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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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봄방학을 코앞에 두고 S중학교 1학년 B반 담임 모리구치 유코는 학생들에게 교직 사퇴를 알립니다. 학생들은 얼마 전 유코의 4살 딸 마나미가 학교 수영장에 빠져 숨진 사고 때문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이어진 유코의 말에 모두 파랗게 질려버립니다. 경찰 발표와 달리 마나미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게 분명하며, 복수의 살인범이 바로 1학년 B반 학생 중에 있다고 유코가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동요하는 가운데 유코는 범인들이 생명의 소중함과 죄의 무게를 깨닫고 그 죄를 지고 살아가길 원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범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복수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곤 교실을 나갑니다. 이후 마나미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이 차례대로 자신의 고백을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고백을 읽은 건 한국에 처음 출간된 2009년 혹은 2010년의 일입니다. 아직 장르물 독서이력이 몇 년 되지 않았던 때지만 앞으로 이런 작품을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미나토 가나에라는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될 정도로 길고 깊은 여운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탓에 언젠가는 다시 한 번 고백을 읽고 그 감흥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다짐해왔는데, 거의 15년 만에 그 다짐을 실천하게 됐습니다.

 

두 명의 살인범이 13살 중학생이며 그들에게 살해당한 건 4살에 불과한 유아이자 담임교사의 딸이라는 점만으로도 그 어떤 범죄미스터리보다 흉악하고 잔혹한 설정이지만, ‘고백은 전형적인 미스터리 서사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범인의 정체를 공개한 것은 물론 사건 관련자들이 한 챕터씩 화자를 맡아 자신들만의 고백을 들려주는 독특한 구도를 취한 점 때문에 화제가 됐던 작품입니다. 특히 범인들을 향한 유코의 복수가 첫 챕터에서 완료된 탓에 독자는 과연 이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데, 미나토 가나에는 사건 관련자들의 고백을 통해 이 끔찍한 비극이 어떤 뿌리에서 시작돼서 어떤 줄기를 거쳐 자라났는지, 그리고 끝내 어떤 기폭제로 인해 살인이라는 지독하고 끔찍한 과실을 맺었는지를 차갑고 집요한 문장들로 그려냅니다.

 

희생자의 유족인 유코를 시작으로 두 명의 범인, 범인의 가족, 방관자이자 암묵적 공범이라 할 수 있는 동급생 등 여러 사람의 고백이 이어지는데, 그 고백들이 새삼 사건의 새로운 진상을 드러내거나 뜻밖의 반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종 독자로 하여금 불안감을 갖게 만드는 이유는 전혀 연관 없던 인물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일으키고 만 나비효과가 어떻게 마나미의 죽음을 초래했는가를, 또 마나미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고 폭발시키는지를 그 고백들을 통해 섬뜩할 정도로 세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코드가 복수임에도 불구하고, ‘고백은 복수 과정보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기까지의 각자의 사정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비슷한 소재를 동원한 작품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뜻입니다.

 

작가는 일말의 용서도 동정도 강요하지 않는다. 또한 상처와 파멸에 대한 회복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생채기가 생겨나고, 그들의 삶이 점차 그리고 영구히 바뀌어가는 과정을 잔혹하리만치 집요하게 그릴 따름이다.” (출판사 소개글 )

 

고백하면 항상 같이 연상되는 작품이 있는데, 40대 여교사가 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기 반 학생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극을 펼치는 그리고 숙청의 문을’(구로타케 요)이 그것입니다. 통쾌함과 비장감 등 전신을 흥분에 빠지게 만드는 통렬한 복수극이란 점에선 그리고 숙청의 문을이 압도적이지만, ‘고백은 아주 천천히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가하다가 끝내 스스로 지옥도에 떨어지게 만드는 집요한 복수를 그리고 있어서 흥분지수는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뒤에 남는 여운의 농도만큼은 바닥 모를 시커먼 늪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15년 만에 다시 읽은 고백은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달리 살짝 무덤덤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첫 챕터에서 유코가 범인들에게 가한 복수라든가 마지막 페이지의 엄청난 반전은 여전히 인상적이었지만, 아마도 제 머릿속에 워낙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작품이라 다시 읽었을 때 그 강렬함이 기대에 못 미치자 아쉬움이 불쑥 솟아오른 듯합니다. 15년 전엔 별 5개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겼지만 이번엔 가까스로 별 5개에 그치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출간된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가운데 여전히 최고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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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없는 집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 1
알렉스 안도릴 지음, 유혜인 옮김 / 필름(Feelm)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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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율리아 스타르크는 50대 남자 페르 귄터 모트(일명 PG)로부터 기이한 의뢰를 받습니다. 간밤에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에 취했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신의 휴대폰에 자루를 뒤집어쓴 채 살해당한 한 남자의 사진이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자를 살해하고 사진을 찍은 건지, 이미 살해된 남자를 자기도 모르게 찍은 건지 확신하지 못하는 PG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사진의 경위를 알아내기 위해 탐정인 율리아를 찾아온 것입니다. 자루를 뒤집어쓴 탓에 사진 속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전남편이자 경찰인 시드니와 함께 PG가 사는 숲속의 저택을 찾은 율리아는 유서 깊은 목재 재벌로 한때 큰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지금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모트 집안에 감도는 불온한 기운을 감지합니다.


 

오랜만에 접한 스웨덴 범죄 스릴러로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알렉스 안도릴은 라르스 케플레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부부 작가로 한국에는 최면전문의스토커등이 소개됐는데, 실은 두 작품 모두 모두 읽다가 중도 포기했던 터라 이 작품 역시 살짝 고민하다가 도전하게 됐습니다.

 

주인공 율리아 스타르크는 무척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지방법원 서기 출신으로 탐정이 된 33세의 여성인데, 어릴 적 겪은 끔찍한 사고 때문에 몸과 마음에 큰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얼굴에는 큰 흉터가 있고, 걸을 때는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타인과의 아주 사소한 접촉에도 공황장애에 빠지곤 해서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 모든 건 어릴 적 사고의 악몽이 남긴, 그리고 평생을 안고 가야할 율리아의 숙명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그 사고의 후유증이 율리아에게 탐정으로서 특별한 능력을 부여했다는 점입니다.

 

율리아의 시간이 서서히 멈추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치 사고를 당할 때처럼 1000분의 1초 단위로 모든 순간이 기억에 새겨졌다. PTSD의 한 증상에 불과했지만 율리아는 그 덕에 사람들의 표정과 말에 숨은 뜻을 포착하고 디테일을 볼 수 있었다.” (p194)

 

즉 수사 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하고 율리아는 그 순간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습니다. 물증과 단서도 중요하지만 율리아는 사람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몸짓에서 진위를 더욱 확실하게 가려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율리아가 오직 이 재능만으로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추리와 탐문 등 명탐정으로서의 능력도 겸비하고 있는데, 그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건 전남편이자 유일하게 율리아가 공황장애 없이 신체적 접촉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현직 경찰 시드니입니다.

 

의뢰인 PG가 죽은 남자의 사진을 찍은 날은 목재회사의 지분을 가진 모트 집안사람들이 저택에 모여 주주총회를 연 날입니다. 말하자면 PG가 범인이 아니라면 그의 휴대폰을 손에 넣어 죽은 남자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건 그날 저택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란 뜻입니다. PG를 포함한 네 명의 육촌, PG의 아내, 저택의 가정부 등 여섯 명을 상대로 율리아는 집요한 심문과 함께 자신만의 방식으로 면밀한 관찰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중 사진 속 죽은 남자의 신원이 밝혀지자 율리아는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모트 집안의 어두운 과거와 현재가 복잡하게 뒤얽힌 계획된 살인임을 확신합니다.

 

저택에 모인 인물 중에 범인이 있으며, 탐정은 그들과 함께 지내며 진범을 밝혀낸다는 다소 고전적인 구도를 지녔지만, 율리아의 캐릭터가 워낙 특이한데다 누구 하나 정상적으로보이지 않는 모트 집안사람들의 비밀과 거짓말 때문에 고전미 이상의 새로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작가는 집안사람 모두가 사진 속 죽은 자와 오랫동안 일그러지고 비틀린 관계를 이어왔다는 설정을 통해 율리아가 특별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놓았습니다. 즉 물증이나 단서보다 용의자의 표정과 말투를 통해 진실과 거짓말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으로 설정했다는 뜻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이어질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공교롭게도 주인공 율리아의 탐정으로서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독특한 탐정인 건 맞지만, 역동성과는 거리가 먼 그녀의 특별한 재능이 오히려 미스터리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든 게 사실입니다. 발로 뛰며 추리와 탐문과 단서 찾기를 거듭하는 탐정 본연의 자세라기보다는 마치 심리탐정이란 타이틀이 더 어울려 보였는데 이 때문에 탐정 주인공에게 기대되는 미덕들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가 독자의 호응을 얻으려면 그녀만의 특별한 재능에 못잖게 탐정이라면 갖춰야 할 당연한 매력이 좀더 풍성하게 그려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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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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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로 아사코는 엠브리오 기담’, ‘나의 사이클롭스이즈미 로안 시리즈’(에도시대 여행안내서 작가 이즈미 로안과 그의 짐꾼인 미미히코가 유명한 온천과 신사를 여행하며 겪은 기담 혹은 괴담)로 잘 알려진 작가인데, 실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이름은 ‘GOTH’, ‘ZOO’, ‘암흑동화를 집필한 오츠이치가 호러 및 괴담 작품에 사용하는 필명입니다. (참고로 나카타 에이이치는 오츠이치의 청춘 및 연애소설에 사용되는 필명입니다)

 

호러 및 괴담이라곤 해도 야마시로 아사코의 작품들은 공포와 기괴함의 색깔이 조금은 특별합니다. 무섭고 기이한 이야기 속에 아련함, 애절함, 슬픔, 따뜻함 등 의외의 감정들이 농밀하게 녹아있어서 서정적인 호러로 불리기도 합니다. 특히 이즈미 로안 시리즈는 에도시대의 풍광과 정서까지 가미돼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고 아끼는 작품들인데,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은 야마시로 아사코 특유의 서정적인 호러 향기가 잘 배어있으면서도 현대를 무대로 삼고 있어서 이즈미 로안 시리즈와는 살짝 결이 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중년신사 차림으로 나타났다가 점점 투명해지는 유령, 머리가 잘린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닭, 만취할 때마다 시간이동을 하는 여자, 눕기만 하면 이세계로 연결시켜주는 이불,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죽은 아들의 목소리, 자신에게만 들리는 소녀의 구조요청 목소리에 혼란을 겪는 여자 등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독특한 인물과 설정이 등장하고, 이내 누군가가 목숨을 잃으면서 본격적인 기담과 괴담이 전개됩니다.

 

개인적으론 황순원의 소나기에 가정폭력, 학교폭력, 호러 서사를 버무린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야마시로 아사코의 서정적인 호러가 가장 빛났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잘리고도 멀쩡히 살아있는 닭을 키우는 연약한 12살 소녀와 그녀에게서 말할 수 없는 안쓰러움을 느끼는 동갑 소년의 애틋한 이야기는 체질적으로 호러가 안 맞는 독자라도 푹 빠질 수밖에 없을 만큼 매력적입니다.

또한 유령이 인간에게 들러붙는 여러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과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잘 결합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학생 시절 학폭 가해자였던 소녀들이 성인이 된 뒤 피해자를 꼭 닮은 딸을 낳는다는 설정의 아이의 얼굴’, 동일본 대지진으로 사망한 어린 아들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리자 만취한 채 교신을 주고받는 아버지의 사연을 그린 무전기등도 공포와 여운을 함께 만끽할 수 있는 수작들입니다.

 

검색해보니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야마시로 아사코의 단독 작품은 2023년에 출간된 小説家境界뿐인데, 제목만 봐선 이즈미 로안 시리즈같지 않아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현대물이라도 좋으니 야마시로 아사코 특유의 서정적인 호러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야마시로 아사코의 작품 세계를 잘 요약한 번역가 김은모의 코멘트를 끝으로 서평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야마시로 아사코는 공포를 중시하는 호러와 괴담을 쓰면서도 결코 이야기를 공포로 가득 채우려 들지 않는다. 공포의 여백을 메우는 것은 애틋하고 아련한 감성이다. 그 감성은 옅지만 한없이 깊고 멀리 퍼져나간다.”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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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없는 검사의 사투 표정 없는 검사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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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시간대의 기시와다 역 앞에서 끔찍한 묻지마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30대 남자 사사키요가 차로 세 명을 치어죽인 뒤 칼로 네 명을 살해한 것입니다. 대학 졸업 후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었던 잃어버린 세대라 주장하며 사회에 복수하려 했다는 그에게선 후회나 뉘우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사키요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오는 가운데 사건을 담당한 오사카지검에서 우편물을 이용한 폭탄테러가 벌어지고, 곧이어 로스트 르상티망이란 자가 사사키요를 석방하라!”는 범행성명을 내는 일이 벌어집니다. 오사카지검 에이스 후와 슌타로가 두 사건을 모두 맡지만, 폭탄테러는 사방에서 빈발하고 잃어버린 세대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점점 더 커져만 갑니다.


 

표정 없는 검사후와 슌타로의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전작의 서평에 썼던 두 주인공에 대한 소개를 인용하면... 후와 슌타로는 이른바 能面’, 즉 일본 전통극 ’()에 쓰이는 가면을 쓴 듯 그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는 기계와도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오사카지검의 에이스라 불리면서도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말투 때문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인물입니다. 그와 반대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좀 전에 뭘 했는지 등 그야말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무관 소료 미하루가 후와의 곁을 지킵니다.

 

시리즈 1편에서 후와는 오사카부경(府警)의 치명적인 비리를 밝혀냄으로써 경찰은 물론 검찰 내부에서도 지탄을 받은 바 있습니다. 2편에서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오사카지검 특수부의 비리를 조사하는 역할을 맡아 역시 내부의 적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반면 표정 없는 검사의 사투에서는 검사라기보다는 현장을 뛰며 탐문과 단서 찾기에 전력을 다하는 형사 주인공에 가까운 활약을 펼칩니다. 물론 오사카부경과의 악연과 긴장은 계속 이어지지만 전작들에 비해선 배경정도로만 설정돼있습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연쇄 폭발물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형사에 가까운 검사후와의 사투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 전작들과는 살짝 결이 다른 미스터리를 선보입니다.

 

일곱 명을 살해한 묻지마 살인범과 전대미문의 연쇄폭탄범의 만행은 개인의 문제냐?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냐?”라는 뜻밖의 공방전을 초래합니다. ‘잃어버린 세대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복수 살인극이 일부에게 공감을 일으킨 결과입니다. 또한 테러와는 거리가 멀었던 일본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감정 없는 사법기계후와는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사건에 골몰할 뿐입니다. 그에게 있어 근거 없는 추측과 추상적인 공방전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사키요의 기소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연쇄폭탄범에 대한 수사가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않자 상부의 압박과 언론의 비난이 거세지고, 2년 전 후와에게 호되게 당했던 오사카부경 역시 전방위적으로 그를 몰아세우지만 그런 것들은 그에겐 티끌만큼의 영향도 못 미칩니다.

사무관 미하루는 2년 가까이 후와의 그림자처럼 일한 덕분에 누구보다 그를 잘 안다고 여겼지만, 이번엔 그의 표정 없는 얼굴과 오로지 앞만 보고 수사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강경해서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 와중에 후와가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고 오사카부경이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면서 사태는 급변합니다. 미하루는 말할 것도 없고 오사카지검 전체가 동요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흡인력 높은 필력과 속도감 있는 전개도 좋았고, 사건들 역시 사이즈와 파괴력 모두 커서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전작들에 비해 미스터리의 맛은 다소 싱겁게 느껴졌습니다. 얼개 자체가 단선적이기도 했고, ‘형사에 가까운 검사로서 열심히 분투하긴 했지만 후와가 딱히 일궈낸 성과도 눈에 띄지 않았으며, 비약에 가까운 추리가 등장하여 진범을 밝혀내는 반전 대목은 조금은 억지스럽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와 슌타로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창조한 가가 형사나 나쓰카와 소스케가 창조한 의사 구리하라 이치토처럼 이런 사람이 한 명쯤 실제로 존재한다면 좋겠다.”라는 열망을 품게 만드는 주인공으로서의 매력과 품격이 대단한 인물임에 분명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여러 시리즈 가운데 출간된 작품 수가 가장 적긴 하지만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시리즈로 여기는 이유는 오로지 표정 없는 사법기계후와 슌타로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아직 일본에서도 출간소식이 없는 걸 보면 한국에선 빨라야 2026년에나 신작이 나올 것 같은데, 하루라도 빨리 후와 슌타로와 소료 미하루의 네 번째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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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의 갈림길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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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던 자들의 무죄 변론을 잇달아 성공시킨 미키 할러는 전국의 재소자들로부터 빗발치듯 의뢰를 받습니다. 그 가운데 수임할 의뢰를 1차적으로 검토하는 건 그의 이복형인 해리 보슈입니다. 경찰 퇴직 후 골수암에 걸렸던 보슈는 지금은 할러의 비공식 조사관으로 일하는 중인데, 의뢰 편지를 보낸 재소자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한 뒤 무죄 가능성이 있는 케이스를 할러에게 추천하는 것입니다. 보슈는 보안관 부관인 전남편 로베르토를 사살한 혐의로 수감 중인 루신더의 의뢰에 주목하고, 할러 역시 무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합니다. 문제는 피살자가 보안관 부관이라는 점. 예상대로 숱한 난관이 닥쳐오는 가운데, 할러와 보슈는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하곤 소송을 제기합니다.


 

서평에 앞서 해리 보슈 시리즈의 팬들을 위해 이 작품의 이력을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한국에 출간된 해리 보슈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버닝 룸인데 미국에선 2014년에 출간됐습니다. ‘회생의 갈림길미키 할러 시리즈’ 7편으로 보슈가 거의 공동주연으로 등장하는데 미국에서 2023년에 출간됐습니다. 말하자면 보슈의 한국 팬들은 무려 9년이란 시간을 건너뛰게 된 셈입니다. 물론 미키 할러 시리즈’ 6편인 변론의 법칙’(2020)에도 보슈가 잠깐 얼굴을 내비치긴 했으니 ‘9년의 공백은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9년 사이에 미국에서 해리 보슈 시리즈7편이나 출간됐으니, 보슈의 팬이라면 그 작품들이 먼저 한국에 출간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동안 보슈는 경찰에서 은퇴한 뒤 골수암에 걸렸고, 르네 발라드라는 새 주인공과 여러 번 협업을 거쳤으며, 17살이던 보슈의 딸 매디는 어느새 LA경찰이 돼있습니다. 이 많은 이야기들을 읽지 못한 채 이젠 확연히 노년기에 접어든 보슈를 접하려니 마음이 많이 심란했고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 시장에서 할러의 판매량이 더 높아서 벌어진 일인 듯하지만, 부디 다음 번 마이클 코넬리의 한국 출간작은 해리 보슈 시리즈’ 18편인 ‘The Crossing’이기를 기대해봅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연대기가 궁금한 분은 https://blog.naver.com/memories226/222086403503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회생의 갈림길은 한때 지독한 속물이자 악마의 변호사로 불렸던 미키 할러가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 중인 재소자들의 무죄 입증을 위해 분투하는 정의의 변호사로 변신한 모습을 그립니다. 원제인 ‘Resurrection Walk’는 본문에서 여러 차례 부활의 발걸음으로 번역됐는데, 이는 할러의 변론 덕분에 새 삶을 얻은 자들이 교도소를 벗어나는 모습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는 속물적인 변호사가 아니라 억울한 자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역할을 자처한 할러 본인의 환골탈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의 변신에 큰 힘을 보태주는 인물이 바로 이복형 해리 보슈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이야기 구조는 간결합니다. 전남편을 사살한 혐의로 5년간 복역해온 루신더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할러와 보슈는 물론 미키 할러 어벤저스들이 갖은 위협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인신보호 구제청구소송(한국의 재심청구와 비슷합니다)을 통해 끝내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안 그래도 성공사례가 드문, 변호사로서는 거의 모험에 가까운 도전인데, 사건 피해자가 법집행자(보안관 부관)라는 점과 5년 전 루신더가 스스로 혐의를 인정하고 형량을 거래한 사실 때문에 할러와 보슈의 여정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할러는 법정에서 자신만의 화려한 쇼를 연출합니다. 강약을 조절해가며 상대를 도발하기도 하고, 속으론 쾌재를 부르면서도 가짜 표정으로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계획대로 재판이 진행되도록 법정에서 위험천만한 난동을 부리기도 합니다. 여느 법정미스터리에선 맛볼 수 없는 이 쾌감이야말로 미키 할러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미덕을 보좌하는 것은 보슈를 비롯한 미키 할러 어벤저스들의 법정 밖에서의 분투인데, 이번에는 보슈를 제외하곤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 인물이 별로 없어서 조금 심심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미키 할러 시리즈가 계속 인신보호 구제청구소송에 주력할지 아니면 또 다른 방향으로 선회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 됐든 할러와 보슈의 협업이 계속 이어질 거란 점만큼은 확실해 보여서 이전까지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재미를 줄 것 같습니다. 이복형제이자 변호사&퇴직경찰 콤비인 두 사람이 다음엔 어떤 사건으로 법정에 나서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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