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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박사의 네 아들 ㅣ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브리지트 오베르 지음, 양영란 옮김 / 엘릭시르 / 2024년 8월
평점 :
마치 박사의 집에서 일하는 30대 가정부 지니는 우연히 한 연쇄살인마의 범행고백이 적힌 비밀일기를 발견합니다. 어려서부터 여자만 골라 죽여 온 살인마는 범행과정은 물론 자신이 느낀 쾌감까지 자세하게 기록해놓았습니다. 자신이 마치 박사의 네 아들 중 한 명이라고 살인마 스스로 밝히긴 했지만 문제는 네 아들이 모두 18살의 쌍둥이라는 점. 살인마는 비밀일기가 들킬 경우를 대비하여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감춘 문장으로만 일기를 적어놓았습니다. 지니는 큰 충격을 받지만 경찰을 피해 다녀야만 하는 처지 때문에 신고할 엄두를 못 냅니다. 그러던 중 살인은 계속 벌어지고, 지니의 초조함은 극에 달합니다. 한편 살인마는 누군가 비밀일기를 훔쳐 읽는 사실을 눈치 채곤 일기 속에 노골적인 살해 경고를 남깁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프랑스 작가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브리지트 오베르는 1995년 ‘철의 장미’(고려원)라는 작품으로 한국 독자와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여 “프랑스 범죄소설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라는 평가까지 받았지만 그동안 한국 독자와는 인연이 잘 닿지 않았던 셈입니다.
‘마치 박사의 네 아들’은 쌍둥이 트릭이라는, 고전적이고 상투적이면서도 결코 다루기 쉽지 않은 까다로운 설정을 품고 있습니다. 또한 내용도 연쇄살인마와 가정부 지니의 일기 또는 편지로 이뤄져 있어서 형식 또한 무척 독특한 작품입니다.
살인마가 과거의 범행과 쾌감을 비밀일기에 기록하는 동시에 무차별 살인을 이어가고, 그 기록을 발견한 지니가 신고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초조함에 휩싸이는 이야기가 초반부에 펼쳐지고, 이어 누군가 비밀일기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살인마가 지니를 의심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살인마는 비밀일기 속에 지니를 향한 공개적인 경고와 협박을 담기 시작하고, 그걸 읽은 지니는 극도의 공포와 함께 과연 네 쌍둥이 중 누가 살인마인지를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 대목부터 ‘누가 범인?’이라는 미스터리 코드보다는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심리 스릴러가 더 강렬하게 펼쳐집니다.
독자는 살인마의 비밀일기 속 정보는 물론 가정부 지니가 알아낸 정보들을 기반으로 네 쌍둥이 중 누가 범인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비밀일기를 훔쳐 읽는 걸 눈치 챈 뒤로 살인마가 기록하는 정보는 전적으로 믿을 수 없게 되고(고의적으로 지니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거짓정보를 남기기도 합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데다 알코올 의존증이 심각한 지니의 일기 역시 100% 신뢰할 수 없는 정보들이라 독자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네 쌍둥이와 관련하여 위화감을 느끼게 만드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어떤 장면에선 ‘혹시 호러 판타지로 장르가 바뀌었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위화감이 심해서 독자로선 더욱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뜻밖의 반전과 함께 진범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막을 내리는데, ‘해설’에서 지적한대로 ‘마치 박사의 네 아들’은 ‘수수께끼를 푸는 본격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아쉬움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일기와 편지라는 형식 때문에 살인마 후보인 네 쌍둥이는 긴장감을 유발하지 못한 채 ‘병풍’ 이상의 비중을 차지할 수 없었고, 독자 입장에선 이들 중 누가 범인일까, 라는 궁금증조차 품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살인마와 지니가 일기와 편지를 통해 심리 스릴러를 펼치는 대목 역시 비슷한 상황들이 연이어 반복되면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게 만들었는데, 그래선지 꽤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프랑스 문학’ 하면 난해하고 어려운 서사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마치 박사의 네 아들’은 간결하고 선명한 문장들로 이뤄져있어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트릭과 형식 모두 독특하고 미스터리와 심리 스릴러의 맛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하신 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