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가, 나의 악마
조예 스테이지 지음, 이수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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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적인 엄마 수제트,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인 알렉스 그리고 사랑스러운 일곱 살 딸 해나.

완벽해 보이지만 이들 가족은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심각한 균열을 안고 살아간다.

해나는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일곱 살이 되도록 도무지 말을 내뱉지 않는다.

폭력적인 행동으로 해나가 연이어 퇴학을 당한 후론 수제트가 홈스쿨링을 담당하지만

해나의 행동이 점점 위험하고 잔인해지자 수제트는 심신의 쇠약함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해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예전에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하던 부모도 아이가 그 또래가 되면 밉다소리가 절로 나오기 마련이었는데,

그 말은 세상이 변하고 아이들이 세상에 빨리 익숙해지면서 언제부턴가 이렇게 진화했습니다.

미운 세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

 

이 작품 속 일곱 살 해나는 그저 평범한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이 아닙니다.

끔찍한 소리지만 세상을 충격에 빠뜨릴 게 확실한 장래가 촉망되는 소시오패스라고 할까요?

모함과 속임수 등 소소한 폭력으로 시작된 엄마 수제트를 향한 해나의 공격은

수제트를 사라지게 하거나 죽이겠다는 확고한 목표의식과 함께 치명적인 수위를 넘어섭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해나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마치 말 자체를 거부하듯 말이죠.

수제트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자 역시 ?”라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는데,

(수제트에 대한 증오가 싹텄던) 해나의 세 살 무렵의 기억이 아주 잠깐 묘사되긴 하지만

그것을 해나의 행동을 설명하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원인으로 받아들일 독자는 없습니다.

작가 역시 ?”라는 궁금증에 대해 뚜렷한 인과관계로 답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위험하고도 불가지한 그 무엇이 발산하는 공포를 더욱 강렬하게 쌓아갈 뿐입니다.

 

한편, 해나의 소시오패스 행각의 대의중 하나는 엄마에게 사로잡힌 아빠 구하기입니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읽고 공감해주는 아빠 알렉스만이 해나에겐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의 언행을 일일이 일러바치는 수제트를 좀처럼 믿지 않는 알렉스의 태도 덕분에

해나는 승리감에 도취하는 것은 물론 훨씬 더 위험한 다음 계획에 몰두할 수 있게 됩니다.

 

구도만 보면 아가이자 악마인 해나와 엄마 수제트 간의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로 보이지만

실은 이 작품은 소설 형식을 띤 논픽션 기록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물론 수제트와 해나 모녀의 우열 관계가 역전되거나 아빠 알렉스의 태도가 점차 변하는 등

뚜렷한 굴곡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기승전결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훨씬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에 매료됐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글을 쓰게 됐다는 작가의 이력을 생각해 보면

훨씬 더 큰 파열음과 얼얼한 충격을 지닌 비극으로 치닫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작가는 그보다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아를 둔 가족의 비극자체에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 작가는 수제트를 통해 여성모성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합니다.

자신을 철저히 통제하면서도 정작 필요할 땐 방치했던 무책임한 엄마를 증오했던 수제트는

그런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나 한때 전도유망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딸에게 공포심을 느끼는 이상한 엄마이자 무력한 전업주부가 돼있을 뿐입니다.

수제트는 엄마를 증오했던 것 이상의 혐오와 공포를 딸 해나에게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해나의 이상증세가 마치 (자신의 엄마처럼) 모자란 모성 탓인 양 자책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여성에게 모성이란 당연한 건지, 해나가 없어지길 바라는 자신이 이상한 건 아닌지,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모성

어린 소시오패스 해나가 낳은 비극 못잖게 이 작품의 중요한 화두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지옥 같은 데뷔작!”이라든가 영화계를 매료시킨 서스펜스 스릴러의 절정

이 작품에 쏟아진 엄청난 찬사들이 개인적으론 조금 과하게 보이기도 했는데,

뚜렷한 기승전결을 갖춘 서스펜스 스릴러, 혹은 스티븐 킹 스타일의 서사를 기대했다가

논픽션에 가까운 이야기 전개에 다소 아쉬움을 느낀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리얼리티는 생생했고 긴장감 역시 픽션과는 질적으로 달랐던 게 사실입니다.

수시로 내가 수제트라면?”, “내가 알렉스라면?”이라며 스스로를 대입시켜보곤 했던 것도

어쩌면 이 작품만이 가지는 리얼리티의 산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본인이 영화 프로듀서인만큼 이 작품의 영화화 소식은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공포영화를 즐겨 보는 취향은 아니지만 이 작품만은 꼭 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딸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수제트의 공포와 장래가 촉망되는 소시오패스해나의 폭주는

어쩌면 영상을 통해 더 강렬하고 진하게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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