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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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을 이사철을 맞아 전세대란 뉴스가 끊이질 않는데요보통 이사를 앞두고 새 보금자리를 구하러 이 집 저 집 둘러 볼 때 가구배치나 향후 편리한 생활을 위해 디테일하게 따져드는 이면에, 우리 앞에 놓여질 또 다른 삶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설레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그것이 넓은 평수와 안락한 날들을 보장하는 듯한 영국의 대저택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요. 오늘의 책,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주인공인 해리엇과 데이빗. 이 둘은 파티에서 만나 초고속으로 결혼에 골인했음에도 의외로 보수적인(?) 커플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무엇보다 그들이 중시했던 것은 분수에도 맞지 않은 비싼 집과 다소 힘겨울 것으로 예상되는 다산 계획이었죠. 집이 크고 보장된 수익이 있으며, 맡아 기를 능력이 충분하다면 누구도 말리지 않겠지만 한국에서 흔히 보는 풍경처럼, 낳게 되는 아이들은 족족 외조모 도로시의 손에 맡겨지게 됩니다.


넷째 아이 폴까지는 그럭저럭 힘겹지만 복닥복닥 사람 사는 재미도 나 보이고, 비록 반대를 무릅쓰고 사들인 저택이지만 친척들의 방문이나 파티 때엔 요긴하게 쓰이는 등 별 트러블 없이 살아가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원치 않던(피임 실수) 다섯째 아이 벤이 해리엇의 뱃속에서 제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을 때 부터 분위기는 심상찮게 흘러가죠. 팔삭둥이 벤. 그는 여덟 달 동안 쉼없는 발길질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아무도 그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고 심지어 부모조차 그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려 합니다. 기념일이면 넓은 집에 다들 모여 축제 분위기를 내던 지인과 친척들도 벤의 기이한 행동과 모습에 하나 둘 발길을 끊고 형제들 네명 역시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동생의 폭력과 야만성에 기가 질려 자연히 벤은 가족들 속에서 소외되고 말지요.


아이가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면 부모는 심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해리엇과 데이빗 둘의 성격은 결혼 당시엔 죽이 잘 맞았지만 벤을 기르는 과정에서는 운명론적 세계관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입장이라 의견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시종 평행선을 그리며 다툼을 일으키곤 하는데요. 결국 감당이 안되어 요양소로 아이를 보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엄마인 해리엇은 마음 속 진심을 누르고 극구 반대하지만, 그녀의 뜻이 관철되는 건 감옥같은 그 곳에서 아이가 짐승처럼 오랜 기간 취급되고 난 뒤, 그녀의 모성애와 밑바닥에 자리한 죄책감이 일깨워졌을 때 그를 되찾아 오는 과정에서였습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들, 억울했지만 그녀는 기꺼이 총대를 맸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벤이 어떤 병명도, 비정상적이란 판단도 내릴 만한 뚜렷한 근거가 없다는 것인데요. 단지 또래에 비해 엄청난 식욕과 힘을 자랑한다는 것, 그리고 유독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봤을 때 이는 차라리 병이라기보다는 완전한 인간으로 진화되지 못한, 과거 어느 원시 시대 조상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주변과 섞여들려고 딴엔 열심히 노력하지만 '불쌍한 벤'은 배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여서 때론 정말 안타까워 보입니다. 다섯째 아이로 인해 부모는 나머지 넷에 신경을 못 써 줘 늘 미안하기만 할 뿐이죠. '괴물'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걸, 모두와 다른 존재라는 걸 알기나 할까. 해리엇과 데이빗이 갖는 물음의 방향은 어느 새 근원적이고 도덕적인 관념을 향해갑니다.


해리엇은 계속 주장했다. "난 그런 말을 누가 했으면 하고 원하는 거예요. 난 그런 사실이 인정되기를 원해요.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난 참을 수가 없어요." "그 일이 내 능력 밖이라는 사실을 모르시겠어요? 내가 동물원에 보내는 <이 애를 우리에 가두시오>라는 편지를 써 주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과학자에게 그 애를 넘기기를?" - p.143


책을 보며 떠오르는 이런 저런 생각을 주체할 수 없어 따로 노트에 끄적여 가며 읽었지만 어느 새 빠른 속도로 넘어가는 책장에 정리고 뭐고 작품에 푹 빠진 저를 발견했네요. 일단 몇 가지 에피소드와 경험이 떠올랐는데 tv에서 보게 되는 영재나 범죄자 같은 극과 극의 인물들을 보며 종종 우리는 그 부모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해리엇이 느꼈던 죄의식이나 윤리적 책무감은 말할 수 없는 거대함으로 다가왔을 거라고 봅니다. 어쨌든 아이를 낳은 당사자이고 엄마니까 불행을 외면할 수 없었을 거고 영원한 죄책감에 허우적대느니 차라리 벤과 함께 소외되는 쪽을 택한 거죠. 하지만 그 안에 '사랑'이 작용하진 않았어요. 의무감에 가까운, 어쩌면 다리를 저는 불치병 환자가 그 다리를 잘라내지 못하고 저는 다리를 평생 달고 다녀야만 하는 숙명처럼 말이지요.


그녀가 벤에 대해 생각할 때 그건 사랑이나 온정의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내부에서 정상적인 감정적 불티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오히려 죄의식과 공포감으로 그녀는 밤새 잘 수 없었다. - p.105


한편, 벤의 이질적 행동을 통해 현대 인간의 우월의식을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모든 면에서 정상치의 범주를 벗어난 능력을 가진 그가 이해받고 받아들여지는 곳이 집 밖의 '존' 패거리들과 데릭외 그의 갱단인 것은 처음부터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집이 아닌 바깥이며 크게는 문명의 아웃사이더가 되야 할 필연적 운명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한 아이의 운명이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가족 모두를 뿔뿔이 흩어 놓은 중심에는 해리엇과 데이빗의 행복에 대한 집착과 허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행복해질 거란 믿음 아래 그 조건들 하나 하나를 자신들 밑에 두고 통제하려 했고 아이와 집 또한 그런 믿음에 역행하지 않고 잘 따라주리라 믿었으니까요. 작가는 이런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상적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판타지를, '야만'이 등장하여 한 가정이 파탄을 맞는 과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선택할 수 없듯이 아기를 갖는 일도 마찬가지랍니다.(...)"- p.139


암시적으로 끝이 난 소설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벤이란 존재가 우리에겐 때론 무엇이며 해리엇이나 데이빗이 되려 한 적은 없는지 제 자신을 돌아보게도 만들었습니다. 전 아직 미혼이라서 아이에 대한 부담은 멀게만 느껴지지만 만일 기혼이며 자녀계획이 있는 여성이라면 적어도 이 얘기가 남의 일 같이 여겨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다자녀 일 때 애정의 분배 문제라든지, 육아와 바람직한 가정상에 대해선 가장 현실적으로 와 닿는 독자들일테니까요. 좁은 공간 속에 이념의 충돌이나 윤리의식, 모성애, 가족 이데올로기의 진상, 차별 등 많은 문제를 담아내고 있으며 후반에 가서는 추리 소설 못지 않은 긴장과 속도감을 느낄 수 있어 작품성과 흥미 모두를 만족시켰던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신부 외 모든 독자에게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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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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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할 때 대하게 되는 책 중, 읽기 힘든 종류가 두 가지 있는데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 즉,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마치 누구나 가능한 것처럼 권하는 자기계발서가 그 첫째구요. 다른 하나는 현실을 정말 노골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나머지, 그것을 마지막 장까지 힘겹게 소화해 내야 하는 경우인데요. 오늘 소개해 드릴 소설집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후자에 속하지만 희망을 전하고자 하는 전자의 부류들 못지 않은 메세지를 지니고 있는 작품입니다. 요즘 말로 갑질이라 하는 고용주의 횡포와 알고도 당할 수 밖에 없는 도시 근로자들의 나약한 입장을 이 책만큼 상징적으로 잘 대변해 준 글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무치게 다가왔습니다.


때는 1970년대 낙원구 행복동. 그러나 그 곳에 사는 난장이와 그 식구들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도 '낙원'이 떠올려지는 생활도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경제개발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던 35년 전, 모두 다 앞만 보고 발전과 성장만을 외치며 죽자고 달리던 시기에 밑바닥에 버려지다시피 한 노동자들의 모습은 '난장이'라는 특정 인물로 대표되어 소설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반보다 눈에 띄게 작은 기형적 체구로 또한 자연스레 사회, 경제적 취약 계층으로 편입되 버렸고 그 자녀들도 놀림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무거운, 체제의 부산물인 쇳덩어리를 짊어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난장이의 생계 방식은 고스란히 세 아이들에게 대물림되어 세대를 이은 부와 가난의 갈등을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그들은 복잡하고 힘든 일을 합니다. 그들의 어린 동료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줄도 모르고, 인간적인 대우를 어떻게 해야 받는 지도 모릅니다. 현장 일이 그들의 성장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위에서는 날마다 무지한 생산 계획을 세웁니다. 노동자들은 기계를 돌려 일합니다.(...) 197x년, 한국은 죄인들로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 p.166


이야기는 몇 가지 특징을 띠고 진행되는데요. 화자의 잦은 교체, 영상으로 말하자면 회상씬이나 과거의 울림도 적지 않구요. 거기다 간단명료한 문체, 다분히 의도적인 상징성은 독자에 따라 난해하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온 가족의 월급을 다 합쳐도 최저생계비의 근사치에도 가닿지 못하는 절망적인 현실은 회사 측의 막무가내식 노동 착취와 악조건 속 근무 환경이 더해져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욱 험난할 것을 각인시켜 줍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 그리고 그들 중간에서 화해를 돕고 공감하는 조력자로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며 작금의 어느 기업과 온 몸으로 불의에 대항했던 몇몇 얼굴들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서 많은 보수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우선으로 바란다는 대목은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질답일 것입니다. 성실하고 검약한 생활이 곧 잘 사는 지름길이라 그나마 믿었던 사람들은 하나 둘 희망의 끈을 놓아갔습니다. 또 일한 만큼의 정당한 급여와 매일 계속되는 노동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피로도와 복지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은, 아직도 경영주의 입장에선 과한 요구라 느껴지는 모양인 듯 하구요. 은강 노동자들이 그렇게 달게 받는 불이익과 고통을 교육과 변혁으로 깨닫게 하기 위해 가슴으로 고민하는 청년 지섭, 그리고 자신도 또 다른 모습의 희생자인 '난장이'라는 것을 실감한 '신애'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느꼈을 법한 감정과 욕구를 대변해 주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낙원을 이루어간다는 착각을 가졌다. 설혹 낙원을 건설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그들은 우리를 낙원 밖, 썩어가는 쓰레기 더미 옆에 내동댕이쳐둘 것이다. 그들은 냉.온방기를 단 승용차에 가족을 태우고 나가다 교외로 이어진 도로 옆에서 우리를 발견할 것이다. "더럽기도 해라!" 그들의 부인이 말할 것이다. "게으른 낙오자들!" 그들이 말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한 만큼 주지 않은 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p.221


은강계열 회장의 손자인 경훈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는 비열하고 냉소적인 자본가의 눈으로 바라본 발 밑의 세상이, 어떤 협상과 의지로도 교화나 화해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허무한 끝을 예감케 합니다. 작가는 부유한 자본가들이 하층민들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안락함만을 누리는 그들의 유유자적한 삶 자체가 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있다는 인식 조차 하지 못하는 그들은 응당, 반성도 할 수 없고 못 가진 자들과의 화해도 성사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오랜 세월 동안 200쇄를 넘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독자들에게 읽혀져 온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이런 글귀를 읽은 기억이 나네요. 시인이란 직업이 쓸 것이 많고 작품성이 뛰어난 결과물을 다수 배출할 수 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구요. 아마도 이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 소설집이 앞으로도 계속 사랑받아야 할 운명이라면, 부디 이 사회의 부의 피라미드 윗부분에 자리한 지식인과 정재계의 집집마다 한 권씩 빠짐없이 꽂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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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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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주행 중인 종영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제작년에 막을 내린 <학교 2013>인데요. 극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인 박흥수(김우빈)와 고남순(이종석)의 끈끈한 우정도 눈물겹지만,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불안함과 그들을 나름의 가치관에 따라 대응하는 두 선생의 대조된 모습이, 마치 우리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고 우울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죠. 하지만 무조건적 사랑이 주어지는 유아기의 짧은 시절이 지나고 나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 후 이름난 회사에 취직해 반듯한 배우자와 결혼하여 이쁜 손주를 안겨드리는 것 등의 성취의 연속만이 이전의 관심과 칭찬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걸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학생들이 가진 불안은 가깝게는 대학진학의 문제이며 멀게는 불투명한 내 미래의 모습(지위, 성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오늘 소개해 드릴 책,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우리가 겪는 불안의 실체와 그 해결책을 강구함에 있어 도움이 될 만한 책입니다.


날 때 부터 본인의 자리가 정해졌던 과거 신분제에서 탈피해 민주주의 사회로 들어선 근대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요. 누구나 가진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원하는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이 그 첫째요, 이전엔 상상치 못했던 안락함과 물질적 쾌락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게 된 급격한 기술의 진보가 그 둘째입니다. 허나 평등사상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 이면에, 극빈층의 궁핍과 불행을 당위성으로 포장해버렸고, 넘치는 풍요 속에 무분별한 소비를 일삼는 현대인들에게선 끝을 모르는 탐욕과 이기심이 자라나는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높은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좋은 집과 차, 옷, 가구등을 사들이고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질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또한 생의 반려자나 일의 파트너를 선택할 때 지극히 계산적인 판단 즉, 학력과 재산, 집안등의 배경에 의해 좌우되는 이른바 '속물근성'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정말 비참한 순간이 나의 일부분으로 '나'라는 정체가 너무 쉽게 판단지어지는 것일 텐데요. 마치 어떤 물건을 보고 '저건 무엇이구나' 하고 인지하듯 외적 모습과 서류상의 몇몇 사항으로 "됐구요. 다음!"이 외쳐지는 서글픈 현실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타인이 나를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아주기를 바라죠. 한 사람을 속성으로 증명해 주는 명찰인 '지위'는 이제 누군가의 사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수능 날을 받아 놓은 수험생과 면접 날짜를 앞둔 취준생에겐 자신의 꿈이나 이상, 목표보다는 당장의 좋은 결과로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성취를 향한 그러한 경쟁의 과정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단연 또래의 성공, 그리고 그들과의 끊임없는 비교 심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 p.59 


능력주의 사회의 위계 속에서 지위와 돈에 의한 냉정한 평가가 이뤄지는 세태에 작가는 몇 가지 해법을 제시하고 나섭니다. 그것은 크게 '예술', '정치', '보헤미아'와 같이 적극적이거나 혹은 '기독교', '철학'과 같은 소극적인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요. 드 보통은 역사적으로 이런 대안들이 사상가, 예술가, 정치가들에 의해 연설과 작품등으로 실현된 것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교회에 나가 말씀도 들어보고 체념한 듯 염세주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가장 효과가 있었던 건 소설이나 음악, 공연같이 대중에게 이상적 교훈을 설파하고 정말 소중히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주는 대변자 겸 아군과도 같은 예술이었습니다.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 p.180


만약, 정치적 관점에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위인이,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바로잡고자 큰 목소리를 낸다면 얘기는 조금 쉬워질지도 모릅니다. 허나, 이미 높은 자리에 위치한 권력가가 본인들과는 상관없는 하층민들을 위한 이념 전복을 꾀한다는 건 지금의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랜 세월 사회적으로 열등한 위치를 점해온 '여성'이라는 집단을 일상에서부터 교육, 소득, 정치적 참여에 이르기까지 종래의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와 혜택을 누리게끔 당당한 요구를 했던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본인 역시 여자였음에도, 그 대단한 열의를 지위 재정립이라는 커다란 성과로 일구어냈다는 점에 있어 칭송받아 마땅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간다.(...) 그런 이상이 돌로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 밖에 없다. - p.245 ~ 246


광활한 대지와 거대한 빙하, 폐허가 된 역사의 장소 또는 죽음을 앞둔 환자. 이 모든 것을 보며 드는 공통된 느낌은 인간은 다 먼지같은 존재이고 빈부란 것도 요즘 말로 '아이고 의미없다'로 일축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어쩌면 못 가지고 실패한 루저들의 슬픈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가진 자들에겐 꽤 잔인한 허무함을 안겨주는 비책(?)임엔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불안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도, 그것을 내 안에서 바로잡아 누구의 시선에도 신경 끄고 맘 편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 <학교 2013>에서 강세찬(최다니엘)선생은 이런 현실의 불안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학교라는 전쟁터에서 각자의 무기를 들고 싸우는 도리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 계약직 여(장나라)선생은 자신 또한 학교를 잘릴 위험(취직의 불안)에 처해있지만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학생들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토닥여줍니다. 냉혈한으로 보였던 강 선생도 사실 정 선생처럼 따뜻하고 바른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이 사회가, 현 교육 현실이 그걸 막고 있었을 뿐이었지요.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 p.268


기술의 발전이 멈추지 않고 사회적 지위라는 체계가 무너지지 않는 한 우리의 불안이 완전 해소될 길은 요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안과 자라나는 아이들의 불안이 커져갈 때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말하는 것과 위의 대안들과 같은 해법으로 그들과 우리를 다독여 줄지는 각 개인의 몫입니다. 오늘 본 드라마 회차에서 민기라는 학생이 자살 시도를 했는데요. 정 선생에 의해 발견된 그 아이는 가방을 옥상에서 왜 던졌냐는 질문에 "너무 무거워서요"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기대. 어깨 위에 지어진 그 짐은 누군가에겐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혹은 친구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서 혹은 셀러브리티로써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밖에 내려놓을 수 없었던 커다란 짐이었음을 우리는 여러 번 목격해왔습니다. 불안은 자신이 원한 만큼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죠. 소박한 삶을 살았던 보헤미아의 정신은 그에 있어 좋은 교훈이 될 것 같군요. 지금 여러분을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의 정체는 정말 본인이 원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 타인이 만든 기준에 의한 불안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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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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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다. - p.9


사랑과 죄의식, 욕망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간직한 채 세인들의 관심밖에서 수십년간 방치되었던 곳 천산 수도원.

'헤브론 성'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죽은 형에 대한 죄책감을 가진 강상호에 의해 우연히 이뤄진 일인듯 보였습니다. 그의 발걸음을 산꼭대기로 이끈 것은 유고집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그 곳을 미스터리하게 묘사한 형의 메모가, 왠지 그에게 남겨진 유지(遺志)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지상과 지하로 나눠진 수도원엔 72개로 나눠진 방들이 있었고 흙벽에는 화려하게 적인 성경구절들이 빼곡했는데 , 그 내용이 강영호의 책으로 출간되자 교회사를 전공한 젊은 강사 차동연이란 인물이 관심을 보입니다. 그는 성경이 필사된 벽이 예술적 가치나 규모 면에 있어 '켈스의 책'에 필적한 만한 훌륭한 자료라는 해석을 내놓으며 그러한 성스러운 행위를 한 사람(혹은 집단)이 누군지, 필사를 한 이유와 현 행방에 대해 구체적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5살 소년 후. 그는 사촌 누나인 연희를 마음으로 품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가, 연희를 겁탈하고 매정하게 내친 박 중위를 찌른 건 우발적인 동시에 우발적이지 않았다, 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 중위는 연희에 대한 욕정을 실현하려 후와 그의 아버지를 이용합니다. 라면과 빵, 과자로 소년을 회유하고 엄청난 외상 술빚을 대신 갚아줌으로써 '화대'를 치른 그는 그녀를 강제로 유린합니다. 그 일이 삼촌과 의기투합된 일이란 걸 알게 된 연희는 마을을 떠나 종적을 감춰버리고, 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박 중위의 더러운 욕정을 채우기 위한 조력자로 이용된 것에 대해 분개하는 한편, 커져가는 죄책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워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사촌 누나를 욕보인 그를 단죄하기 위한 칼부림이었으나 사실 그 내면에는 그녀를 향한 이성으로써의 금기적 끌림이 행위의 상당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기에 더욱 견딜 수 없었죠.


그가 어리지 않다고 우기고자 한 것은 박 중위와 마찬가지로 자기 역시 연희 누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박 중위가 인위적으로 쳐 놓은 장벽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 p.86


세찬 비가 쏟아지던 그 날, 후는 끔찍한 자신의 죄를 평생 부둥켜안고 숨어 지낼 천산 수도원에서의 첫 하루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그 곳에서 성경 필사 중에 접하게 된 이야기, 이복 누이인 다말을 취한 암논을 응징한 압살롬이 마치 자신처럼 느껴진 것도 운명같았습니다. 1970년대 군부독재 정권 시절, 세상 밖은 어지러웠고 그 들썩임의 영향은 수도원 인원의 절반을 감축하라는 청천벽력의 정부지시로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건의 소용돌이 중심에는 '한정효'라는 핵심 인물이 있습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권력자의 오른팔이었던 그가, 아내의 죽음 이후 뒤늦게 깨달은 욕망의 덧없음은 그로 하여금 절대자의 그림자이기를 포기하고 과감히 변절하는 쪽을 택하게 했습니다. 결국, 그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세상에서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인 수도원의 일원으로 연금 생활을 하게 됩니다.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성경의 페이지들이 빠르게 그의 머릿 속에서 빠르게 넘어갔다. (...)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 그는 자기를 압살롬과 동일시했고, 애써 압살롬이고자 했지만, 그러나 또한 압살롬이기 전에 암논이며, 압살롬보다 더욱 암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 p.280


인원 감축 과정에서 쫓겨나다시피 세상 밖으로 나온 후는 갈 곳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무작정 길을 나선 그는 연희를 찾겠다 마음먹고 전국을 떠돈 끝에 그녀와 재회하지만 자신을 팔아넘기다시피 한 삼촌의 아들은, 연희에겐 잊고 싶은 지난 일의 악몽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괴로운 존재일 뿐입니다. 그녀가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는 또한 잠재되어 있던 후의 욕망과 죄의식을 불러왔고 그것은 지난 날 그가 '사모님'과 부정적 관계를 맺었을 때 단지 의무감이 아닌, 마음 한 곳에 음흉한 쾌락이 연희의 이름과 모습으로 바뀌어 작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거울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연희가 꿈 이야기를 하며 괴로움을 털어놓았을 때 후가 충격을 받은 것은 연희의 고통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나 공감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은밀한 쾌락이 발각되고 통박되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쾌락을 똑바로 보게 했다. 그는 치욕과 충격의 구렁텅이로 떨어졌고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 p,301


천산 벽서에 관한 비밀을 파고드는 차동연에게 '장'이란 자가 연락을 해옵니다. 퇴역 군인인 그는 한 때 수도원 앞을 지키던 초소 근무를 했던 인물로, 한정효로 인해 수도원 전체가 몰락해가는 과정을 현장에서 목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권력 앞에 무력했던 수도사들과 당시 정권과 한 편이 되어 '형제'들에게 몹쓸 짓을 자행한 자신을 반성하며 얼마 남지 않은 생에 남은 죄책감 모두를 떨어 버리려, 고해성사를 하듯 차동연 앞에서 담담한 고백을 이어갑니다. 천 여명에 달하는 수도사들이 한 순간 자취를 감춘 놀라운 사연이 '장'의 입을 통해 드러나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과거 얼룩진 한국의 현대사였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이념으로 내걸고 맞서 싸운 민주주의(수도원)가 군홧발에 짓밟히고, 정권에 반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유폐되고 처단되는 현실이 소설 <지상의 노래>로 다시금 쓰여지고 회자되어진 것입니다.


젊은 군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일을 했어. 하기야 대부분의 엄청난 일들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 p.220


한 시대가 시작되기 위해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했다는 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 p.221


일어난 일은 욕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의도가 일어난 일의 실상에 대해 알려 주지 않는다.(...) "결과는 동기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동기는 결과를 제어하지 못한다." - p.26


소설은 등장인물이 지닌 죄책감과 죄의식의 굴레들이 서로 얽히고 사랑과 권력에의 욕망이 중첩되면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뻗어 나오는 많은 갈래들이 서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개인(강상호)의 죄책감이 부른 행동은 역사의 비밀과 진실이 알려지길 바라는 또 다른 이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죄책감을 풀어주는 한편, 영원히 묻힐 것 같았던 천산 수도원의 비극을 만 천하에 드러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3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 스토리의 짜임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반면, 아름다운 문체와 치밀한 플롯에도 불구하고 이승우 작가만의 특색인 동어반복적 어법과 짙은 종교적 색채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요. 그러나 확실히 이해되지 않는 문장과 단어 속에서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초월적 가르침은 현실의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고 소설이기에 가능한 어떤 것이기에, 책을 덮고 밀려오는 섬짓한 감동을 한동안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덧붙여 문학을 어려워하는 저에게 참다운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몇 안되는 작가로써 또 다른 작품이 기대되는 수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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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새 책 -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
박균호 지음 / 바이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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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보다는 '지름신'에 대해 최대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자부하는 저도 딱 한 군데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책인데요. 특히 너무도 읽고 싶은 책이지만 값이 비싸다거나, 오래 전 절판된 책이 싼 값에 '중고 알림'으로 도서쇼핑몰에 뜨는 날이면 제 손과 마음은 바빠집니다. 누가 먼저 채갈까 싶어 선뜻 장바구니에 넣었다가도 미처 읽히지 못한 채 대기 중인 책장의 장서들을 바라보며 결제를 망설이다 번번히 '판매완료'되었다는 문구에 허탈함을 느꼈던 경험.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어보셨을 거에요. 왠지 모순된 어감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한 오늘의 책 <오래된 새책>에서는 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저자가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접해왔던 책에 대한 이미지, 오랜 독서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 내력을 포함하여 절판된 수많은 책을 찾아 길고 긴 순례를 해왔던 나날들을, 의미 있는 본인의 책 목록과 함께 일기식으로 부담없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에 관한 책이나 대중적으로 잘 다뤄지지 않는 이색주제의 책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요. 서두에 언급된 <숨어사는 외톨박이>나 <한국의 자생풍수>, <판서, 칠판화 기법>과 같은 책이 그것입니다. 잊혀져 가고 있는 옛 조상들의 관습, 지혜가 담겨 있는 이러한 책은 문화 계승의 의미로써도 그 소장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것으로 취급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한편, 저도 가끔 겪는 일이지만 중고책을 이용하다 보면 전 주인들에 관한 정보를 의도치 않게 접할 때가 생기는데 책을 선물로 주고 받은 기록이 분명한 작가의 싸인본이 걸릴 때는 낡은 자취를 즐기는 저자로써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고 하네요.


자필 서명본을 가급적 남발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서재에 있는 많은 저자 서명본 중에는 그 책을 쓰면서 신세를 지고, 평소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보내는 정성어린 메세지가 곁들여진 자필 서명본이 '무참히' 헌책방을 거쳐서 정작 저자와 일면식도 없는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 p.234 ~ 235


문학, 역사, 철학, 에세이, 자서전, 만화, 미술사학, 사진집, 고서등 그가 25년간 수집한 3000여권의 책들은 현재 고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는 저자의 박식함만큼이나 그 분야 또한 폭넓고 방대합니다. 그러나 소위 책을 오래, 많이 접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느낄 수 있는 아는 척, 어려운 용어 남발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책에 소개된 수많은 책들을 또다른 애서가들로 하여금 구해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에 대한 책'이 가지는 불가피한 단점이자 매력이 <오래된 새책>을 쓴 저자 또한 의도한 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그가 다른 책수집가들과 차별되는 면이 있다면 소장 중인 책 대부분이 제각각의 의미와 추억을 가지고 내용으로써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존재 가치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2010년, 법정스님의 입적과 함께 그의 저서 모두가 절판된 후 독자들이 뒤늦게 너도나도 <무소유>를 '소유'하려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웃지 못할 사태가 있었죠. 그러나 <무소유>를 비롯한 모든 책들이 절판 위기에 놓이고 나서야 많은 이들이 해당 책에 관심을 보이고 그것을 손에 넣으려 애쓰는 상황을 보며, 책의 내용 여부를 떠나 그것이 단지 희귀해졌다는 이유만으로 허무맹랑한 웃돈이 오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름 독서광을 자처하는 저로써도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책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 필요가 절실한 사람과 단순히 장서를 취미로 삼는 사람에겐 같은 책도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마련입니다. 그런 이유로 독서가들 대부분이 책을 나누거나 판매할 때 가급적이면 해당 책의 가치를 알고 요긴하게 봐 줄 수 있는 분에게 가길 원하는 것이겠죠.


(...) 내 책의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내 책의 운명이 넘어갔을 때의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면 가능한 한 자주, 많은 책을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 p.59


이미 국내에도 고서점에 관한 여러 책이 번역 출간된 바 있는 일본은 저자에게도 선망의 대상입니다. 책을 읽으며 경탄을 금치 못했던 것은 어려운 해외 원서를 중역으로 발간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대중의 관심이 미처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인 책들조차도 엄연히 완역본이 존재하고, 심지어 그것들이 두꺼운 도감이나 고서, 의미있는 문화사에 관련된 가치있는 책들임을 고려한다면 책에 대한 열정과 그 지식에 대한 탐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밖에 설명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반면,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가차없이 절판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수많은 책들의 운명이 한국에선 당연시되는 풍조가, 일단 좋은 책이라고 생각되면 위시리스트에서 품절을 맞기 전에 서재에 들이고부터 봐야 하는, 독서가들의 애로사항을 낳은 게 아닐까 합니다.


국내의 독자들이 베스트셀러 위주의 독서를 한다는 것은 결국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절판'과의 처절한 싸움으로 요약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가의 고전 소설집이 나온 지 겨우 수년 만에 절판되고, 모 인문 관련 총서는 완간도 되기 전에 먼저 출간한 목록의 일부가 절판되는 다소 놀라운 경우가 '놀라운 일이 아닌 일'이 되는 것이 우리 출판계의 현실이다. - p.256


또한 저자는 헌책 수집가답게 필요한 책을 구하는 본인만의 여러 루트와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 과정에서 알게 되는 서점 주인이나 자신 못지 않은 방대한 장서가들과 접촉을 하면서 오직 '책'하나로 통일되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때론 귀한 매물을 누가 볼까 쉬쉬 하며 거래했다는 에피소드는, 책으로 인해 엮어지는 인연의 소중함과 그 어느 것에도 비견할 바 못 되는 '득템'의 희열을 아는 독서가분들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었습니다. 요즘엔 sns나 블로그, 카페와 같이 책에 대한 의견이나 서평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소통 공간이 많아졌지만 신간과 몇몇 분야에 편중된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그 밖의 다양한 독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한, 빠른 절판의 일로를 막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출판 시장에서 각 분야의 서적은 십대와 젊은 여성, 중년 남성등으로 그 선호도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저자는, 매주 그 순위가 바뀌는 베스트셀러 목록이 누군가에겐 책 고르는 재미를 반감시키는 치명적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또 나에겐 너무 소중한 책들이 어떤 이에겐 그저 허세나 돈낭비로 치부되고 마는 현실에 대해서 '책 수집가를 위한 변명'이란 부제목을 달아 책을 좋아하고 모으는 것이 결코 사치나 쓸데없는 짓이 아니란 것을 나름 설득력 있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를 포함한 많은 독서광들에겐 든든한 아군같은 이런 분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더불어 다수의 좋은 책을 소개하는 <오래된 새책>과 같은 도서가 더욱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 또한 같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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