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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평점 :
야마시로 아사코는 ‘엠브리오 기담’, ‘나의 사이클롭스’ 등 ‘이즈미 로안 시리즈’(에도시대 여행안내서 작가 이즈미 로안과 그의 짐꾼인 미미히코가 유명한 온천과 신사를 여행하며 겪은 기담 혹은 괴담)로 잘 알려진 작가인데, 실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이름은 ‘GOTH’, ‘ZOO’, ‘암흑동화’를 집필한 오츠이치가 호러 및 괴담 작품에 사용하는 필명입니다. (참고로 ‘나카타 에이이치’는 오츠이치의 청춘 및 연애소설에 사용되는 필명입니다)
호러 및 괴담이라곤 해도 야마시로 아사코의 작품들은 공포와 기괴함의 색깔이 조금은 특별합니다. 무섭고 기이한 이야기 속에 아련함, 애절함, 슬픔, 따뜻함 등 의외의 감정들이 농밀하게 녹아있어서 ‘서정적인 호러’로 불리기도 합니다. 특히 ‘이즈미 로안 시리즈’는 에도시대의 풍광과 정서까지 가미돼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고 아끼는 작품들인데,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은 야마시로 아사코 특유의 서정적인 호러 향기가 잘 배어있으면서도 현대를 무대로 삼고 있어서 ‘이즈미 로안 시리즈’와는 살짝 결이 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중년신사 차림으로 나타났다가 점점 투명해지는 유령, 머리가 잘린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닭, 만취할 때마다 시간이동을 하는 여자, 눕기만 하면 이세계로 연결시켜주는 이불,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죽은 아들의 목소리, 자신에게만 들리는 소녀의 구조요청 목소리에 혼란을 겪는 여자 등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독특한 인물과 설정이 등장하고, 이내 누군가가 목숨을 잃으면서 본격적인 기담과 괴담이 전개됩니다.
개인적으론 황순원의 ‘소나기’에 가정폭력, 학교폭력, 호러 서사를 버무린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야마시로 아사코의 ‘서정적인 호러’가 가장 빛났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잘리고도 멀쩡히 살아있는 닭을 키우는 연약한 12살 소녀와 그녀에게서 말할 수 없는 안쓰러움을 느끼는 동갑 소년의 애틋한 이야기는 체질적으로 호러가 안 맞는 독자라도 푹 빠질 수밖에 없을 만큼 매력적입니다.
또한 유령이 인간에게 들러붙는 여러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과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잘 결합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학생 시절 학폭 가해자였던 소녀들이 성인이 된 뒤 피해자를 꼭 닮은 딸을 낳는다는 설정의 ‘아이의 얼굴’, 동일본 대지진으로 사망한 어린 아들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리자 만취한 채 교신을 주고받는 아버지의 사연을 그린 ‘무전기’ 등도 공포와 여운을 함께 만끽할 수 있는 수작들입니다.
검색해보니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야마시로 아사코의 단독 작품은 2023년에 출간된 ‘小説家と夜の境界’뿐인데, 제목만 봐선 ‘이즈미 로안 시리즈’ 같지 않아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현대물이라도 좋으니 야마시로 아사코 특유의 ‘서정적인 호러’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야마시로 아사코의 작품 세계를 잘 요약한 번역가 김은모의 코멘트를 끝으로 서평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야마시로 아사코는 공포를 중시하는 호러와 괴담을 쓰면서도 결코 이야기를 공포로 가득 채우려 들지 않는다. 공포의 여백을 메우는 것은 애틋하고 아련한 감성이다. 그 감성은 옅지만 한없이 깊고 멀리 퍼져나간다.”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의 ‘옮긴이의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