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옥희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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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빠져들기 전인 2000년대 초반의 독서목록 가운데 외국작품 대부분은 에쿠니 가오리로 채워졌습니다. 쉽고 간결한 문장 속에 일그러진 관계와 지독한 감정들을 풀어놓은 그녀의 작품은 제 취향과 너무나도 잘 맞아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에쿠니 가오리만큼 관심을 가졌지만 정작 몇 작품만 읽고 말았던 작가가 바로 요시모토 바나나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때라 짧은 메모만 남겨놓았는데, 찾아보니 읽은 작품은 티티새하얀 강 밤배가 전부였고, ‘도마뱀’, ‘암리타’, ‘키친은 아직까지도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추정이지만 아마 티티새하얀 강 밤배이후 별 매력을 못 느꼈던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영심과 호기심이 합쳐져 나머지 작품들을 구매했던 것 같습니다.

 

도마뱀엔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각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든 마음의 상처를 지닌 인물들입니다. 예전 메모에는 주인공 캐릭터와 주요 설정만 한두 줄 정도로 기록해놓아서 어떤 톤의 이야기인지는 고사하고 요시모토 바나나가 어떤 스타일의 작가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는데, ‘도마뱀을 다 읽은 뒤의 솔직한 느낌은 순한 온다 리쿠착한 에쿠니 가오리를 섞어놓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순한 온다 리쿠의 느낌은 대부분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초능력 또는 오컬트적 상황들로 인해 비현실적인 인상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고, ‘착한 에쿠니 가오리의 느낌은 금이 간 거울처럼 회복 불가능 또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는 남녀의 관계가 대부분 희망적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신혼부부지만 너무나도 다른 삶의 방식 때문에 아내에게 질려버린 남자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기이한 노숙자와 대화를 나눕니다. (신혼부부) 어릴 적 끔찍한 범죄를 목격한 뒤로 치유와 저주의 능력을 갖게 된 여자는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한 채 오직 한 남자에게만 입을 열지만 막상 그가 결혼을 청하자 두려움에 휩싸입니다.(도마뱀) 불륜남의 가정을 깨뜨리고 그와 결혼에 성공한 여자는 채워지지 않는 기다림과 한 가정을 파괴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망상에 빠지기도 하고 남편의 새 불륜을 의심하기도 합니다.(김치꿈) 부모의 손에 이끌려 종교공동체에서 12년을 보낸 여자는 18살에 그곳을 탈출하여 자신만의 삶을 꾸리지만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피와 물) 집단난교에 탐닉했다가 평범한 삶으로 돌아온 여자는 결혼을 앞두고 불안정한 상황에 처합니다. 오래 전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물론 집단난교 시절의 비밀이 폭로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오카와바타 기담)

 

요시모토 바나나는 시간과 치유, 숙명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즉 큰 상처를 가졌거나 그 상처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인물들을 그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희망이라는, 막연하긴 해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품은 채 엔딩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냥, 갑자기희망을 발견하고 미래를 낙관하기 시작하는 주인공들의 태도는 통 개운치 않았습니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문득 정신 차려 보니 갑자기 머리가 맑아져있었다.”, 등 상처와 절망에 휩싸였던 인물들의 극적인 태도 변화는 앞뒤 맥락 없이 그냥 툭 튀어나옵니다. 그리곤 내일 아침에는 어제까지의 일이 전부 말끔히 제거되어 있을 게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뭔가 반짝반짝 빛나는 걸 느꼈다.”라며 밝은 미래를 기대하는 엔딩으로 이어집니다. 살다 보면 이런 깨달음과 낙관이 갑작스레 들이닥칠 때도 있긴 하지만, 읽는 내내 삶이 이렇게 단순한가?”라는 위화감과 불편함이 들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덧붙여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앞서 언급한대로 많은 수록작 속에 초능력 혹은 판타지 설정이 느닷없이 끼어든다는 점인데, 요시모토 바나나에 대해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니 그녀만의 독특한 개성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론 신선함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더 앞섰지만 말입니다. , 기존 문법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듯한 혼란스러운 화법은 처음엔 번역의 문제라고 여겨졌지만 옮긴이의 말을 보니 요시모토 바나나 특유의 자유분방한 문체의 산물임을 알 수 있었는데, 이 역시 아무리 요시모토 바나나가 이른바 90년대의 새로운 대중문화와 신세대를 반영하는 아이콘이었다고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쉼표로서 계속 이어가다 보면 도중에 문장의 주체가 바뀌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옮긴이의 설명은 어떻게 생각해도 개성이나 미덕으로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도마뱀한 편으로 예단할 순 없는 일이지만, 다 읽고 나니 왜 오래 전에 요시모토 바나나와 더 깊은 인연을 맺지 못했는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두어 편 정도는 더 읽어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겠지만 소장 중인 나머지 작품들이 도마뱀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면 아마도 요시모토 바나나 순서대로 읽기라는 오래 전부터 세워 온 잠재적인 계획은 시작조차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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