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박물관 - 상상의 힘으로 서양미술사를 재구성하다
필리페 다베리오 지음, 윤병언 옮김 / 휴먼아트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맘에 드는 이미지를 발견하면 나는 캡쳐를 해서 어느 폴더 속에 저장해 둔다. 이미지의 종류는 다양해서 기발한 광고, 사진, 회화, 디자인 작품들, 건축물, 일러스트레이션 등 장르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모은 이미지들은 내 블로그에 올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일도 없이 그저 간직해 두었다가 가끔 시간을 내어 천천히 감상해 본다. 그런 시간을 몇 번 갖고난 다음 필요없어진 이미지들은 그냥 삭제한다. 무슨 악취미인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내 머릿속을 비우고, 채우고, 업그레이드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내가 모은 이미지들을 어떤 주제로 분류한다든지, 그 안에서 연관성을 찾아 분류해 볼 생각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적어도 <상상박물관>을 읽기 전까지는.

 

<상상박물관>의 저자 필리페 다베리오는 상당한 경력을 가진 예술평론가이다. 그런 그가 자신만의 지적 유희를 위한 상상박물관을 만들었다니 관람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관람을 하다보면(책을 읽다 보면) 생각이 180도 바뀐다. 나만의 상상박물관을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도, 그리 고고한 지적수준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베리오가 어린이와 같은 천진함으로 맘에 드는 작품들을 제멋대로 전시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작품을 보는 심미안과 지적인 사려깊음이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예술가만의 영역인 것처럼 담이 높거나 난해하지 않고 오히려 미술과 큐레이팅에 전무한 많은 사람들에게 나만의 박물관을 만들어 보는 기쁨을 체험케 한다. 이런 다베리오라면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 명화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비록 인터넷에서 수집한 이미지라 할지라도 상상박물관의 소장품이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상상박물관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박물관이지만 그저 머릿속으로 그림을 상상만하는 실체없는 허공은 아니다. 건축가의 이력을 가진 사람답게 다베리오는 먼저 손수 박물관을 설계한다. 이렇게 실제로 박물관을 설계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미술작품을 모아 전시를 하건 감상을 하건 공간적인 요소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의 박물관을 구체화하는데도 도움이 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관람하는 느낌도 한껏 즐길 수 있다(실제로 박물관을 지어 그곳에 작품을 소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베리오는 박물관 설계에서부터 치밀했다. 그저 공간 구획만 한 것이 아니라 공간 사이의 이동, 공간으로 흐르는 빛, 건물의 외관까지 자신의 취향과 소장품들에 어울릴만한 건물 전체를 섬세하게 디자인한 것이다. 그리고 공간의 용도 혹은 명칭과 자신이 소장하고픈 작품들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니 그림들을 먼저 선별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건물을 구성한 것임에 틀림없다. 다베리오의 친절함 덕분에 우리는 미지의 허공으로 인도되는 대신 품위있고 고전적인 미가 물씬 풍기는 건물의 입구로 안내받는다. Welcome. 상상의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건물의 층별 설계도를 보니 안티카메라와 같이 현대에는 생소한 이름도 눈에 뜨이고, 생각하는 방, 점심식사 방도 흥미로웠다(그냥 식당이 아니라 유독 '점심식사'여야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그림이 걸리는 곳으로 소개된 방은 아니지만 연인의 방, 요리사의 방도 이색적이었고 문서보관실, 악기보관실, 주차장에 다용도실까지 완비한 것을 보니 정말 실제로 존재하는 예술애호가의 갤러리겸 대저택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박물관의 중앙홀에 해당하는 안티카메라부터 생각하는 방, 도서관, 그랑 살롱 등을 거쳐 12개의 방을 관람하는 동안 느낀것은 여러 사람들과 그림을 나누고자하는 소유자의 애틋하고 친절한 마음씨였다. 어느 방 하나 의아함을 자아내는 그림이 걸려있는 법이 없고, 쉽게 이해하고 그 방의 그림으로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로 가득하다. 예를들어 안티카메라에는 손님들이 서로 어울리며 그 방의 그림을 통해 다양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고, 부엌에는 음식과 식사에 관한 그림들이, 도서관에는 책과 학문에 관한 그림들이, 놀이방에는 진귀한 풍경들과 물건들이 담긴 그림들이 걸려있다. 초상화가 잔뜩 걸려있어 그 이유가 궁금했던 그랑 갤러리에서는 소유자 다베리오의 뜻깊은 의도가 설명되어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랑 갤러리가 따르는 관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여러 종류의 이미지들을 분류하고 배치하는 기준은 두 가지 입니다. 첫 번째 기준은 이해하기 쉽고 직접적입니다. 그건 회화가 전달하는 이미지의 강렬한 힘입니다. 조금 복잡한 또 하나의 기준은 유럽에 흩어져 있는 우리 선조들을 분류해서 계보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안내해 주는 것은 결국 우리의 궁금증인 셈입니다.(P.244-245)

 

<상상박물관>이 좋은 것은 하나의 방이 끝날 때마다 그 방의 어느 위치에 어떤 그림이 걸렸는지를 평면도와 함께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렇게 그림을 전체로(혹은 한 묶음으로) 보면 개별적으로 감상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와는 다른 묘미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소유자가 그 그림들을 통해 그 방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재미있게 들린다. 도서관의 경우 단정한 이상도시의 풍경이나 시인, 책벌레 등의 그림으로 차분한 느낌을 곳곳에 숨겨두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전쟁이나 광폭한 장면, 그리스도의 처형, 지옥에 관한 그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침소리 하나 나지 않도록 고요한 도서관, 고상하고 지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도서관에 이렇게 끔찍한 그림들이라니! 이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일수록 탐욕과 부정권력이 난무하는 현실을 늘 상기하고 그것을 헤쳐나갈 수 있는 올바른 지식의 힘을 키우라는 독려의 메시지인 듯하다. 한편 하나의 방에 대한 주제 자체를 독특하게 잡은 것 외에도 그림들 사이에서의 파격의 미가 돋보이는 예도 있다. 생각하는 방에서의 도살당한 토끼 그림은 가히 충격적이었는데, 여기에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에 대한 다베리오의 설명을 더 들어보면 또다시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동시에 학구적인 성격의 영국식 잔인함과 반대로 친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베네치아식 잔인함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료입니다.(p.68)

 

* 좌에서 우로) 생각의 방에 걸린 그림 - 평면도와 그림 배치 - 도서관에 걸린 그림

 

이토록 섬세하고 사려깊은 상상의 박물관을 관람하며 나만의 박물관이란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소장품들, 값비싸거나 유명세 있는 작품들을 전시하는 허영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떠올려 본다. 다베리오의 박물관에는 소장품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와 세상을 향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작품을 고른 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어 박물관이 내 소장품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나'를 보여주는 곳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상상의 박물관을 꾸미고 멋진 미술작품들을 걸어놓는 일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 전에 관람객들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먼저 고민하는 것이 박물관 주인의 자격을 얻는 첫 번째 관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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