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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무덤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15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교도소를 탈출한 세 명의 중범죄자가 어린 농아들과 교사 등 10명을 인질로 붙잡고 폐쇄된 도살장에 숨어듭니다. FBI와 경찰이 도살장을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베테랑 협상가 아더 포터가 납치범의 리더인 루 핸디와 피를 말리는 협상에 돌입합니다. 인질들 대부분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10살 안팎의 소녀들이라 수많은 협상을 지휘해온 포터조차 긴장감이 극에 달합니다. 더구나 납치범들 모두 잔혹한 범죄를 일삼았던 자들이라 얼마나 많은 인질들이 목숨을 잃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편 농아이자 교사인 멜라니는 겁에 질린 소녀들을 달래보지만, 스스로도 거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런 와중에 한 소녀가 무참하게 살해당하자 멜라니는 목숨을 걸고 소녀들을 탈출시키기로 결심합니다.
‘소녀의 무덤’은 인질극 소재 스릴러의 ‘교과서’라 불러도 좋을 만큼 모든 요소를 갖춘 작품입니다. 협상가, 인질범, 인질 등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들은 다소 전형적이긴 해도 픽션 속 허구가 아니라 눈앞에서 직접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고, 12시간이 넘는 인질극의 와중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 역시 마치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듯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중간에 끊어 읽는 것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수많은 인질극을 겪었던 베테랑 협상가 아더 포터와 냉정하고 잔인무도한 인질범 루 핸디가 벌이는 고도의 심리전을 읽을 때면 마치 지뢰밭을 걷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서로의 속내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두세 수 이상을 내다보며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도 신중을 기해야 하는 두 사람의 압박감이 고스란히 독자의 뇌리에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물리적인 제압보다는 항복을 유도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는 포터가 냉정하고 잔혹한 핸디의 심리와 감정을 장악하기 위해 벌이는 협상술이 눈길을 끌었는데, 사건일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 덕분에 독자는 사건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포터와 핸디의 대결을 더욱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것은 인질극에 연루된 또 다른 주조연들입니다. FBI 소속인 포터가 지휘권을 갖고 협상에 나서는 걸 못 마땅히 여기는 주 경찰과 주 검찰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협상을 방해합니다. 또한 특종에 눈이 먼 기자들과 공적에 혈안이 된 인질구조대의 무모한 행동은 인질들을 극도의 위기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이들과의 갈등과 충돌 때문에 포터는 여러 차례 위험한 순간을 맞이하는데, 독자 입장에선 인질범뿐 아니라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하는 포터를 지켜보며 더욱 강렬한 쫄깃함을 맛보게 됩니다.
인질극의 또 다른 주인공인 10명의 인질은 ‘소녀의 무덤’을 다른 인질극 스릴러들과 차별시키는 가장 큰 요소인데, 수화 외에는 소통 방법이 없는 농아들, 그것도 대부분 10살 안팎의 소녀들이란 점 때문에 긴장감은 더욱 팽팽해집니다. 그중에서도 스스로 농아이면서 인솔교사인 멜라니는 겁에 질린 어린 소녀들을 달래면서도 누구보다 거대한 공포에 휩싸인 인물입니다. 또한 만 하루도 안 되는 인질극 동안 멜라니는 극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혼자라도 이 위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이기심을 품었던 그녀가 목숨을 걸고 소녀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인질범과 맞서기로 결심하는 데 이르는 과정은 ‘영웅적인 주인공의 탄생’이라는 도식적인 감동 이상의 처연함과 처절함을 품고 있습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를 비롯하여 제프리 디버의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도살장의 인질극은 결코 평범하게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위험천만한 고비를 넘기고 사태가 종료될 즈음에도 적잖은 분량이 남아있는데, 그 남은 분량 속엔 예기치 못한 반전과 함께 제프리 디버 스타일의 충격적인 엔딩이 그려집니다. 앞서 여러 곳에서 위화감을 발산했던 복선들이 깔끔하게 회수되면서 포터가 이끌어온 인질극 협상이 대단원을 맞이하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역시 제프리 디버!”라는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평점에서 별 1개를 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인 ‘디테일’ 때문입니다. 사건일지에 버금가는 상세한 묘사는 생방송을 보는 듯한 생생함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루함을 선사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초중반에 인물과 상황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다소 느슨한 전개가 목격되곤 하는데 이 지점만 잘 넘기면 ‘소녀의 무덤’의 진짜 매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세 번째 주인공인 멜라니의 캐릭터(농아로서 겪은 고통스런 성장기와 비극적인 가족사 등) 묘사 역시 독자에 따라 분량과 깊이 모두 과도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만 하루 동안 그녀가 겪게 되는 극적인 변화를 감안하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제프리 디버의 작품을 꽤 많이 읽었지만, 비교적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소녀의 무덤’은 한참이나 게으름을 부린 뒤에야 읽게 됐습니다. 언젠가 ‘링컨 라임 시리즈’를 다시 한 번 순서대로 정주행할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소녀의 무덤’을 읽고 나니 그 생각을 조만간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조급함이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시리즈 12편인 ‘스틸 키스’가 한국에 소개된 게 2020년이니 4년 넘게 신간소식이 없는 셈이지만, 그 아쉬움을 정주행 재독을 통해 달래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