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친한 친구들 스토리콜렉터 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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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교사이자 극렬 환경운동가인 파울리가 동물원 인근에서 참혹한 사체로 발견됩니다. 호프하임 경찰청 보덴슈타인 반장은 열혈 여형사 피아 키르히호프와 함께 수사에 나서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파울리의 극단적인 환경운동을 추종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적들, 그것도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한 자들이 파울리 주변에 널렸기 때문입니다. 파울리가 가르치던 학생, 이혼한 전처, 갈등중인 이웃은 물론 환경과 동물보호 문제로 잦은 충돌을 빚던 기업이나 관료, 심지어 동물원 원장까지 용의선상에 오르고 특히 최근 도로확장 계획을 놓고 거세게 대립하던 관계자들도 수사대상에 오르지만 출구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들이 하나둘씩 무혐의 처분을 받는 가운데 파울리를 추종하던 청년 한 명이 살해되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확신합니다.

 

끄떡하면 새로운 용의자가 나타나고, 강력한 살해 동기를 가졌다 싶어서 쫓아가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막혀버리니 사람 환장할 노릇 아닌가! (p243)

 

이 작품의 구도를 잘 압축해놓은 보덴슈타인의 탄식입니다. 전작인 시리즈 첫 편 사랑받지 못한 여자역시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만큼 수많은 용의자가 등장하고 그에 따른 부수적 사건들이 여러 건 발생했는데, ‘너무 친한 친구들은 그에 못잖은 복잡한 구도로 이뤄진 작품입니다.

살해된 환경운동가 파울리는 생전에 그 언행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공격적이라 사방팔방에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적들을 만들었습니다. 자연히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수사는 닥치는대로 여기저기 찔러보기’, ‘알리바이가 모호하거나 심증이 가는 인물은 일단 체포하기등 조금은 막무가내 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와중에 사건 관련자인 청년 한 명까지 살해되자 그야말로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더 난감한 것은 두 남자가 살해된 메인 사건 못잖게 주변 인물들이 관련된 부수적 사건들까지 사방에서 요동치는 바람에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혼란 속에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복잡한 설정은 때론 독자에게 도전적인 추리 욕구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때론 이야기의 향방을 모호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후자의 경향이 강했다는 느낌인데, 추정하자면 메인 사건 자체가 사이즈도 작고 강렬하지 못하다 보니 주변 인물들과 부수적인 사건이 애초 의도보다 훨씬 더 확장된 결과 같습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뭘 쫓고 있는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고, ‘극렬 환경운동가의 도로확장 반대운동이라는 중요한 초기 모티브마저 희미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동기가 앞서 펼쳐진 그 복잡한 구도를 다소 허무하게 만들 정도로 단순했다는 점인데, 역자 후기에 실린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욕망은 비틀리고 걷잡을 수 없는 괴물로 변한다.”는 이 작품의 주제를 위해 그토록 많은 용의자와 부수적 사건들이 반드시 필요했던 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전작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가 복잡한 구도 속에서도 나름 하나의 방향으로 이야기가 응집됐다면 너무 친한 친구들은 왠지 갈팡질팡하다가 이야기 자체가 미궁에 빠진 듯 보였습니다.

 

시리즈 초반이라 주요 등장인물들의 개인사나 과거에 대한 설명이 자주 등장했는데, 피아의 경우 20대 초반에 겪은 끔찍한 사건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용의자 중 한 명인 동물원 원장 크리스토프 산더와 위험한 감정을 주고받는 에피소드, 또 여성비하적인 시선을 가진 저질 캐릭터 형사와의 충돌이 눈에 띄었고, 보덴슈타인 역시 중년의 위기를 겪는 듯한 아내 코지마와의 갈등, 사춘기의 절정을 달리는 딸 로잘리와의 충돌이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이미 이 시리즈의 최근작까지 다 읽은 터라 이들의 인연이 어떻게 전개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는 제법 쏠쏠한 편이었습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다음 작품인 깊은 상처는 이 시리즈의 백미인 백설공주에게 죽음을과 함께 가장 좋은 인상을 받은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리즈를 순서대로 다시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의 성장과 변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그와 함께 작가의 성장을 미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시리즈 초반의 두 작품이 좀 어수선했다면 세 번째 작품부터 넬레 노이하우스의 진짜 저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물론 이후에도 다소 아쉬웠던 작품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이 스토리 못잖게 흥미진진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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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교사이자 극렬 환경운동가인 파울리가 동물원 인근에서 참혹한 사체로 발견됩니다. 호프하임 경찰청 보덴슈타인 반장은 열혈 여형사 피아 키르히호프와 함께 수사에 나서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파울리의 극단적인 환경운동을 추종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적들, 그것도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한 자들이 파울리 주변에 널렸기 때문입니다. 파울리가 가르치던 학생, 이혼한 전처, 갈등중인 이웃은 물론 환경과 동물보호 문제로 잦은 충돌을 빚던 기업이나 관료, 심지어 동물원 원장까지 용의선상에 오르고 특히 최근 도로확장 계획을 놓고 거세게 대립하던 관계자들도 수사대상에 오르지만 출구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들이 하나둘씩 무혐의 처분을 받는 가운데 파울리를 추종하던 청년 한 명이 살해되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확신합니다.

 

끄떡하면 새로운 용의자가 나타나고, 강력한 살해 동기를 가졌다 싶어서 쫓아가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막혀버리니 사람 환장할 노릇 아닌가! (p243)

 

이 작품의 구도를 잘 압축해놓은 보덴슈타인의 탄식입니다. 전작인 시리즈 첫 편 사랑받지 못한 여자역시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만큼 수많은 용의자가 등장하고 그에 따른 부수적 사건들이 여러 건 발생했는데, ‘너무 친한 친구들은 그에 못잖은 복잡한 구도로 이뤄진 작품입니다.

살해된 환경운동가 파울리는 생전에 그 언행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공격적이라 사방팔방에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적들을 만들었습니다. 자연히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수사는 닥치는대로 여기저기 찔러보기’, ‘알리바이가 모호하거나 심증이 가는 인물은 일단 체포하기등 조금은 막무가내 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와중에 사건 관련자인 청년 한 명까지 살해되자 그야말로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더 난감한 것은 두 남자가 살해된 메인 사건 못잖게 주변 인물들이 관련된 부수적 사건들까지 사방에서 요동치는 바람에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혼란 속에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복잡한 설정은 때론 독자에게 도전적인 추리 욕구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때론 이야기의 향방을 모호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후자의 경향이 강했다는 느낌인데, 추정하자면 메인 사건 자체가 사이즈도 작고 강렬하지 못하다 보니 주변 인물들과 부수적인 사건이 애초 의도보다 훨씬 더 확장된 결과 같습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뭘 쫓고 있는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고, ‘극렬 환경운동가의 도로확장 반대운동이라는 중요한 초기 모티브마저 희미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동기가 앞서 펼쳐진 그 복잡한 구도를 다소 허무하게 만들 정도로 단순했다는 점인데, 역자 후기에 실린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욕망은 비틀리고 걷잡을 수 없는 괴물로 변한다.”는 이 작품의 주제를 위해 그토록 많은 용의자와 부수적 사건들이 반드시 필요했던 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전작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가 복잡한 구도 속에서도 나름 하나의 방향으로 이야기가 응집됐다면 너무 친한 친구들은 왠지 갈팡질팡하다가 이야기 자체가 미궁에 빠진 듯 보였습니다.

 

시리즈 초반이라 주요 등장인물들의 개인사나 과거에 대한 설명이 자주 등장했는데, 피아의 경우 20대 초반에 겪은 끔찍한 사건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용의자 중 한 명인 동물원 원장 크리스토프 산더와 위험한 감정을 주고받는 에피소드, 또 여성비하적인 시선을 가진 저질 캐릭터 형사와의 충돌이 눈에 띄었고, 보덴슈타인 역시 중년의 위기를 겪는 듯한 아내 코지마와의 갈등, 사춘기의 절정을 달리는 딸 로잘리와의 충돌이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이미 이 시리즈의 최근작까지 다 읽은 터라 이들의 인연이 어떻게 전개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는 제법 쏠쏠한 편이었습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다음 작품인 깊은 상처는 이 시리즈의 백미인 백설공주에게 죽음을과 함께 가장 좋은 인상을 받은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리즈를 순서대로 다시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의 성장과 변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그와 함께 작가의 성장을 미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시리즈 초반의 두 작품이 좀 어수선했다면 세 번째 작품부터 넬레 노이하우스의 진짜 저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물론 이후에도 다소 아쉬웠던 작품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이 스토리 못잖게 흥미진진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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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부스지마 최후의 사건 스토리콜렉터 97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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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야마 시치리의 여러 주인공 중에서도 검거율 1위 형사 출신의 미스터리 소설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부스지마는 2018작가 형사 부스지마를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됐습니다. ‘온갖 잡귀들이 모여 살고 상식이나 상도덕이 통용되지 않는 출판계에서 벌어진 다섯 편의 살인 미스터리가 실려 있는데, 흥미롭게 읽긴 했지만 부스지마의 캐릭터가 기대했던 것만큼 세고 독하게 그려지지 않아 살짝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형사 부스지마 최후의 사건은 그의 형사 시절 마지막 사건을 그린 프리퀄이자 그의 유별난 캐릭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입니다.

 

형사로서 촉도 뛰어나고 수사 수법도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인간성은 또 별개 문제다. 그의 비아냥으로 말하면 일본 제일이고, 독설은 천하일품인 남자다.” (p16)

 

이 남자는 천성이 사냥개로 사냥감을 찾아서 모는 것이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 보통 형사는 다리품을 파는 데 반해 부스지마는 오로지 말을 사용한다. 용의자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는 경시청 제일이라는 평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다.” (p34)

 

뛰어난 능력자지만 경찰 조직에 얽매이지도, 예의나 상명하복 같은 것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경시청 수사1과의 반장인 아소보다 2년 선배지만 승진을 거부한 채 그의 부하로 현장을 누비는 것에 대만족하는가 하면, 발로 뛰어다니기보다는 추리와 심문으로 용의자의 심리를 뒤흔들어 자백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스지마 원발’(원자력발전소처럼 유익하지만 근처에 있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는 별명이 암시하듯 그는 누구에게도 호감을 사지 못하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나름 그의 실력을 인정하며 곁에서 지켜봐주는 아소 반장조차 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부스지마의 위태로운 행보에 심장이 쪼그라들곤 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누카이 하야토는 이 작품에서 경력 2년의 신입 형사이자 부스지마의 파트너로 등장하는데, 무난한 성격의 그조차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부스지마의 기행에 진절머리를 낼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毒島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방팔방에 을 뿌리고 다니는 인물이라고 할까요?

 

대기업이 밀집된 중심가에서 벌어진 총기살인, 출판사에서 일어난 연쇄 폭파 사건, 귀갓길 여성들을 노린 염산 테러, 노인들을 노린 독극물 살인 등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실은 연작 또는 여러 명의 범인이 등장하는 장편으로 봐도 무방한 작품입니다. 애초 각 사건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였지만, 부스지마의 지독한 심문을 받은 범인들이 하나같이 교수라는 자와 SNS를 통해 교류했던 일을 털어놓자 사건의 양상은 이른바 살인교사범을 추격하는 쪽으로 급선회하기 때문입니다. 범인을 특정하기도 힘들고, 특정한다고 해도 물증이나 단서 없이 살인교사범을 잡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부스지마는 그만의 특유의 방식으로 교수를 응징합니다. 그리고 그 응징 때문에 형사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작가로의 전업을 결심합니다.

 

사건은 꽤 무겁고 잔혹하게 설정됐지만 전체적으론 가볍고 시니컬한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부스지마의 캐릭터 자체가 통통 튀는 냉소주의자인데다, 그의 행보를 가슴 졸이며 지켜보는 아소 반장의 리액션은 블랙 코미디처럼 웃음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현장 수사보다 취조실에서의 심문이 부스지마의 전공이라 액티브한 맛은 떨어지지만 비아냥과 독설로 용의자의 자존감을 갈갈이 찢어버리는 장면들은 독특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사건 자체보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돋보이는 별난 간식 같은 작품이라고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 소설가 부스지마가 일시적으로 부업으로 수사에 참여했던 작가 형사 부스지마보다 현장성과 캐릭터의 힘이 돋보인 이번 작품이 훨씬 더 흥미롭게 읽혔는데, 다음 작품에 대한 바람이라면 다시 한 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부스지마의 더 젊은 날들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본업은 작가, 부업은 형사인 부스지마보다는 조직과 좌충우돌하며 독보적인 추리와 지독한 심문으로 범인을 잡아내는 경시청 수사1과의 부스지마가 매력이든 카리스마든 월등히 앞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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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라
L.S. 힐턴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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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여 런던의 미술품 경매회사에 입사한 주디스. 그녀는 노력한 만큼 성공하고픈 순수한 바람을 품었지만,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상사에게 해고당하고 맙니다. 먹고 살기 위해 친구 린의 권유로 시작한 샴페인 클럽 접대 아르바이트 중 자신을 지목한 고도비만의 유부남 제임스 덕분에 대출금과 생활비의 위기를 넘긴 주디스는 어느 날 그와 함께 남프랑스로 여행을 떠납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제임스가 사망하자 주디스는 스스로도 놀랄만한 선택을 합니다. 사고를 은폐하고 그의 돈을 챙겨 도망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주디스의 삶엔 연이은 죽음이 등장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 한두 개는 있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를 만난 탓에, 뭔가를 보거나 겪은 탓에 혹은 새로운 꿈과 욕망을 품게 된 탓에 직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를 갖게 됩니다. 변곡점 이전의 주디스는 불우한 환경에서도 미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경매회사에 들어온 뒤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성실히 노력했습니다. 가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비밀스런 난교 파티에 참석하여 거침없이 욕망을 발산하는 점만 제외하면 주디스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앤디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디스에게 한꺼번에 들이닥친 변곡점들 회사의 해고 통보, 우연히 만난 친구 린 때문에 시작한 접대 아르바이트, 든든한 스폰서 제임스의 갑작스런 죽음 은 이후 그녀의 삶을 180도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생존과 복수를 위해, 또 욕망과 희열을 위해 거침없이 폭주하기 시작한 그녀는 악녀이자 팜므 파탈이자 소시오패스로 진화합니다.

 

주디스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변신은 독자에 따라 당황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첫 사고(제임스의 죽음) 이후 적극적으로 사기와 살인을 저지르며 동시에 원초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도 잊지 않는 그녀의 폭주는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라는 의문을 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죄책감 하나 없이 눈앞의 장애물을 잔혹하게 제거하는 장면들은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처음에는 우연이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라는 이 작품의 첫 문장에 담긴 소박한 변명은 다소 생뚱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숱한 위기를 겪는 가운데 유럽 곳곳을 휘젓는 주디스의 광폭 행보는 위화감이나 의문이 더 깊어질 틈을 주지 않고 연신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어서 독자는 ?”하면서도 그저 몰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덧붙여 이 작품에 ‘19금 딱지를 붙인 무척이나 노골적이고 농도 짙은 성적 묘사는 적절한 타이밍마다 등장하여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 서평을 보면 주디스에 대한 극과 극의 반응을 엿볼 수 있는데, 한쪽이 괴물이 된 채 자신의 목표와 정체성을 잃어버린 여자.”라면, 다른 한쪽은 욕망에 충실한 주디스의 두 번째 삶은 파괴적이긴 해도 매혹적이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두 반응의 중간쯤에 한 표를 던지고 싶은데, 고백하자면, 주디스를 마냥 응원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매도하거나 비난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엔딩 때문입니다. 아마 적잖은 독자가 이런 어중간한 여운을 품은 채 마지막 장을 덮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에로틱 스릴러로 분류되긴 했지만 사실 스릴러로서의 매력은 다소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첫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산만하고 장황한 초중반부는 중도포기를 고민하게 할 만큼 느슨하거나 지루했고(야박한 평점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 뒤에 벌어지는 주디스의 행적들 역시 스릴러라기보다는 괴물로의 진화 기록에 가까워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마저도 사족처럼 느껴진 대목들이 많아서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과도하게 느껴졌는데, 말 그대로 순삭했다는 독자들도 많은 걸 보면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19금 딱지에 어울리는 높은 수위의 묘사가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마에스트라는 결코 성애소설이 아니며 그런 호기심만으로 선택할 작품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강렬한 성적 욕망이 주디스의 주된 캐릭터인 건 맞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높은 수위의 성적 묘사는 양념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시절의 주디스에게 깊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동시에 그녀의 폭풍 같은 삶을 대변하는 두 그림을 소개합니다. 왼쪽은 브론치노의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Venus, Cupid, Folly and Time), 일명 시간과 사랑의 알레고리인데, 이 작품이 미술을 사랑하는 10대 시절 주디스의 순수한 열정을 반영하고 있다면, 오른쪽의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는 변곡점을 맞이한 뒤 욕망 덩어리가 된 주디스의 폭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들이 거론되는 대목에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주디스의 내면을 좀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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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옥희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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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빠져들기 전인 2000년대 초반의 독서목록 가운데 외국작품 대부분은 에쿠니 가오리로 채워졌습니다. 쉽고 간결한 문장 속에 일그러진 관계와 지독한 감정들을 풀어놓은 그녀의 작품은 제 취향과 너무나도 잘 맞아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에쿠니 가오리만큼 관심을 가졌지만 정작 몇 작품만 읽고 말았던 작가가 바로 요시모토 바나나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때라 짧은 메모만 남겨놓았는데, 찾아보니 읽은 작품은 티티새하얀 강 밤배가 전부였고, ‘도마뱀’, ‘암리타’, ‘키친은 아직까지도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추정이지만 아마 티티새하얀 강 밤배이후 별 매력을 못 느꼈던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영심과 호기심이 합쳐져 나머지 작품들을 구매했던 것 같습니다.

 

도마뱀엔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각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든 마음의 상처를 지닌 인물들입니다. 예전 메모에는 주인공 캐릭터와 주요 설정만 한두 줄 정도로 기록해놓아서 어떤 톤의 이야기인지는 고사하고 요시모토 바나나가 어떤 스타일의 작가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는데, ‘도마뱀을 다 읽은 뒤의 솔직한 느낌은 순한 온다 리쿠착한 에쿠니 가오리를 섞어놓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순한 온다 리쿠의 느낌은 대부분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초능력 또는 오컬트적 상황들로 인해 비현실적인 인상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고, ‘착한 에쿠니 가오리의 느낌은 금이 간 거울처럼 회복 불가능 또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는 남녀의 관계가 대부분 희망적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신혼부부지만 너무나도 다른 삶의 방식 때문에 아내에게 질려버린 남자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기이한 노숙자와 대화를 나눕니다. (신혼부부) 어릴 적 끔찍한 범죄를 목격한 뒤로 치유와 저주의 능력을 갖게 된 여자는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한 채 오직 한 남자에게만 입을 열지만 막상 그가 결혼을 청하자 두려움에 휩싸입니다.(도마뱀) 불륜남의 가정을 깨뜨리고 그와 결혼에 성공한 여자는 채워지지 않는 기다림과 한 가정을 파괴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망상에 빠지기도 하고 남편의 새 불륜을 의심하기도 합니다.(김치꿈) 부모의 손에 이끌려 종교공동체에서 12년을 보낸 여자는 18살에 그곳을 탈출하여 자신만의 삶을 꾸리지만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피와 물) 집단난교에 탐닉했다가 평범한 삶으로 돌아온 여자는 결혼을 앞두고 불안정한 상황에 처합니다. 오래 전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물론 집단난교 시절의 비밀이 폭로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오카와바타 기담)

 

요시모토 바나나는 시간과 치유, 숙명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즉 큰 상처를 가졌거나 그 상처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인물들을 그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희망이라는, 막연하긴 해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품은 채 엔딩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냥, 갑자기희망을 발견하고 미래를 낙관하기 시작하는 주인공들의 태도는 통 개운치 않았습니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문득 정신 차려 보니 갑자기 머리가 맑아져있었다.”, 등 상처와 절망에 휩싸였던 인물들의 극적인 태도 변화는 앞뒤 맥락 없이 그냥 툭 튀어나옵니다. 그리곤 내일 아침에는 어제까지의 일이 전부 말끔히 제거되어 있을 게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뭔가 반짝반짝 빛나는 걸 느꼈다.”라며 밝은 미래를 기대하는 엔딩으로 이어집니다. 살다 보면 이런 깨달음과 낙관이 갑작스레 들이닥칠 때도 있긴 하지만, 읽는 내내 삶이 이렇게 단순한가?”라는 위화감과 불편함이 들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덧붙여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앞서 언급한대로 많은 수록작 속에 초능력 혹은 판타지 설정이 느닷없이 끼어든다는 점인데, 요시모토 바나나에 대해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니 그녀만의 독특한 개성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론 신선함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더 앞섰지만 말입니다. , 기존 문법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듯한 혼란스러운 화법은 처음엔 번역의 문제라고 여겨졌지만 옮긴이의 말을 보니 요시모토 바나나 특유의 자유분방한 문체의 산물임을 알 수 있었는데, 이 역시 아무리 요시모토 바나나가 이른바 90년대의 새로운 대중문화와 신세대를 반영하는 아이콘이었다고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쉼표로서 계속 이어가다 보면 도중에 문장의 주체가 바뀌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옮긴이의 설명은 어떻게 생각해도 개성이나 미덕으로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도마뱀한 편으로 예단할 순 없는 일이지만, 다 읽고 나니 왜 오래 전에 요시모토 바나나와 더 깊은 인연을 맺지 못했는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두어 편 정도는 더 읽어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겠지만 소장 중인 나머지 작품들이 도마뱀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면 아마도 요시모토 바나나 순서대로 읽기라는 오래 전부터 세워 온 잠재적인 계획은 시작조차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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