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엘로이즈>, <고백록>,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같은 루소의 글을 읽다보면 당황스러워진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측면으로 내면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신 엘로이즈>경우 그 중에서 제일이다. 이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편지글로 이루어진 형태의 소설은 진작 유행하고 있었지만, 편지도 편지나름이다.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새뮤얼 리차드슨 <파멜라>를 보면, 같은 편지글이지만 사건 전개에 필요한 모든 요소(인물, 사건, 배경)가 편지 속에 다 들어가 있다. 루소의 편지는 그렇지 않다. 젊은 연인들 사이 주고받은, 이성이 마비된 연애편지같은 글이다. 둘 사이의 모든 행동과 말이 사랑의 해석이 필요한 암호고, 그로인하여 서운하고 오해하여 가라앉고, 희열에 가득차 둥둥떠다니고, 이런 감정의 교류가 계속된다. 애정으로 해석되지 않는 사건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축소되고, 별일 아니라도 애정이 관련되면 확대해석된다. 소설이라기보다 내면, 특히 감정의 고백이다. 그리고 루소도 강조하듯이, 감정의 허구라기보다 진실된 감정의 재현이라고 할만하다.
굵직굵직한 역사인 거시사, 그런 거시적 배경속에서 개별인 수준에서 일어난 사건궤적을 쫓은 역사를 미시사라고 한다면, 루소의 글은 감정의 미시사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당시 감정의 수준에서 일어난 궤적의 기록이다. 또한 기록된 감정의 역동성을 생각하면, 일리아드나 오딧세이같은 이야기 서사시가 떠올라, 감정의 서사시라고도 부를 수 있을거 같다.
이런 감정의 교류에 목마르지않고 익숙지 않은, 오늘날 독자들은 난감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익숙한 이들은 더욱더 그렇다. <에밀>과 <신 엘로이즈>에 가해진 동시대인들의 비판에, 루소가 자신의 입장을 고백한 <고백록>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입장을,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을 해야하는데, 또다시 자신이 평생 크게 느꼈던 감정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한다. <고백록>역시 감정의 서사시다. 루소가 성장하면서 겪은 일들이 다 포함되었지만, 역시 기준은 감정의 질이다. 감정으로 충만했을 때를 중심으로 일대기가 배열된다.
그렇다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이 책은 산책할 때 떠오른 몽상들을 기록한 것이다. <고백록>처럼 자신을 고백하고 변명한다기보다, 산책하다가 평소 관심을 기울였던 여러 대상들에 대한 생각과 상상, 몽상을 적어놓았다. 다른 책들에 비하여 관능에 관련된 감정이 드물게 나온다. 루소는 이 책을 다 완결짓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런 루소의 글들은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공감할 컨디션이 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런 감정의 교류가 부담스러울 때는 읽다가는 덮고를 반복하게 되는 거 같다. 책은 보고 싶고, 읽기에는 부담스럽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루소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동시대인들은 어떻게 작품을 대했을까? 루소의 시대만해도 인쇄술의 보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뒤였기 때문에 예전의 독서법인 낭독은 물론, 가만히 들여다보는 묵독도 자리 잡았다. 루소의 독자들의 독서법은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끝부분에 적혀있다.
당시 소장가들이 책을 대하는 태도, 유통되는 책의 상태, 그리고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가 루소의 책을 대하는 모습이 잘 정리되어 있다.
타인의 감정을 대하는 방식은, 속으로 음미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 감정을 표현하며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묵독보다는 낭독으로 장면장면의 감정을 연기하듯이 읽으면 루소가 전하려고 하던 '자연'의 정체성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