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베란다에 먹이를 내다 놓는다. 그러면 고양이는 답례로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준다. 이런 거래는 어떨까. 일 년에 한 번씩, 수고양이는 암고양이에게 새끼를 배게 한다. 즉 아버지가 된다. 몇 번이고 지겨울 정도로 아버지가 된다. 하지만 새끼가 몇 마리 태어나든 이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새끼가 있는 이상 아버지다. 자기 새끼를 모르는 아버지, 인간에게는 태어난 아기가 제 자식임을 인정해야 비로소 아버지가 된다는 합의가 있지만, 이것은 무척이나 좁은 소견이다. 인정받는 아이와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를 수컷이 맘대로 나눈다는 것인가. 필요할 때 아이가 적당한 수컷들 중 직접 아버지를 고르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파트 베란다로 올라오는 수고양이를 자기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한들 수고양이에게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아버지가 매일 밤, 자기 아이 중 두 마리를 엿보러 베란다로 온다.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에 두 아이는 잊지 않고 베란다에 고양이 먹이를 놓아둔다. 수고양이가 오는 것은 한밤중이라 깊은 잠에 빠진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볼 수도, 울음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하지만 베란다에 다녀간 것을 다음날 아침 알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꿈속에서 아이들은 고양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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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그레이트북스 84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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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모든 종말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진리도 그대로 유효하다. 이 시작은 끝이 줄 수 있는 약속이며 유일한 ‘메시지‘ 이다. 시작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되기 전에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다. 정치적으로 시작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한 것이다.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새로운 탄생이 이 시작을 보장한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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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 교육의 목표는 확신을 심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신념도 가질 수 없도록 그 능력을 파괴하는 데 있었다. 순수하게 객관적인 기준을 나치 친위대의 선발 제도에 도입한 것은 힘러의 발명품으로서 위대한 조직 업적이었다. 그는 후보자들을 인종 기준에 따라 사진을 보고 선발했다. 누가 제거되어야 할지 그리고 누가 집행인으로 훈련을 받아야 할지 자연 자체가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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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는 사람들을 말살하고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릴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과학적으로 통제된 조건에서 인간 행동의 표현인 자발성 자체를 제거하고 인격을 단순한 사물, 동물조차 아닌 -잘 알다시피 배가 고플 때가 아니라 벨이 울릴 때 먹이를 먹도록 훈련받은 파블로프의 개는 변태 동물이지만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물로 만드는 무서운 실험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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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장애(障礙)라는 단어에대해 고민해왔어. 무엇인가 가로막고 혹은 결핍되어 불안하게 절룩거리는 단어. 늘 나 자신에게 묻곤 했지. 나에겐 장애가 있나? 단어가 입술 사이를 가로막아 산산조각난 언어. 끝없이 누수되는 호흡, 치아 사이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단어들. 나는 분명 장애가 있지. 타인의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장애는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오직 확인만 가능할 뿐이지. 잘려나가거나 뽑혀 없어져야만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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