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수상한 서재 4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0년 광주 인근 온계리에 살던 6살 지아는 어머니가 계엄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걸 목격했고 그 충격과 공포와 죄책감으로 인해 두 번째 인격인 혜수를 만들어냅니다. 지아가 극도의 스트레스에 빠질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던 혜수는 영리하고 악의에 찬 모습으로 무자비한 짓을 저질러놓곤 태연히 모습을 감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아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20세기의 마지막 밤, 혜수가 일으킨 상해사건으로 인해 곤경에 빠진 25살의 지아는 현실에서 도망치듯 몸과 마음을 혜수에게 내주고 말았는데, 문제는 지아가 다시금 자기 자신을 되찾은 게 무려 19년 뒤라는 점, 또 하필 그 순간이 강원도 항구도시 묵진의 깊은 산속에서 삽을 든 채 젊은 여자의 시체를 파묻는 중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승민의 데뷔작인 콘크리트는 바닷가 인근의 쇠락한 도농복합시인 안덕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미스터리처럼 시작되지만 뒤로 갈수록 불온한 태풍, 지독한 악취, 도시를 뒤덮은 거미 등 온갖 불편한 코드들과 함께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를 발산한 작품인데,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막판 전개에 다소 공감할 수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워낙 필력이 뛰어나서 작가의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은 혜수라는 이중인격을 지닌 지아가 19년 동안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서울을 떠난 혜수가 항구도시 묵진에서 보낸 그 19년은 지아로서는 조금도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남의 기억일 뿐이지만, 젊은 여자의 사체를 파묻던 순간 자기 인격을 되찾은 탓에 지아는 도저히 그 19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죽은 여자는 누구이며, 그녀를 죽인 게 혜수인지, 그렇다면 19년이나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있던 혜수가 왜 하필 그 순간 자신을 소환한 것인지 지아로서는 풀지 않으면 안 될 수수께끼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쇠락한 항구도시 묵진에서 지아는 우여곡절 끝에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콘크리트의 서평에서 하승민의 탄탄한 필력을 인정하긴 했지만,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정유정, 김언수를 잇는 한국형 스릴러 작가라는 출판사 홍보글을 봤을 때는 솔직히 과장광고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읽는 도중 실제로 여러 차례 정유정의 ‘7년의 밤과 김언수의 뜨거운 피가 떠올랐는데, ‘7년의 밤의 공포와 귀기를 연상시키는 지아의 진실 찾기 여정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고, ‘뜨거운 피의 배경이었던 구암 바다의 비릿하고 음산한 분위기보다 더 강한 악취를 내뿜는 묵진의 쇠락과 음탕함은 잔혹한 두 번째 인격 혜수가 그곳에서 보낸 19년의 불길함을 더욱 고조시켰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전작에 비해 한층 더 깊고 묵직해진 문장을 통해 이 모든 위험천만한 캐릭터와 분위기와 소재들을 잘 버무렸습니다. 더는 새롭지 않은 이중인격이라는 설정을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냈고, 미스터리 역시 빈틈없이 촘촘하게 배치하여 막판까지 잘 끌고 갔으며, 비록 눈치 빠른 독자라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반전은 반전 그 자체보다 인물들의 감정이나 심리에 더 방점을 찍은 덕분에 결코 허술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혜수에게 몸과 마음을 내준 채 19년간 자취를 감췄던 지아의 심리도, 또 애초 공포와 죄책감에서 태어나 악의로 똘똘 뭉쳤지만 결국 상처투성이 지아와 닮은꼴일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인격 혜수도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엔 그저 안타깝고 안쓰럽게만 여겨졌습니다.

 

나름 호평에 가까운 서평을 쓰고도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과도한 사족과 그로 인한 필요 이상의 분량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본류와 무관한 사족들이 너무 많았던 탓에 고백하자면 중반쯤부터 클라이맥스 직전까진 스킵하면서 넘긴 페이지가 적지 않았습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매력이 가득했던 문장들이 어느 시점부터인가 조연들의 시시콜콜한 사연이나 동어반복처럼 느껴진 지나친 풍경 묘사 등 없어도 무방한 내용들을 되풀이하면서 피로도가 높아진 탓입니다. 작가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겠지만 500페이지 내외였다면 오히려 더 탄탄하고 내실 있는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이건 지극히 사적인 의견이고 601페이지의 분량도 모자라다고 생각할 독자도 분명 있겠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곱 색의 독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까지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을 꽤 많이 읽었는데, 그중 가장 처음 읽은 건 경시청 수사1과 형사 이누카이 하야토가 주인공인 살인마 잭의 고백’(2014)입니다. 그 뒤로 여러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을 읽으면서 나카야마 시치리가 창조한 매력적인 주인공들을 지켜봐왔지만 정작 가장 처음 만났던 이누카이와는 무려 7년 만에 재회하게 됐습니다. 일본에선 여러 작품이 출간된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가 그동안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건 꽤 의아한 일입니다.

 

살인마 잭의 고백에서 이누카이는 피해자의 장기를 적출해간 전대미문의 연쇄살인범과 맞붙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뇌사, 장기기증, 연쇄살인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룬 작품인데 공교롭게도 이누카이에겐 신장이식이 필요한 딸이 있었고 그 때문에 제 기억 속의 이누카이는 꽤 어둡고 무거운 캐릭터로 자리 잡았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만난 이누카이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형사보다 배우가 더 어울릴 법한 외모를 가졌고, 경찰 입문 전 연기학원을 다녔던 덕분에 작은 표정 변화 하나만으로도 상대방의 속셈이나 거짓말을 꿰뚫어보는 재능을 지녔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 재능이 남자에게만 통한다는 점입니다. 즉 여자 용의자에 관한 한 그의 재능은 완전 제로였고, 그래서 매번 속절없이 속아 넘어간 탓에 얼굴값 못하는 이누카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왠지 살인마 잭의 고백에서 만났던 이누카이와는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졌는데, 어쨌든 이 작품에서 일곱 가지 색깔에 비유된 지독한 범죄들을 해결하는 이누카이의 카리스마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여느 주인공들 못잖게 매력적이고 흥미로웠습니다.

 

짧은 단편들이지만 반전의 제왕이라는 별명답게 각 작품마다 나카야마 시치리 특유의 반전 코드들이 잘 살아있습니다. 쉬워 보이거나 금세 해결될 것 같던 사건들은 대부분 이누카이의 막판 뒤집기에 의해 그 진실을 드러내곤 합니다. 단순한 졸음운전의 결과로 보이던 고속버스 사고의 내막(‘붉은 물’, ‘보라색 헌화’),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한 중학생의 자살의 진실(‘검은 비둘기’), 신인작가의 죽음을 둘러싼 추악한 탐욕들(‘하얀 원고’), 노숙자-중학생-치매노인이 얽힌 비극(‘녹색 정원의 주인’) 등 일곱 가지 색깔로 비유된 소제목만큼이나 다양하고 특이한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매번 이누카이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력이 사건 현장과 관련자들을 집요하게 훑어나간 끝에 진상과 진범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건들은 짜릿함이나 통쾌함보다는 대체로 무거운 여운이 담긴 엔딩을 맞이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이누카이의 캐릭터가 시원시원하고 밝은 분위기의 멋진 해결사라기보다 유능하긴 해도 개인적인 아픔(아내와의 이혼, 입원중인 중학생 딸과의 갈등)을 안고 있는 고독하고 그늘진 형사에 좀더 가깝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 실제 범행을 저지르진 않았어도 범인보다 더 죄가 무거운 간접 가해자가 자주 등장하는 점 역시 이누카이의 이런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설정이란 생각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후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가 계속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나카야마 시치리에 대한 피로도가 살짝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이누카이의 활약을 그린 작품을 외면하는 건 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 같습니다. 다만 다음에는 단편보다는 좀더 묵직한 서사가 담긴 장편을 통해 이누카이와 만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색창연한 언덕 위의 저택, 너무나도 완벽한 아내,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화가로서의 명성 등 43살 이한조는 삶의 절정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내가 남겨놓은 몇 장의 소설 원고를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소설이지만 그건 분명 한조 본인의 이야기였고, 그대로 출간된다면 지금의 삶을 완전히 파멸시킬 만큼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원고를 읽으면서 한조는 25년 전 여름의 그날을 떠올립니다. 하천에서 발견된 이웃 여고생 지수의 시신은 한조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여러 사람의 운명을 잔인하게 비틀어버렸습니다. 한조는 아내가 이 이야기를 쓴 이유에 대한 의문과 함께 오랫동안 외면하며 봉인해온 25년 전 사건이 여전히 자신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폐인이나 다름없던 자신을 성공한 화가로 이끈 완벽한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 한 편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려 하자 패닉에 빠진 한조의 현재 시점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두 가족을 산산조각 낸 25년 전 이웃 여고생 지수의 죽음의 미스터리입니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복수극이라면, 25년 전의 미스터리는 어긋난 사랑, 진실과 거짓, 오해와 외면 등 치명적인 운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시간에 거기 없었더라면, 그녀가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을 했더라면, 그랬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p362에서 발췌)

 

운명적인 사건이 그렇듯 한조와 지수의 가족을 박살낸 25년 전 사건은 사소한 계기와 미묘한 엇갈림 때문에 벌어진 비극입니다. 더구나 지수의 죽음의 진실을 모두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다들 그 진실의 한쪽 면만 봤던 탓에, 또 자신이 본 그 한쪽 면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깊숙이 숨긴 탓에 비극은 예정된 것보다 훨씬 더 큰 폭발력과 후유증을 남긴 것입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조와 주변 인물들의 삶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내의 의도와 지수의 죽음의 진실을 한꺼번에 알게 되면서 한조는 끔찍한 파국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현재의 복수극과 과거의 미스터리가 이정명 특유의 묵직한 문장 속에서 촘촘하고 정교하게 잘 엮인 작품입니다. 시종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팽팽함과 속도감 덕분에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 특히 25년 전 진실이 밝혀지는 50페이지 남짓한 막판 반전은 (약간의 기시감이 드는 설정이긴 해도) 많은 사람들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엄청난 비극이란 게 실은 얼마나 사소한 것에 기인할 수 있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다만, 현재 시점의 한조가 처한 위기, 소설을 통해 한조를 파멸시키려는 아내의 복수는 다 읽은 뒤에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억지 설정으로 느껴져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동기도, 과정도, 목적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어서 25년 전 미스터리의 매력을 깎아 내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오히려 평범한 복수극 구도였다면 과거 지수의 죽음과도 개연성 있게 연결될 수 있었고, 독자 역시 아내의 심리와 한조의 공포에 좀더 명쾌하게 공감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과연 누가 저런 식으로 복수를 설계할까?”라는 아쉬움은 책을 덮은 뒤에도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이정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영상화될 계획이 선 걸로 나와 있는데, 제가 느꼈던 아쉬운 대목이 이 작품의 핵심 서사 중 한 가지라 과연 어떤 식으로 영상으로 옮겨질지 무척 궁금합니다. 그 대목이 시청자들의 납득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자칫 용두사미 드라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혼파괴자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5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김희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베를린을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범 영혼파괴자는 젊은 여자들을 각성 혼수상태, , 뇌는 살아있지만 오감은 제거되고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진 상태로 만듭니다. 구조된 희생자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얼마 못가 목숨을 잃고 맙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둔 겨울밤,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정신병원 토이펠스 클리닉에 입원해있던 카스파를 비롯한 환자와 의사들이 영혼파괴자의 습격을 받습니다. 희생자가 등장하고, 의문으로 가득 찬 문구가 적힌 쪽지가 발견됩니다. 밀폐된 건물 안에서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고, 누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추적하지만 영혼파괴자는 유유히 사람들의 추적을 피하며 연이어 희생자를 만들어냅니다.

 

폭설과 혹한 속에 외부와 차단된 토이펠스 클리닉에서 벌어지는 영혼파괴자와 병원에 갇힌 자들 간의 하룻밤 동안의 사투를 다룬 작품입니다. 범인은 영혼파괴자라는 별명만큼이나 독특한 범행수법을 이용하여 연쇄살인을 저지르는데, “그들은 강간도 고문도 당하지 않았다.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다. ‘영혼파괴자는 살아있는 몸속에 그들을 가둬버렸다!”라는 홍보 카피대로 희생자들의 정신을 파괴한 후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기이한 행태를 보여줍니다. 문제는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르던 영혼파괴자가 왜 정신병원에 나타나 자신의 패턴과는 상이한 방법으로 무차별 살인에 나서는가, 입니다.

 

사고로 기억을 잃고 토이펠스 클리닉에 입원한 카스파의 이야기가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데, 그는 조금씩 기억을 되찾으면서 영혼파괴자의 악행이 자신과 무관치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함께 갇힌 사람들 중 일부는 카스파가 영혼파괴자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영혼파괴자와 정면으로 마주치지만 후반부에 드러난 진실은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겨 놓습니다.

 

수십 년만의 폭설과 혹한, 그리고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투는 공포심을 극대화시키는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분위기도, 서사도 전혀 다르지만 영화 큐브를 보며 느꼈던 전율도 맛볼 수 있습니다. 비주얼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서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활자와는 또 다른 공포와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반전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를 초반에 발견할 수 있겠지만, 설령 눈치 챘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워낙 롤러코스터처럼 업다운이 심해서 책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기발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아쉬움이 남았던 이유는 부자연스러운 인공미가 작품 전체에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요점만 말하면 결과를 위해 과정을 무리하게 짜맞췄다.”라고 할 수 있는데, 범행동기도, 수법도, 마지막 반전도 모두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한 결과를 위해 억지로 설명되고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영혼파괴자의 정체와 범행동기가 맥을 빠지게 만들었는데, 좀 거칠게 말하면 굳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고 요란하게 난리를 쳐야했는가?”라고 할까요?

사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취향에 의해 좌우될 것으로 보입니다. 차단된 공간, 기이한 범행수법, 꿈과 기억이 혼재된 몽환적인 서사 등 누구나 호기심을 가질만한 자극적인 설정이 가득하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서평이라 별 세 개에 그쳤지만, 다섯 개를 준 독자의 서평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 작품은 다른 사람이 쓴 서평만으로는 이야기의 몸통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내용들이 워낙 많은데다, 직접 읽지 않고는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운 장치들 역시 많이 포함돼있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괴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이규원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미스터리 대가 중 한 명이지만 한국에 소개된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은 여섯 편에 불과합니다. 데뷔작인 문신살인사건’(1948)이 패전 직후의 혼란을 배경으로 고전 트릭과 함께 주술적인 문신의 세계를 다뤘다면, ‘대낮의 사각’(1960)은 천재적인 경제 사기범을 그린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였고, 그 외에 파계재판’(1961), ‘유괴’(1961), ‘법정의 마녀’(1965)로 이어지는 이른바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는 법정물에 본격 미스터리가 가미된 작품들입니다.

유일하게 못 읽은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1955)문신살인사건에 이은 명탐정 가미즈 교스케 시리즈인데, 제목이나 주인공 캐릭터로 보아 본격 미스터리 계열로 추정됩니다. 1950~6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작가라 마니아 외에는 그다지 어필하기 어렵지만 방대한 그의 작품 수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고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유괴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중 한 작품이지만 정작 주인공 햐쿠타니가 등장하는 분량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카메오처럼 초반에 잠깐 등장했다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후반부 막판에야 제대로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비중과 분량을 차지하는 건 진범인 의 범행 과정과 그를 쫓는 경찰들의 고된 수사기록입니다. 본격 미스터리와 경찰소설의 향기는 물론 논픽션 혹은 사회파 미스터리의 색깔까지 깃들어있는데, 그런 면에서 다양한 장르들이 믹스된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범인 는 희대의 아동 유괴살인사건 재판을 지켜보면서 자신만의 유괴범행 계획을 면밀히 수립합니다. 범행과정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퇴로는 어떻게 확보해야 할지를 재판을 통해 꼼꼼하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운까지 따라준 덕분에 의 범죄는 완벽하게 실행되고 경찰은 엉뚱한 곳만 조사하며 허송세월을 보낼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면서 변호사 햐쿠타니가 개입하게 됩니다. 놀라울 정도의 직감과 추진력을 지닌 그의 아내 아키코는 전대미문의 범인추격전을 제안하는데, 과연 베일에 싸인 범인이 그 추격전의 그물망에 걸려들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요즘 독자의 눈높이로 보면 지나치게 디테일하고 조금은 답답할 정도의 느린 전개가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진범인 의 범행계획은 꼼꼼하긴 해도 다소 어수룩해 보였고, 경찰의 탐문과 범인 추격은 일지를 기록한 듯 세세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유괴된 아동의 가족들 사이에 벌어지는 추하고 탐욕스런 이전투구 역시 관찰 기록처럼 자세히 묘사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디테일이야말로 고전의 맛과 매력중 한 가지라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막판에 등장한 주인공 햐쿠타니와 그의 아내 여전사아키코가 이끌어내는 급격하고 놀라운 반전의 효과는 분명 거북이걸음마냥 차곡차곡 쌓여온 미스터리 서사 덕분인데, 성격 급한 독자라 하더라도 초중반의 지루함과 느슨함을 잘 견뎌낸다면 고전 미스터리의 흥미로운 매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색해보니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는 모두 여덟 편이 출간된 걸로 나옵니다. 한국에는 단 세 편만 출간됐는데 2017법정의 마녀’(엘릭시르) 이후 4년이나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큰 기대를 하긴 어렵지만 (검은숲의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2015년에 개정판 형태로 출간된 문신 살인사건이후 통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한두 편 정도는 더 소개되지 않을까, 가망은 별로 없지만 나름 간절한 바람을 가져봅니다. 현대 미스터리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투박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진정성이 느껴지는 고전이 때때로 그리워지는 건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누구나 갖는 로망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