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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섬광 - 김은주 미스터리 소설
김은주 지음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8년 7월
평점 :
메디컬 미스터리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다
(거의 처음 읽는 것 같은) 한국작가의 메디컬 미스터리라 무척 기대가 됐던 작품입니다.
일단 오프닝은 흥미롭습니다.
15살 소녀 수인이 5년 만에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날, 동갑내기 소년 고윤이 투신자살합니다.
고윤은 수인과 거의 동시에 코마상태에 빠졌다가 1년 만에 깨어났고,
그 뒤로 아직 코마상태인 수인을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독백처럼 들려주던 소년입니다.
수인은 코마상태에서도 고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고윤의 죽음이 병원이나 경찰의 결론처럼 일반적인 자살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수인과 고윤의 담당간호사였던 희정 역시 고윤이 절망감에 자살한 것이 아니며,
그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도 손에 넣지만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못합니다.
다른 경찰들과 달리 고윤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형사 무원은 이리저리 조사를 진행하지만
어디에서도 자신의 의문을 해결해줄 단서를 찾아내지 못해 답답할 따름입니다.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두운 터널을 함께 달린 형사, 간호사, 소녀.”라는 본문 속 표현처럼
이 작품은 무원, 희정, 수인이 고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았던 대형병원의 추악한 이면,
모두의 무관심 속에 무기력하게 절망해야 했던 의료사고 희생자 유족들의 슬픔,
그리고, 진실을 알면서도 오락가락하는 사건 관련자들의 불안감 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됩니다.
사실, 이야기는 무척 단선적입니다.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소녀’라는 특별한 설정 외에는
신약 개발, 대형병원의 횡포, 인명조차 도구로 여기는 탐욕, 무기력하게 이용당한 희생자 등
전형적인 메디컬 미스터리의 요소들이 공식처럼 배치돼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역시 큰 무리 없이 무난하게 흘러갑니다.
분량도 300여 페이지에 불과해서 금세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는데,
문제는, 다 읽고 나면 어딘가 허전하기도 하고,
특히 긴장감 같은 건 거의 느끼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남는다는 점입니다.
그 아쉬움을 일일이 다 언급하면 서평이 지나치게 길어질 것 같아서,
읽는 동안 메모했던 단문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 단서들이 다 노출됐는데 정작 주인공들은 아무 행동도 안 한다. 고민만 하고 있다.
각자 갖고 있는 단서나 의구심을 상대에게 보여주기만 해도 모든 게 해결될 텐데...
- 주인공 형사의 가족사나 트라우마가 이 작품에 꼭 필요한 설정이었나?
정작 형사는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별 역할을 한 게 없다.
- 사건과는 무관하게 자기 연민에만 빠진 조연들. 왜 등장한 걸까?
그들의 어두운 개인사를 일일이 다 언급할 필요가 있었을까?
- 악당은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무기력하게 주인공에게 당하고 만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악당.
- 제목을 너무 추상적으로 지었다.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
메디컬 미스터리라고 해도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되고 긴장감이 팽배해야 하지만,
이 작품의 전반적인 기조는 ‘조용함’ 그 자체입니다.
수인은 고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힐 결정적 증거가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희정 역시 결정적 증거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저 고민만 할뿐 아무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무원은 형사로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탐문만 할뿐 정작 실속은 별로 없습니다.
세 인물이 한 번만 진지한 대화를 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패를 드러내기만 했어도
수사는 급물살을 탈 수 있었고 이야기는 좀더 확장성을 지닐 수 있었을 텐데,
작가는 엉뚱하게 주인공과 조연들의 개인사나 심리상태 묘사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그러니 긴장감 없는 책읽기과 다 읽은 뒤의 허전함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재 자체나 필력만 보면 ‘콘텐츠진흥원 지원사업 선정작’으로 뽑히기에 충분한 퀄리티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2차 콘텐츠가 제작되려면 훨씬 더 역동적인 서사가 가미돼야 할 것입니다.
‘조용함’ 자체가 미덕인 메디컬 미스터리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작품 속 인물이나 사건은 애초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게 설정됐기 때문입니다.
문장이나 필력만 보면 후속작을 충분히 기대할만한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후속작도 장르물이라면 좀더 역동적인 서사를 고민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번역물의 오타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작가의 작품에서 오타가 발견되면 참 난감합니다.
작가의 오타인지, 편집자의 실수인지 모르겠지만 씁쓸함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죠.
처음엔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다가, 너무 많다 싶어서 따로 정리해봤습니다.
물론 전부는 아니고 제 눈에 띈 것만 정리한 것입니다.
p31, 밑 6줄. “희정의 성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희정은)
p34, 밑 4줄. “수인을 손을 뻗어...” (수인은)
p47, 밑 7줄. “형사라면 누구나 불량식품으로 시민의 건강을 보호해야..” (불량식품으로부터)
p70, 밑 10줄. “레지던트들이 자신의 말을 경철하고 있다는..” (경청하고)
p84, 위 1줄. “자신과 같이 처지에 있던 친구의...” (같은)
p114, 밑 8줄. “아이들 이야기를 드리려면 5년 전 일부터 말씀을 드려야...” (들려드리려면)
p116, 밑 1줄. “무원의 말이 희정은 누가 가방 속으로 손이라도 불쑥 넣은 양 당황...” (말에)
p144, 밑 6줄. “매일 작은 책상 앉아서 일하고 있는 그녀가...” (책상에)
p151, 위 1줄. “무원의 희정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형사의 입장에서 이해했다.” (무원은)
p153, 밑 9줄. “1인실은 그런 것들은 아주 천천히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보기에...” (것들을)
p184, 위 8줄. “친구가 털어놓은 비밀은 들은 것은 물론...” (비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