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 P7
노인들의 부부싸움은 오래된 고무줄 같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절대 끊어지지 않고, 질기고, 우스꽝스러우며 흐느적거린다. 싸움이 끝난 뒤에도 절대 원위치에 탄력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늘어난 자리에 헐겁게 멈춰 있다. 부부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로가 바뀌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닫게 되지만 끝내 그걸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싸움은 며칠 동안 개정과 폐정을 반복하며 꾸준히 이어졌다. - P41
짐을 싸는 일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과 책을고르느라 몇 시간째 가방을 열고 닫던 나는 새벽이 되자 그만 피곤해져서 눈에 띄는 것들로 대충 절반을 채워넣고 불을 껐다. 막 잠이 들려고 했을 때 갑자기 며칠 전에 사서 넣어둔 이백 알의 감기약이 떠올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서랍을 열고 도시락통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도 알약들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가방을 열고 깊숙한 데다 도시락통을 넣었다. 어쨌든 난 인생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 P45
드라이브가 길어질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꽤나 괜찮은 팀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과 좁은 공간에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상대방과 내가 한 팀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 P72
바람이 불어서 야자수 잎이 휘청휘청 휘날렸다. 내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고모는 그것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고모는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있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고모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 빚진 것이 없어." "그래서?" "자유지"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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