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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 글리코
아오사키 유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짧은 치마에 헐렁한 가디건, 실실 웃으면서 촐랑대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인 고교 1년생 이모리야 마토는 학교 축제 최고의 명당을 놓고 벌이는 ‘가위바위보로 계단 오르기’ 게임에서 난공불락의 학생회 대표를 제압합니다. 이후 마토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러 게임에 휘말리는데, 매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발상과 대담한 전략으로 상대를 무너뜨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토의 활약이 학생회장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지난 20년 동안 학생회가 풀지 못한 엄청난 미션에 ‘게임의 귀재’ 마토를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2024년 12월, 아오사키 유고의 ‘지뢰 글리코’가 일본의 주요 미스터리 랭킹과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듣곤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그 많은 랭킹과 상을 독차지했을까,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아오사키 유고는 한국에 처음 소개된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첫 두 편(‘체육관의 살인’, ‘수족관의 살인’)을 읽은 이후 취향이 잘 안 맞는 작가라 여기곤 10년 동안 외면해 온 터라 개인적으론 그가 거둔 대단한 성과에 더욱 관심이 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다섯 편의 연작 단편이 수록됐고, 각 수록작마다 주인공 이모리야 마토가 두뇌 배틀과 심리전을 통해 게임 상대를 무너뜨리는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게임은 한국과 일본 독자 모두에게 익숙한 것들로 ‘가위바위보’, ‘카드 뒤집어 짝 맞추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포커’ 등입니다. 언뜻 보면 “이런 단순한 게임들로 어떻게 미스터리를 설계했다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아오사키 유고는 각 게임마다 변형 규칙을 삽입하여 뜻밖의 재미와 쾌감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허에 허를 찌르는 반전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사건 하나 없이도 독자의 뒤통수를 연신 내리치는 흥미로운 미스터리가 전개됩니다.
‘지뢰 글리코’의 백미는 역시 주인공 이모리야 마토의 캐릭터입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생존하는 전략을 체득해 온 마토는 게임에 관한 한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났습니다. 단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 상대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물론 독심술과 미스디렉션에 능수능란한데다 상대로 하여금 “무조건 내가 이긴다!”라는 오판을 갖게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 막판에 상대를 완전히 패배시키곤 합니다.
짧은 치마에 헐렁한 가디건, 실실 웃으면서 촐랑대기만 하는 마토에게 방심했던 상대들은 단순하고 익숙한 게임에 추가된 변형 규칙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를 연이어 던지는 마토의 전략과 전술에 굴복하는데, 덕분에 속임수와 논리와 심리전이 절묘하게 뒤섞인 각 게임의 결말은 일반적인 미스터리의 그것과는 차원과 결이 전혀 다른 특별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첫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지뢰 글리코’를 읽을 때만 해도 “신기하긴 해도 골 때리는 캐릭터의 주인공이 펼치는 기술적인 두뇌 배틀 미스터리가 전부인가?” 싶었지만, 뒤로 갈수록 마토의 과거와 현재가 조금씩 공개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볼륨감을 키워가는 것은 물론 청춘소설로서의 미덕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화자이자 마토의 유일한 친구인 고다, 마토를 극강의 두뇌 배틀에 끌어들인 학생회장 사부리, 마토의 첫 희생양이자 학생회 대표인 구누기, 그리고 마토와 고다의 중학교 동창인 미스터리한 인물 우키타 에소라 등 마토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여 게임만큼이나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펼쳐 보입니다.
별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게임에서 마토와 상대가 거의 신에 가까운 지나친 괴력(?)을 발휘한 나머지 현실감이 살짝 떨어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 점만 빼면 ‘지뢰 글리코’는 띠지 카피대로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신감각 두뇌 배틀 소설”의 독특한 재미와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장담하건대 그 어느 독자도 마토의 기막힌 속임수와 치밀한 논리와 완벽한 심리전을 이겨낼 수 없을 텐데, 나름 그쪽으로 자신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마토에게 도전해 볼 것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