 과도한 기대감을 건 독자라면 거꾸로 실망감만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30년 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소박한 호기심으로 한 페이지씩 넘기다 보면 천천히 잠식해오는 불안감과 엔딩에 대한 궁금증이 고조되는 걸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꼭 참고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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