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소파 - 세상에 말을 건네다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지음, 민병일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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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떠들썩했던 분위기의 사진수업시간. 갑자기 선생님께서 화통하게 웃으셨다. 아이들은 일제히 선생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선생님은 들고 있던 사진 한 장을 우리들을 향해 내보여 주셨다. 그건 그 선생님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의 작품이었는데, 우리들은 그 작품을 보자마자 박장대소하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사진에는 엄청난 용기와 불굴의 의지와, 그리고 성인이 된 청춘이라면 환호할만한 '섹시(sexy)'가 한 자리에 있었으므로.

 

설명을 더 해보자면 이렇다. 사진은 시청 앞 잔디밭에 덩치 커다란 3인용 소파를 옮겨다 놓고, 섹시하게 차린 요염한 자세의 여인을 찍은 것이었다. 감히 시청이라는 정부기관 앞뜰에 소파를 가져다 놓은 용기도 용기지만, 그것을 그곳까지 실어 나른 불굴의 의지, 그리고 정치인에게 X먹으라는 의도로 비춰질 수 있는 과감한 이미지가 모두의 쾌재를 불러낸 것이었다. 그 사진을 찍은 학생은 소파를 옮겨가며 세상의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은 어떤 사진작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은 비록 소파를 들고 여러 곳을 다니지는 못하지만 정부를 향해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과 그 사람들의 다양성을 담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 그 학생이 언급한 사진작가가 바로 호르스트 바커바르트이다. 물론 9자나 되는 긴 이름을 내가 기억할 리 없지만 <붉은 소파>라는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땐 매우 뚜렷하게, 그 때 그 학생이 말했던 작가임을 알 수 있었다.

 

추억 반, 호기심 반으로 펼쳐 본 이 책은 정말 독특했다. 그동안 봐왔던 인물사진('초상'이라 불리는)은 크게 두 부류였는데, 하나는 인물의 얼굴을 위주로 그 사람의 내면세계와 숨겨진 모습, 혹은 그 인물이 가진 고유성을 잘 포착해 찍은 사진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을 말해줄 수 있는 다른 것들을 곁들여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관심사, 업적 등에 대해 묘사하는 사진들이다. 대체적으로 이런 사진들은 그 사람이 주로 거하는 장소를 택하기 마련이고(장소마저 그 사람을 설명해 주므로) 야외풍경이 될 경우 십중팔구 그저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또한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인물사진의 경우에서도 아방가르드나 개념예술 등을 표방하면서 그로테스크하거나 암울하거나 난해한 것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붉은 소파>의 인물사진들은 확연히 달랐다. 한 사람의 특성과 삶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적인 장소가 아닌 공적 장소로 나선 것이 대부분이고, 때로는 대자연이 그 사람을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파격적이고 실험적이긴 하지만 어둡고 난해한 느낌은 없고 따스하고 정겨우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한다. 책 설명에 따르면 호르스트 바커바르트는 인물 사진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작가라는데, 가히 그 명칭에 동의할만하다.

 

그런데 왜 하필 붉은 소파일까? 사진마다 늘 등장하는 소파에 대해 한번쯤은 답을 내려고 애써보지 않을 수 없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귀한 손님에 대한 예우이다. 누굴 만나든 붉은 소파로 초대되는 순간 아주 특별하고 귀한 사람으로 대우받는 것이다. 그리고 붉은 색은 다양하고 난잡한 색깔들 틈에서도 눈에 잘 띄며 특히 자연의 푸른빛과도 매우 잘 어울린다. 어쩌면 인터뷰의 대상이 모두 서구인이라 그들의 피부색깔에도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붉은 색에는 뜨거운 피나 태양과 같은 생명력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자리라면 이 색깔이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닐까?

 

사진 속에서 인터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하다. 제인 구달, 고르바쵸프 같은 유명인도 있는가 하면 예술인, 기자, 과학자, 군인도 있고, 서점 주인이나 항구 노동자, 농부, 미용사, 심지어는 연금생활자와 죽은 자(누군가의 묘지), 그리고 그저 쌍둥이 자매, 대학생, 초등학생도 있다. 이런 구성을 보면 사진 인터뷰를 통해 유명한 사람들의 명언과 같은 답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소박한 바램 내지는 항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뷰의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며 예술가나 철학자나 과학자나 그리고 노동자나 농부나 아이들이나 답변들은 하나같이 사려 깊고 순수하며 삶에 대한 성찰과 애정을 담고 있다.

 

<붉은 소파>는 사적인 공간에 있어야 할 물건을 외부로 내놓음으로써 세상을 더욱 아늑한 어떤 곳으로 변모시킨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 친구처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이 소파로 인해 생성되는 것이다. 또한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붉은 소파 하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친절한 평등의 마음씨 같다. 아무런 조건도 내세우지 않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같은 자리에 초대해 똑같은 발언권을 주었으니 모두 다 소중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펼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을 살리는데 있어서 만큼은 소파 역시 무궁무진하게 변모한다. 기본적으로 놓여지는 각도가 변화하는 것도 그렇고, 때론 소파의 붉은 천만 사용하기도 하고, 때론 소파의 방석부분만 사용되거나 멀찌감치 밀어놓기도 한다. 그러므로 같은 소파가 다른 사람을 만남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상에 말을 건네는 이 소파는 여기에 누구라도 앉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사진가가 건네 올 질문들에 답변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도 한다. 만일 호르스트 바커바르트가 "여기 앉으실래요?"라고 물어올 때 흔쾌히 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잘 알고 나의 얘기를 세상에 들려줄 만큼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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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박물관 - 상상의 힘으로 서양미술사를 재구성하다
필리페 다베리오 지음, 윤병언 옮김 / 휴먼아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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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맘에 드는 이미지를 발견하면 나는 캡쳐를 해서 어느 폴더 속에 저장해 둔다. 이미지의 종류는 다양해서 기발한 광고, 사진, 회화, 디자인 작품들, 건축물, 일러스트레이션 등 장르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모은 이미지들은 내 블로그에 올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일도 없이 그저 간직해 두었다가 가끔 시간을 내어 천천히 감상해 본다. 그런 시간을 몇 번 갖고난 다음 필요없어진 이미지들은 그냥 삭제한다. 무슨 악취미인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내 머릿속을 비우고, 채우고, 업그레이드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내가 모은 이미지들을 어떤 주제로 분류한다든지, 그 안에서 연관성을 찾아 분류해 볼 생각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적어도 <상상박물관>을 읽기 전까지는.

 

<상상박물관>의 저자 필리페 다베리오는 상당한 경력을 가진 예술평론가이다. 그런 그가 자신만의 지적 유희를 위한 상상박물관을 만들었다니 관람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관람을 하다보면(책을 읽다 보면) 생각이 180도 바뀐다. 나만의 상상박물관을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도, 그리 고고한 지적수준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베리오가 어린이와 같은 천진함으로 맘에 드는 작품들을 제멋대로 전시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작품을 보는 심미안과 지적인 사려깊음이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예술가만의 영역인 것처럼 담이 높거나 난해하지 않고 오히려 미술과 큐레이팅에 전무한 많은 사람들에게 나만의 박물관을 만들어 보는 기쁨을 체험케 한다. 이런 다베리오라면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 명화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비록 인터넷에서 수집한 이미지라 할지라도 상상박물관의 소장품이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상상박물관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박물관이지만 그저 머릿속으로 그림을 상상만하는 실체없는 허공은 아니다. 건축가의 이력을 가진 사람답게 다베리오는 먼저 손수 박물관을 설계한다. 이렇게 실제로 박물관을 설계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미술작품을 모아 전시를 하건 감상을 하건 공간적인 요소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의 박물관을 구체화하는데도 도움이 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관람하는 느낌도 한껏 즐길 수 있다(실제로 박물관을 지어 그곳에 작품을 소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베리오는 박물관 설계에서부터 치밀했다. 그저 공간 구획만 한 것이 아니라 공간 사이의 이동, 공간으로 흐르는 빛, 건물의 외관까지 자신의 취향과 소장품들에 어울릴만한 건물 전체를 섬세하게 디자인한 것이다. 그리고 공간의 용도 혹은 명칭과 자신이 소장하고픈 작품들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니 그림들을 먼저 선별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건물을 구성한 것임에 틀림없다. 다베리오의 친절함 덕분에 우리는 미지의 허공으로 인도되는 대신 품위있고 고전적인 미가 물씬 풍기는 건물의 입구로 안내받는다. Welcome. 상상의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건물의 층별 설계도를 보니 안티카메라와 같이 현대에는 생소한 이름도 눈에 뜨이고, 생각하는 방, 점심식사 방도 흥미로웠다(그냥 식당이 아니라 유독 '점심식사'여야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그림이 걸리는 곳으로 소개된 방은 아니지만 연인의 방, 요리사의 방도 이색적이었고 문서보관실, 악기보관실, 주차장에 다용도실까지 완비한 것을 보니 정말 실제로 존재하는 예술애호가의 갤러리겸 대저택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박물관의 중앙홀에 해당하는 안티카메라부터 생각하는 방, 도서관, 그랑 살롱 등을 거쳐 12개의 방을 관람하는 동안 느낀것은 여러 사람들과 그림을 나누고자하는 소유자의 애틋하고 친절한 마음씨였다. 어느 방 하나 의아함을 자아내는 그림이 걸려있는 법이 없고, 쉽게 이해하고 그 방의 그림으로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로 가득하다. 예를들어 안티카메라에는 손님들이 서로 어울리며 그 방의 그림을 통해 다양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고, 부엌에는 음식과 식사에 관한 그림들이, 도서관에는 책과 학문에 관한 그림들이, 놀이방에는 진귀한 풍경들과 물건들이 담긴 그림들이 걸려있다. 초상화가 잔뜩 걸려있어 그 이유가 궁금했던 그랑 갤러리에서는 소유자 다베리오의 뜻깊은 의도가 설명되어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랑 갤러리가 따르는 관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여러 종류의 이미지들을 분류하고 배치하는 기준은 두 가지 입니다. 첫 번째 기준은 이해하기 쉽고 직접적입니다. 그건 회화가 전달하는 이미지의 강렬한 힘입니다. 조금 복잡한 또 하나의 기준은 유럽에 흩어져 있는 우리 선조들을 분류해서 계보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안내해 주는 것은 결국 우리의 궁금증인 셈입니다.(P.244-245)

 

<상상박물관>이 좋은 것은 하나의 방이 끝날 때마다 그 방의 어느 위치에 어떤 그림이 걸렸는지를 평면도와 함께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렇게 그림을 전체로(혹은 한 묶음으로) 보면 개별적으로 감상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와는 다른 묘미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소유자가 그 그림들을 통해 그 방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재미있게 들린다. 도서관의 경우 단정한 이상도시의 풍경이나 시인, 책벌레 등의 그림으로 차분한 느낌을 곳곳에 숨겨두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전쟁이나 광폭한 장면, 그리스도의 처형, 지옥에 관한 그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침소리 하나 나지 않도록 고요한 도서관, 고상하고 지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도서관에 이렇게 끔찍한 그림들이라니! 이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일수록 탐욕과 부정권력이 난무하는 현실을 늘 상기하고 그것을 헤쳐나갈 수 있는 올바른 지식의 힘을 키우라는 독려의 메시지인 듯하다. 한편 하나의 방에 대한 주제 자체를 독특하게 잡은 것 외에도 그림들 사이에서의 파격의 미가 돋보이는 예도 있다. 생각하는 방에서의 도살당한 토끼 그림은 가히 충격적이었는데, 여기에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에 대한 다베리오의 설명을 더 들어보면 또다시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동시에 학구적인 성격의 영국식 잔인함과 반대로 친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베네치아식 잔인함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료입니다.(p.68)

 

* 좌에서 우로) 생각의 방에 걸린 그림 - 평면도와 그림 배치 - 도서관에 걸린 그림

 

이토록 섬세하고 사려깊은 상상의 박물관을 관람하며 나만의 박물관이란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소장품들, 값비싸거나 유명세 있는 작품들을 전시하는 허영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떠올려 본다. 다베리오의 박물관에는 소장품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와 세상을 향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작품을 고른 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어 박물관이 내 소장품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나'를 보여주는 곳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상상의 박물관을 꾸미고 멋진 미술작품들을 걸어놓는 일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 전에 관람객들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먼저 고민하는 것이 박물관 주인의 자격을 얻는 첫 번째 관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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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 수업 - 친절하고 재미있는 강의실 밖 건축 이야기 썬 시리즈 1
권선영 글.그림 / 컬처그라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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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지엥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난 파리가 싫다. 파리는 내 일생에 유일하게 소매치기를 당한 곳이자 단 시간에 가장 많은 사기꾼들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때문만은 아니다. 파리는 도시로서도 정말이지 정이 붙지 않는 곳이다. 고흐와 같은 열정의 화가를 기대하고 몽마르뜨 언덕으로 올라가 보면 관광객들의 초상화로 돈을 버는 화가들만 즐비하고,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퐁피두센터, 개선문과 같은 명소들의 이름값이 너무 커 파리 자체의 고유성과 특성이 기를 펴지 못한다.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했다면 모를까 도시를 감상하기 위해 들른 사람들에겐 참 아쉬운 모습이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것은 유럽 여느 도시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파리는 자신의 참 모습을 쉽게 드러내주지 않는다.

 

하지만 <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수업>을 읽다보니 파리에서의 좋은 기억 하나가 생각났다. 나도 썬처럼 파리를 헤메며 베르나르 츄미(Bernard Tschumi)의 라 빌레뜨 공원(Parc de La Villette)을 가로질러 그 주변을 2시간 가량 걸었던 기억이다. 어쩌면 그 2시간이 명소로서의 파리에서 생활의 장(場)인 파리로 교차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던 단기 여행자의 유일한 행복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파리에 애정을 가지고 자신이 열심히 공부하는 건축물을 찾아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썬을 보아서였을까? 책을 읽다보니 나도 파리에 대해 조금 더 관용적이 된 듯하다. 그리고 어느새 썬이 소개하는 건축물과 내가 가본 곳이 겹칠때면 추억을 더듬듯 설레기까지 했다.

 

위대한 건축물을 찾아 팍팍한 다리를 이끌고 순례하는 책들은 이미 많이 보아왔다. 모두 알만한 건축가들이 쓴 건축여행기라 생각도 아름다웠고 사진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발걸음과 함께 손걸음이 더해진 책이라 더욱 인상깊다. 발걸음이 열정이 향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의지라면 손걸음(스케치)은 열정을 내 것으로 담아내는 또하나의 의지다. 이렇게 눈으로 본 건축물을 순간의 셔터에 맞기지 않고 공들여 그려나감으로서 보는 이들도 건축물을 천천히 음미하고 마음으로 소화하도록 이끌어준다.


<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수업> 오늘의 건축세계에 모태가 되는 근대건축물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초행자의 설렘과 호기심이 한껏 뭍어나서 좋다. 분명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건축에 대해 조금은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터이고 아직은 생소한 점이 많아 썬의 입장에 많은 공감을 하며 페이지를 넘겨갈 것이다. 그녀의 손걸음이 구석구석 가 닿은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보며 마치 자신도 스케치를 하듯 더 유심히 건물들을 바라볼 것이다. 사실 이 책은 건축순례에 자그마한 이야기를 붙여 재미를 더해주고 있는데, 근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는 설정도 그렇고, 그의 조언으로 건축물을 탐색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것에서도 다양한 건축물을 아우르는 과정에 어울리게 잘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책을 읽다보면 건축을 이루는 여러가지 요소뿐만 아니라 짧게나마 아르누보로부터 지금까지의 건축사를 둘러볼 기회도 얻게 된다.

 

 

 

르 코르뷔지에의 가르침과 자기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건축의 공간과 빛, 재료 등을 살펴가는 썬의 스케치는 건축물의 특징과 주요 요점을 매우 잘 포착하고 있다. 그녀의 스케치만 봐도 건물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손색이 없을 정도다. 어떤 면에서는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위주로 반영했기에 실물 사진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한다.


정성이 담뿍 담긴 스케치와 함께 파리의 건축물들을 살펴보는 즐거움은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지만 몇 가지 불만스러운 점도 있다. 바로 중간중간 삽입된 파리의 명소 이야기이다.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진 이름들이 설명을 덧붙여 등장하는 순간 건축여행기로서 가진 이 책의 장점이 퇴색되는 듯하다. 여행 가이드북에서도 볼 수 있는 상세설명과 같은 이야기는 굳이 담지 않아도 이 책의 텍스트는 충분했다. 또한 건축의 색채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 점도 의아하다. 건축에서의 색채는 빛과 함께 황홀감을 주고 보다 친숙하게 다다갈 수 있는 요소는 될 수 있어도 건축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에는 꼽힌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빛에 관해 좀 더 의미있는 건축물들을 선택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건축과 소통하는 법을 친절히 설명해주는 아름다운 책이었고, 파리에도 정붙일만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 고마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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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에 활을 겨누다
김호석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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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본의 아니게 초원에 몰두했다. 여기서 '본의 아니게'가 된 까닭은 평소 내 관심사 밖에 있던 그것이 외부의 자극으로 덜컥 침입해왔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자극은 사진가 김홍희의 <몽골방랑>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내 마음 속에 '몽골=푸른 초원'이라는 공식을 무참히 깨부수고 현대문명이 움터가는 그곳의 현실과 여행자로서의 고독으로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을 갑자기 황무지라고 부를 순 없었다. 몽골은 여전히 (나를 포함한) 뭍사람들이 꿈꾸는 드넓은 초원이었고, 인간으로서는 감히 어쩔 수 없는 이상향이기도 하니까.

 

다음으로는 정수일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발견했다. 실크로드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이자 이니만큼 상당한 기대를 품고 사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형수의 <조드>를 읽게 되었다. 수분 없는 눈보라와 열 두 가지의 바람소리, 문명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예를 갖춘 사람들, 그리고 시(詩)와 다를 바 없는 글쓴이의 아름다운 언어들이 무척이나 인상 깊은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고 리뷰를 올리니 누군가가 찾아왔다. 초원(몽골)의 언어를 닉네임으로 하는 어느 블로거의 방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고 몽골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진 그녀 덕분에 우린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함께 읽었다. 읽어보니 역시, 깊고 넓음이 가히 최고 권위자라 할만했다. 

 

<문명에 활을 겨누다>는 그녀의 서재에서 발견한 책이다. 몸통을 찢어 벌린 염소 사진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그 사진의 출처가 바로 이 책이라는 사실에 주저 없이 내 책꽂이로 모셔두었다. 이 책은 그간 내가 읽어왔던 몽골지역을 눈이 아니라 영혼으로 보게 했다. 어쩌면 그간 읽었던 3권의 책들 덕분에 더욱 더 깊게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머리부터 다른 책들을 길게 소개한 까닭도 이 책에 앞서, 혹은 이 책 이후에 병행하여 읽었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글이 많지 않은 화집이나 사진집을 볼 때면 나는 그저 두서없이 아무데나 펼쳐보곤 한다. 그렇게 내 멋대로 즐기다가 처음으로 돌아가 차곡차곡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명에 활을 겨누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그림들이 있는지 궁금해 여기저기 펼쳐보았다. 그런데 참 느낌이 묘하다. 죽은 동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비참하거나 암울하지 않다. 아이들이나 할머니나 다들 담담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 너른 풍경들은 멀리 있다기 보다 바로 곁에 있는 듯 한데 여백이 많음에도 다소 생소한 공간감이다. 도대체 이런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그때 눈에 들어온 한 단어가 있었다.


적멸(寂滅)

 

그이는 사람이 아닌 듯하다.
숫제 어질디어진 귀신인 듯하다.
그이가 그린 누구의 눈과 귀 팔다리나 허리는
저 세상에 있는 듯하다.


적멸(寂滅)이란 자연히 없어져버림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번뇌가 소멸해 평온해지는 열반의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세상에, 바로 이 단어다. 이 화집을 보고 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단어. 떠오를 듯 말 듯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내게 적멸은 한줄기 빛처럼 내 머리속을 관통했고 그제서야 난 머리가 맑아지고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쓰여진 글에 다시 가슴이 철렁한다. 그이는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라고? 대체 누가 적멸이라는 대단한 단어를 쏙 잡아 고른 것도 모자라 서문에서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문장을 발휘한단 말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니 적멸과 첫 문장 사이에 이름 하나가 눈에 띈다. 바로 고은 시인이다. 고은 시인의 그 맑고 깊은 깨달음도 이곳 몽골의 초원에서 비롯되었나보다.

 

<문명에 활을 겨누다>에는 조드(dzud)가 휩쓸고 간 자리를 다룬 것이 태반이다. 조드란 몽골지역의 기후현상으로 극심한 가뭄과 혹한이 지속되는 현상이다. 한 번 조드가 들이닥치면 이곳은 완전한 폐허가 된다. 어쩌다 한 번 겪는 이상기후가 아니라 해마다 겪는 일이니 여기 사람들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산다고 할 수 있다. 조드가 지나가고 나면 마치 잔혹한 무사가 지나간 자리처럼 가축들의 시체가 나뒹군다. 그런데 가축들의 마지막 표정이나 그들이 썩어가는 모습에서 공포나 고통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평온하고 때론 초연하고 심지어 산 것보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무런 번뇌없이 운명을 탓하지 않고 그저 자연 속에 사라지는 것이기에 그런 것일까? 솔직히 말해 이것들을 일반적으로 '동물의 사체'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때로 날아드는 나비, 곁에 피어난 꽃들이 슬픔이 아닌 따스함을 더하는 까닭도 이것들이 그저 동물의 사체가 아님을 알려주는 것 같다.   

 

 

 

이곳의 사람들 역시 죽은 가축들과 같은 표정을 지니고 있다. 그저 담담하고 초연한 표정에서는 아무런 탐욕도, 불안도, 그렇다고 깨알같은 기쁨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노인이나 어린이나 매 한가지다. 그러나 유독 날카로운 불안을 보여주는 표정도 있는데, <늑대가 오는 밤>에 그려진 한 노파는 표정이 그렇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입가에 굳은 결의가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노파와 늑대의 모습을 오버랩한 것 같은, 매우 독특한 분위기의 그림이다. 몽골 사람들의 얼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지난번 읽었던 김홍희의 <몽골방랑>에서 한 컷을 가져다 옆에 대본다. 김호석의 수묵화 속의 소녀와 김홍희의 사진 속의 소녀, 어딘가 참 많이 닮아있다. 그들은 정말로 그런 모습, 그런 표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시차를 둔 두 작가의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몽골의 풍경들을 세세히 묘사한 그림은 없다. 그저 독특한 공간감으로 표출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광활함이 느껴지고 한없이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한국화의 특징이 '여백의 미'라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김호석이 가진 여백의 미는 참 독특하다. 한국화에 대해 잘 모르므로 이것을 여백의 미라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그가 여백을 가지고 휘두르는 언어는 참 다양한 것같다. 때로는 밀도있고, 때로는 아찔하고, 때로는 광폭한 것이 어떤 감정들을 자극한다(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겠지만). 어쩌면 이것은 이 책을 보기 전에 읽었던 다른 3권을 통해 몽골이 어떤 곳인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줄곳 내가 읽어왔던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풍경이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검은 먹이 흰 종이를 적신다. 물기를 가득 머금고 먹물이 번져간다. 시간이 흐르고 그림이 다 마르고 나면 번지던 먹물은 그 자리에 멈추고 거기서 자신의 소임을 마감한다. 더이상 번져갈 욕심도, 너무 많이 왔다고 되돌아갈 변명도 없다. 마치 그림 속의 주인공들처럼 담담하게, 물기가 가시면 거기서 멈춘다. 몽골이라는 곳이 수묵화와 잘 어울리는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물기가 다 할 때까지 번지다가 마르면 거기서부터 그림으로 완성되는 먹물처럼 초원의 생명들도 삶이 다 할때까지 살아가다가 하늘이 부르면 적멸로 완성되어 새로운 삶을 얻는다. 그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통로다. 자연에 순응하며 그저 삶으로 열반을 이루는 곳. 그곳이 바로 적멸의 고향, 몽골의 초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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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4-01-0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나..안그래도 여권 만들어야 되는데.
분홍신님 저기요~ (속닥속닥)

탄하 2014-01-04 15:48   좋아요 0 | URL
여권사진 이쁘게 찍으세요.^^

2014-01-03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4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9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0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여름, 열대야를 견뎌보고자 TV를 틀었다가 매우 섬뜩한 장면을 발견했다. 그건 스마트폰 광고였는데, 평온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세상의 아름답고 행복한 장면들을 좇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물론 그들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있었고, 그 매끄러운 사각 프레임 속에는 경이로운 자연으로부터 이국적인 여행지, 생활 속의 크고 작은 기쁨의 순간들까지 행복이란 행복이 야무지게 한 가득 챙겨졌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일까? 만일 이 광고를 10년 전쯤 보았다면 전자기기와 인간적인 삶의 조화를 잘 표현했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20년 전쯤이었다면(비록 스마트폰은 없었겠지만) 침묵 속의 진한 감동이니 휴머니즘이니 하며 극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에 본 이 광고는 말 그대로 '섬뜩'이었다. 거기엔 스마트폰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전자기기에 매몰돼 자아를 상실한 몽유병 환자의 모습만이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한참 동안 동영상을 보다가 내리면서 문득 뒤돌아볼 때 남아있는 사람들의 태반이 스마트폰에 몰두해 있는 상황을 목격한다. 내가 빠져있을 때는 몰랐는데 거기서 깨어나 보니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도 저렇게 넋을 놓고 자그마한 사각 프레임에 푹 빠져 있었을까? 광고는 그와 같은 각성효과가 있었다.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느새 일부가 되어버린 내 모습을 일깨워주는 효과. 여기서 스마트폰 운운하며 우리의 매몰된 모습을 언급한 것은 스마트폰 애용가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바우만식으로 표현하면 '불평등을 감수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사각 프레임 앞에 방치된 우리들에게 더 없이 좋은 각성제가 되어줄 거라 덧붙이겠다.

 

스마트폰과 불평등. 언뜻 보기엔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바우만을 통해 이 책의 메시지를 읽는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불평등 사회에서 피라미드의 상위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일궈놓은 것이 소비사회라고 말한다. 소비를 통해 어떤 '사물'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실망을 회피하고 자기 맘대로 처분하고 다룰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경쟁을 통해 얻지 못한 지위나 부에 대한 좌절을 소비로써 무마시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물들을 통해 경쟁에서 얻는 것에 대한 만족을 대체한다. 즉 사람들 사이에서 부딪히고 경쟁하여 얻을수 없는 것들을 소비로 대리만족 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소비사회에서 상당히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사물이므로 이에 몰입된다는 것은 구입이건(사물의 소유) 사용이건(사물과의 관계) 불평등을 감수하는 우리 모습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렇게 피라미드의 두터운 하층을 차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비에 집중하는 동안 소비를 부추키고 그를 통해 이윤을 얻는 상층 사람들은 더욱 더 큰 부를 얻는다. 너무도 쉽게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능력있고 수완좋은 사람들이 경쟁에서 이기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게 되면 모든(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결과에 승복한다.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고 최상의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한 개인의 능력과 재능은 그 사람이 노력하여 얻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남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같은 노력을 해도 훨씬 우월한 결과를 창출하며 때로는 남들이 10배의 노력을 해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선천적인 능력이 탁월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세상은 애초부터 불공평하게 시작되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피라미드 속의 위치가 있는 듯하다. 마치 아주 오래전 주어진 신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그러나 바우만은 신분사회가 무너지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더이상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작금의 경제적 계급사회의 문제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날이 온다고 믿는다. 필요한 것은 그것이 정당하지 않음에 눈뜨는 우리들의 각성과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용기, 그것이다.


오래전 신분사회가 곪아터져 모순과 폐단을 드러냈을 때 피라미드 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를 향해 봉기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징후는 월가 점령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재능을 두루 갖추고 경쟁에서 정당하게 더 많은 것을 얻은 사람들에 대해 유독, 무척이나 관용적이고 심지어 선망해 마지않는 미국 사람들이 피라미드 꼭대기의 1%를 향해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는 것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심각할 정도로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여기서 경쟁의 정당함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이 책에서 밝히는 상위 1%, 혹은 10%의 가진자들과 하위층의 가지지 못한 자들의 상황을 비교한 수치를 보면 거의 경악을 할 정도이며 그것이 비록 정당한 경로를 통해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 무언가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 중에서 최상위 1퍼센트의 부자들의 부의 종합은 최하위 5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부의 총합보다 거의 2000배나 된다.(p.18)

  

미국진보센터에 따르면, 앞서 말한 약 30년 동안 하위 50퍼센트의 미국인들의 평균 소득은 6퍼센트 증가한 반면 상위 1퍼센트의 소득은 229퍼센트 증가했다.(p.23)

 

우리 가운데 가장 어리숙한 사람들조차도 영국의 최고경영자들의 평균 보수가 지난 30년 동안 약 4000퍼센트 이상 늘어난 것이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들'의 수와 능력이 그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p.94)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현대 경제의 모순과 불평등에 대해 고발하고 그것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친다. 위에서 언급한 소비사회의 진실 뿐만아니라 더 많이 가진 자들에 의한 경제를 옹호하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이 책의 표현에 따르면 '낙수효과')의 헛점, '경제성장'의 배신, 부의 배분방식에 침묵하는 GNP(국민총생산) 통계수치 등 새롭게 눈뜨고 각성해야 할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여년 전, 데이비드 헨리 소로우가 월든의 호숫가에 손수 집을 짓고 스스로 경작하며 새로운 경제생활을 도모했을 때 그것은 담대한 도전이었고,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그는 이미 1800년대 당시에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깨달았고, 노동의 가치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간파했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실한 관계가 결여되고 있음을 인지했다. 오늘날 바우만이 바라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소로우처럼 자발적 가난이나 자력경제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주류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모든 모순적인 체제와 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인간의 참된 삶에 눈 뜨게 하려는 시도에서는 월든과 유사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로우의 오리지널 월든이 있고, 심리학자 스키너의 디스토피아적 월든2가 있으니 바우만이 꿈꾸는 평등과 인간가치 우위의 사회는 '월든3'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바우만이 불평등으로 가득한 현재의 경제상황에 맞서 꿈꾸는 사회는 탐욕이 사라지고 인간의 모든 아름다운 가치가 회복되는 사회이다. 구체적으로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불평등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박하향처럼 싸한 각성제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말한 곤경은 결국 친절한 협력, 상화환계, 공유, 상호 신뢰, 인정, 존중 등을 바탕으로 하는 공생에 대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갈망을 경쟁과 경합(탐욕에 이끌린 소수의 축재가 모두의 행복에 이르는 왕도라는 믿음에서 도출되는 존재양식)으로 대체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p.109)

 

탐욕에는 유익한 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탐욕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으며, 누구의 탐욕이건 유익하지 않다.(p.109)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 상호존중, 연대, 우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적인 행동이라든가 실질적인 삶의 전략을 잘 살펴보라.(중략) 여러분은 이상과 현실, 말과 행위 간의 간극이 얼마나 넓은지를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p.110)


분명 인간적인 것을 갈망하면서도,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뚜렷이 존재함에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부당하고 불평등한 사회의 관념과 그로인해 유지되는 경제체제 속에서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비록 그것을 느낀다 할지라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저 모른척해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우만의 메시지를 읽었다면 지금부터는 조금 더 각성해야하고 조금 더 달라져야 한다. 미래의 사회에 대해 너무도 걱정스런 마음으로, 혹여 파국을 맞이해야만 행동을 개시했던 수많은 전례들을 답습할까 두려워 진심에 진심으로 조언하는 노학자의 간절함과 그의 어렴풋한 희망에 작은 싹이나마 틔우려면 후대를 이어갈 우리들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룰 사회를 월든3라 부르던 그 무엇으로 부르던 간에 지금부터 해야할 일은 소비사회에서 한발짝 멀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이 사실을 스마트폰을 볼 때마다 떠올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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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12-27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우만 책에는 이상하게도 손이 가질 않고 있어요.
오랜만입니다. ^^

탄하 2013-12-27 18:10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오랜만이예요. 거의 7~8개월은 된 것 같네요.
저도 바우만은 <액체근대>만 읽으려 했는데,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 재미있을 것 같아 읽었다가 별 재미 못보고(하지만 후반부는 재밌어요) 있던 차에 이 책은 짧아서 한 번 읽어봤습니다. <고독을..>이 유려한 장문에 비틀어쓰기까지 곁들여져 읽기 어려웠다면 이 책은 더 명료하고 간결해서 수월했네요. 흐..그래도 아직 <액체근대>는 손도 못댄 상태라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